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차량 네비게이션의 길안내와 같이 우리를 인도하실까? 단연코 아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최단경로나 최소비용이 들어가는 코스로 안내주실 것으로 여기고 있는 듯 하다.
믿음의 길에서 우리가 겪는 실망은 대부분 오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선교적 삶을 살기로 결단한 이후,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훌륭하고 멋진 지도를 주실 것으로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그런 주문형지도는 없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생명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시기의 차이가 있을뿐 언젠가는 선교적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바울이 고백하듯, 하나님이 복음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게 하셨다(롬15:16).
하나님은 네비게이션이 아니다 주님은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보내시며, 원수들을 다스리신다(시 110:2). 이 땅의 모든 사람과 사건은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
의 재정과 상업, 오락과 교육, 산업과 노동, 예술과 과학, 통치자와 정부에 관여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통치권에서 벗어나 있는 세상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열방을 품은 그리스도인 즉, 선교적 삶을 살기로 결단한 성도는 주님이 행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자원하여 새벽부터 자원하여 일어선다. 이것이 바로 시편 110편 3절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의 의미이다. 우리는 선교 비전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이다. 선교적 삶을 살기로 결단하고 헌신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비전을 쫓아 가는 삶이 아니다. 한 마디로 주님을 좇아가는 삶이다. 그러면 우리는 부르심에 순종할 수 있다. 타문화권으로 들어가거나 내가 살고 있는 곳으로 찾아온 땅끝 사람(이주민)을 섬길 수 있다. 선교사라는 이름이든 주님이 허락하신 영역에서 어떤 이름이든 열방을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같은 섬김의 기간을 장기나 단기로 제한한이유도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순종의 삶에도 전제는 있다. 항상 우리가 나아가야할 초점과 목표를 확인 해야한다. 우리의 선택이 그리스도의 세계를 향한 목적과 관련이 있을 수 있으나, 그리스도가 초점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그리스도가 없는 프로그램이나 프로젝트에 우리의 삶을 소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상태에 대한 분별이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의 노력으로 불가능함을 인정해야 한다. 복음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으로 귀결되는 십자가 복음 외에는 우리를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게할 능력은 없는 것이다. 복음에 관한 지식적 동의가 아니다. 복음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곧 나의 전부일 때 비로소 주님이 꿈꾸시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신분이 회복되는 것이다.
결국 선교적 삶을 살아내는 출발점은 복음이 내 삶에서 실제가 돼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예수님 수준의 중보자로 우리의 정체성이 회복된다. 그렇게 살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이다. 선교적삶은 복음과 기도가 결론된 삶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선교적 존재로서 헌신하려는 우리에게 주님은 먼저 예수 생명으로 변화되고 회복되기를 원하신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이 나를 쓰실 수 있도록 나를 드릴 수 있게 된다. 이처럼 헌신이란 주님이 주님의 일을 하시기 위해 주님이 친히 일하시도록 나를 드리는 것이다. 주님이 나를 선교적 존재로 부르셨음을 확신하는가. 주님이 허락하신 두 기둥인 복음과 기도가 내 삶의 결론인지 먼저 확인하자. 주님이 이같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갖도록 준비하는 교육훈련과 복음과 기도를 삶의 중심으로 붙잡고 순종하는 원리와 교육훈련 과정, 증인의 삶 등을 소개한다. [복음기도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