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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양 칼럼] 뉴에이지로 통합되고 있는 유사 기독교 신비주의

사진: Jon Tyson on unsplash

눈먼 기독교(30)

뉴에이지 현자들의 사상은 인도 대륙에서 독특하게 탄생한 사상이 아니다. 이미 기독교가 온 유럽을 뒤덮고 있던 중세 시대에 비기독교적 신비주의로 유사한 주장을 내세운 사람이 있었다.

먼저 자신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신을 깨달을 수 없다. …영혼의 심연으로, 비밀스런 곳으로 들어가라. …근원으로, 높은 곳으로 가라. 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그 곳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1]

이 말은 13세기 독일의 신비주의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한 말이다. 그에게 신은 인간 스스로 깨달음의 경지를 통해 찾아 낼 수 있는 대상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시각에서는 상당히 위험한 개념이다. 기독교는 인간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늘의 하나님을 찾아 올라가는 상향(上向)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알려주시기[2] 위해 하늘로부터 세상으로 내려오신 것을 믿는 하향(下向)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종교는 자력 구원을 추구하는 상향 종교인 반면, 오직 기독교만이 타력 구원을 인정하는 하향 종교다. 그런데 에크하르트는 자신의 깨달음에 의한 신적 깨달음을 말함으로써 중세판 뉴에이지 영성을 드러내고 있다.

에크하르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서 하나님마저도 가져가 주시기를 기도한다며 탈(脫) 하나님 사상을 주창했고, 인간은 비록 어떠한 것이 하나님이 아닌가를 잘 알고 있더라도 하나님이 무엇인지를 알 수는 없는 것이라며 기독교의 계시 신앙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그에게 하나님의 존재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즉, 오래 전부터 그는 불가지론을 내세웠다. 마치 이 시대의 힌두 사상가처럼 그에게 인간과 자아와 마음이 참 하나님의 계시보다 더 중요했다.[3]

기독교적 배경을 가졌으면서도 이교적(異敎的) 신비주의자였던 헤르만 헤세는 니체로부터 영향을 받아 저술한 『짜라투스트라의 귀환』에서 자신 속에 있는 신을 찾는 법을 배우라고 말한다.

너희들의 미래와 너희들의 어려운 길은 이 길이다. 즉, 성숙하게 되는 것. 그리고 너희 자신 안에서 신을 발견하는 것 말이다. 너희는 항상 신을 추구했다. 그러나 결코 너희 자신 안에서는 추구하지 않았다. 신은 그곳 이외에는 아무 데도 없다. 너희 자신 안에 있는 신외에 다른 신은 없다.[4]

헤세의 사상은 기독교 사상과는 판이하게 다른 범신론이라는 것이 명확히 나타나고 있다. 그는 부처와 예수가 동일한 지혜를 가르치며, 쇼펜하우어와 선각자들이 동일한 사상을 말한다고 확신했다. 그가 확신했던 그 동일한 지혜와 사상은 바로 인간 안에 신이 있다는 것이다. 에크하르트처럼 헤세 역시 평생 기독교를 떠난 적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기독교는 온전한 기독교가 아니라 유사(類似) 기독교다. 자기 힘으로 구원을 이룬다는 믿음은 어떤 종류이건 진짜 기독교가 아닌 것이다.

유사 기독교를 따랐던 이들에 비해 일반 철학을 하면서도 기독교적 가르침을 잊지 않았던 키에르케고르의 다음과 같은 글은 얼마나 많은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가?

믿는 자는 어떻게 해서 자기가 구원될 것이냐 하는 것을 전적으로 신에게 맡긴다. 그리고 신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자신의 파멸을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적으로는 그것이 자기의 파멸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계속 가능성을 믿는다는 것, 이것이 곧 ‘믿는다’는 것이다.[5]

힌두 현자들과 유사 기독교 사상가들이 말하는 신은 결국 인간 자체인데 이는 성경적 기준에서 보자면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는 무지일 뿐이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있기는커녕 결코 파멸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파멸되지 않을 수 있는데 그것은 절대자 하나님이라는 신을 믿음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 가능성은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신적 구원을 거부하는 것은 스스로 절망에 빠지는 것이며 이것이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다. 인간이 신을 의지할 기회를 버리고 나약함에 빠져있는 것은 죄고, 동시에 신을 저버리고 스스로 구원자가 되려는 착각도 역시 죄다. 키에르케고르의 말대로 죄는 강화(强化)된 나약함 또는 강화된 어떤 반항인 것이다.

뉴에이지가 말하는 자유와 행복

뉴에이지는 기독교와 상반되는 사상을 가지고 있지만 겉으로는 매우 흡사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그 가치를 인정하는 자유와 행복이라는 주제를 그 전면에 내세우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시 그런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속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한다. 중국에서 선교사로 지냈던 문학가 펄 벅을[6] 예로 들어보자.

나는,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을 믿는다. 우리의 의지만으로도 운명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을 결의할 수 있기 때문에 운명으로부터, 어떠한 환경으로부터도 자유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모든 종류의 숙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태어났다. (중략) ‘나’는 결코 당신이 아니며 또 다른 어떤 사람도 아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것을 의식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한 자유다.[7]

펄 벅이 지금 말하는 자유는 다른 사람이나 어떤 운명에 속하지 않는 자유다. 이것은 인간 본연의 권리며 타당한 주장이다. 그런데 그녀는 여기서 멈추고 있다. 기독교 선교사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흔히 말하는 자유 이상의 것을 말하지 않고 있다. 사실 펄 벅은 명목상 선교사이기는 했지만 예수 안에서의 자유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는 자유주의[8] 신앙인이었다. 그녀는 예수라는 진리가 부여하는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 절대 구원 신앙을 거부하던 사람이었다. 쉽게 말해서, 펄 벅은 인간이 스스로 자유를 창조하고 누릴 수 있다는 뉴에이지의 자유 개념을 중국 본토인들에게 전파했던 이단아(異端兒)적 선교사였던 것이다.

펄 벅은 소외받는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에게 궁극적인 믿음은 오직 인간성에 대한 신뢰 뿐이었다. 자신은 인간에 대한 믿음 외에 다른 어떤 믿음도 필요하지 않다고 종종 말하곤 했다. 말년의 공자(孔子)처럼, 천국이나 천사를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은 지구의 경이로움과 그 안의 생명에 심취된다고 고백했다. 자신은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녀에게 세상은 부조리가 가득하지만 그래도 인간 스스로 극복해나갈 수 있는 긍정의 대상이었다. 자신이 무력(無力)하다는 생각만 하지 않으면, 인간은 누구나 무력하지 않다는 것이 펄 벅의 신념이었다. 그녀는 기독교인으로서가 아닌 인본주의자로서 살았던 사람이며, 그녀의 세계관은 철저하게 뉴에이지 사상과 함께 하는 것이다.

물론 펄 벅 자신은 뉴에이지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근본주의를 부정하며 살았던 그녀의 모습은 기독교보다 인본주의와 합리주의를 더 추구했던 것을 보여준다. 펄 벅은 복음이 아닌 물질로 중국 선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녀의 사상은 당시 맹렬하게 퍼지고 있던 자유주의 사상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그래샴 메이첸 교수와[9]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펄 벅은 각종 기고문을 통해 메이첸을 공격했고, 메이첸 역시 근본주의 5대 교리를[10] 부정하던 펄 벅 선교사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 결과, 메이첸의 입지는 좁아졌고, 펄 벅은 스스로 선교사직을 그만 두었다.

인간이 자유의 주체이므로 세상 모든 것을 ‘자유롭게’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뉴에이지 사상은 펄 벅처럼 특별한 삶의 배경을 가진 사람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보편적 사상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미국 대법원의 케네디 대법관은 ‘자유의 핵심은 존재, 의미, 우주, 인간 생명의 신비에 대한 개념을 개인이 스스로 정의할 권리다’라는 판결문을[11] 발표한 바가 있다. 인간에 대한 주요 개념을 ‘개인’이 ‘스스로’ 정의하는 것이 참된 자유라고 선포함으로써 인간의 가치와 역할에 대한 상대주의적 판단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이 말은 낙태를 내 마음대로 해도 그것이 자유며, 자살을 하도록 도와주거나 방조하는 것도 내 자유니까 남이 간섭하면 안 된다는 의미가 된다. 건국 이후로 성경적 절대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던 미국에서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적 가치관을 법적으로 옹호한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자유에 대한 이러한 자유로운 사상은 인간의 행복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판단하도록, 그래서 각자가 믿는 바대로 살아가도록 만들었다. 목사의 아들로서 동양과 서양의 지성계에 널리 알려진 린위탕은 인간의 불합리성과 불완전함조차도 인간적 행복을 위한 필요조건임을 역설한다.

인간의 마음에 매력이 있다고 하는 것은, 거기에 불합리성이 있고, 구제 불가능한 편견이 있고, 불안정한 마음이 있으며, 예측 불가능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중략) 인간의 정신은, 오늘날에 보다시피 애교가 있는 동시에 불합리한 편이 오히려 좋다. 인간이 모두 완전무결한 이성적인 동물이 된 세상이란 꼴 보기도 싫다.[12]

린위탕은 죄를 짓지도 않는 성인(聖人)에게는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간의 불합리성, 모순, 어리석음, 바보스러움, 편견, 고집, 건망증이 바로 인간으로서의 매력이라고 그는 확신한다. 인간에 대한 한없는 애정과 긍정이 드러나는 린위탕의 사상은 전형적인 뉴에이지의 가치관이다. 인간이 스스로, 왕이 되어, 온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 수 있다는 낙관적 기대가 뉴에이지의 근본 사상이다.


[1] 매릴린 퍼거슨, 『뉴에이지 혁명』, 정신세계사, 485쪽

[2] 계시, 드러냄, revelation

[3] 에크하르트는 또한 이런 말도 했다. “내가 쉽게 알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나는 그를 하나님으로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있지만, 여전히 피조물 너머에 계신다.” “그대는 또한 하나님에 대해 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인식을 초월하여 계시기 때문이다. 그대가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안다 해도 하나님은 그대가 아는 하나님이 아니며 그대는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인가 알았다’고 하는 무지와 어리석음에 빠져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4] 김태한, 『뉴에이지 신비주의』, 라이트하우스, 133쪽

[5] 키에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일신서적공사, 54쪽

[6] 부모님이 중국 선교사였으며 그녀 역시 결혼 후 남편과 중국 선교를 했다. 아버지가 가정을 돌보지 않아 그에 대한 반발심이 심하게 있었다. 한국을 수차례 방문하여 ‘박진주’라는 이름도 가졌으며, 그녀가 입양한 일곱 명의 아이들 대부분이 한국계였다. 3부작 대하소설 『대지』로 193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7] 버트런드 러셀 외, 『나는 믿는다』, 범우사, 57쪽

[8] 성경의 완전성을 인정하지 않고, 성경에 나오는 초월적 가르침, 행위, 이적을 부인하는 신학 사상으로서 ‘현대주의’라고도 한다.

[9] 프린스턴 신학교와 미국북장로교가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 점점 좌경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투쟁했던 보수주의 신학자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고, 결국 그는 보수신앙을 견지하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웠다.

[10] 기독교 신학의 가장 근본이 되는 다섯 개의 교리를 말한다; 성경의 무오성, 예수의 동정녀 탄생, 예수의 대속적 죽음, 예수 이적의 역사성, 예수의 육체적 부활.

[11] 찰스 콜슨, 『대중문화 속 거짓말』, 홍성사, 43쪽

[12] 임어당, 『생활의 발견』, 학원사, 60-61쪽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눈먼 기독교>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박태양 목사 | 중앙대 졸. LG애드에서 5년 근무. 총신신대원(목회학), 풀러신대원(선교학 석사) 졸업. 충현교회 전도사, 사랑의교회 부목사, 개명교회 담임목사로 총 18년간 목회를 했다. 현재는 (사)복음과도시 사무총장으로서 소속 단체인 TGC코리아 대표와 공동체성경읽기 교회연합회 대표로 겸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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