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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TGC 칼럼] 팀 켈러를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진: TGC 제공

“성도들이 그대로 말미암아 마음에 생기를 얻었습니다”(몬 7). 슬프게도 이 구절 속 칭찬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팀 켈러는 다르다. 그에게만은 이 칭찬이 적합하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게 바로 개인적인 감사와 더불어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이다.

팀 켈러는 내가 가장 신뢰한, 우리 세대에서 매우 두드러진 그리스도의 목소리였다. 그가 말하거나 글을 쓸 때, 행여라도 나중에 켈러로 인해서 창피를 당하는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진실을 외쳤다. 그가 진실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께 진실했다.

1980년대에 나는 켈러의 사역을 처음 접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의 교수였던 그는 PCA 교회 개척자를 위한 여름 훈련 행사에서 가르쳤다. 그리고 The Gospel Coalition으로서의 그의 지도력이 점차 형성되고 정의되었고, 그 결과 TGC는 다양한 양심적 그리스도인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긍정적인 집결 지점이 되었다. 그 후 그의 책이 출간되기 시작했고, 그리스도인에게 새로운 명확성이 필요한 바로 그 포인트를 중심으로, 그는 복음의 의미를 더욱 강조했다. 그리고 뉴욕에 있는 리디머 장로교회의 목사로서 그의 설교는 ‘설득력 있는 신실함’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켈러의 사역에서 세 가지 측면이 눈에 띈다.

  1. 충만한 복음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하나로 만드는 중심축이 되는 “충만한 복음”은 성경적 복음에 대한 원칙적인 감수성을 의미한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위치를 완전히 바꾸도록 하는 복음에 대한 경외심이다. 그리고 그 전환은 모든 수준의 인간관계에서 매일 만나는 다양한 관계에서 일어난다. 충만한 복음은 그리스도의 실제 모습과 더 일치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방법이다. 그 결과로 이 세상에 그리스도가 더 드러나게 된다. 충만한 복음은 교회도 새롭게 한다. 복음을 축소하던 교회가 복음이 삶 속에서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키도록 힘을 쏟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Center Church에서 “복음은 모든 것을 바꾼다”라는 제목 아래 켈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복음은 단지 ABC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삶의 A부터 Z까지이다. 비그리스도인을 구원하는 건 복음이고, 그리스도인은 단지 성경적 원리에 따라 열심히 살려고 노력함으로써 성숙해진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우리는 복음을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 복음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복음을 더욱 깊이 믿어 이성과 마음, 그리고 삶의 모든 부분이 변화된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이것은 켈러가 약 이십 년 전에 내 사역을 바꾼 방법이다. 지난 시간 많은 영적 선배가 나를 도왔다. 내 아버지 J. I. 패커, 존 스토트, 프랜시스 쉐퍼 등등. 그러나 켈러가 전하는 복음을 전체적인 관점으로 듣기 시작했을 때, 그때까지 내가 갖고 있던 단편적인 생각은 기꺼이 그가 제시하는 더 큰 비전에 자리를 양보했다. 십자가, 은혜, 대속, 전가,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와 같은 친숙한 주제들, 마침내 이 모든 진리와 다른 것들이 하나의 초점, 즉 우리 모두의 필요를 채우는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으로 수렴되었다. 그렇다. 켈러는 박식했고 또 명료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게 있다. 그는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더 나은 그리스도를 보여주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에게 매료되었다.

나는 그 일이 언제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기억한다. 2000년 7월, 자동차 여행 중이었다. 당시 나는 조지아 오거스타에 있는 제일장로교회 목사였다. 나는 여름휴가가 끝나고 모든 교인이 돌아왔을 때 로마서 강해를 시작하려는 계획이었다. 아내와 내가 휴가를 떠나기 전, 교인 중 한 사람이 리디머 교회에서 한 켈러의 설교 카세트테이프로 가득한 신발 상자를 건넸다. 자,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신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조지아에서 아이오와까지 차를 몰고 왕복하는 시간 내내 우리 부부는 켈러의 설교를 들었고, 또 토론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가 쉬지 않고 반복하는 강조점, 복음 자체의 포괄적 관련성이었다. 당시에 나는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복음의 관련성을 제대로 전달하려고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나는 내게 꼭 필요한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한 사람을 만났다. 비로소 나의 복음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그해 여름 오거스타로 돌아가던 중에 들었던 로마서 강해는 나 개인뿐 아니라 사실상 우리 교회의 전환점이 되었다.

나는 이 세대에 얼마나 많은 다른 목회자가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1. 진정한 부흥

처음에 나는 부흥이 켈러의 사역에서 갖는 중요성을 접하고 매우 놀랐다. 일반적으로 진지한 신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자신을 부흥 및 각성이라는 주제와 그다지 연관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켈러는 그런 전형에 속하지 않았다. 그는 일관성이 있었다. 복음은 개인을 회심시키는 것 이상일 뿐 아니라, 위로부터 쏟아지는 새로움(refreshment)으로 세상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예: 행 3:20). 따라서 진정한 부흥은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관심사가 되어야만 한다. 켈러는 그 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의 신학교 스승인 리처드 러브레이스(Richard Lovelace)는 켈러에게 영적 갱신의 민감성과 관련해서 영향을 미쳤다. 켈러는 부흥에 대비하는 교회로 만들기 위해서 애쓰는 목회자를 위한 입문서, 러브레이스의 고전인 ‘Dynamics of Spiritual Life’를 존중했다. 켈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고든콘웰(Gordon-Conwell Seminary)에서 러브레이스의 여러 강의를 수강했다. 그중에는 1972년 가을에 첫 강의를 시작하고 나중에 책으로 나온 “Dynamics of Spiritual Life” 코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과목과 함께 나는 부흥의 역사를 다루는 “Evangelical Awakenings” 코스도 수강했다. 이 과정은 내 생각과 사역 방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결정적’이라는 표현도 사실 매우 절제된 것이다. 내 사역을 알고 또 러브레이스의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다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 켈러가 사역에 관한 모든 아이디어를 얻은 곳이 바로 여기였구나!”

켈러는 한 개인에게 생명을 주는 복음의 능력에서 인간 존재 전체를 아우르는 복음의 완전한 능력에 이르기까지, 그러니까 복음에 관한 일관된 사고방식이야말로 부흥에 대한 경외심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리고 내 개인적으로 이보다 더 신성한 것은 없다.

  1. 선교적 지혜

켈러는 미움이 만연한 우리 시대에 공평하고 공손한 공개 증언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외인에 대하여는 지혜로 행하는”(골 4:5)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전도와 제자도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거기에 능했다. 어쩌면 그가 가진 합리성 때문에 일부 사람들이 그를 싫어했는지도 모른다.

몇 년 전 여기 내슈빌에서 나는 그의 훌륭한 연설을 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날의 연설은 나중에 “Post-Everything”이라는 글로 발전했다. 그날 켈러는 오늘날 비전통적인 사람들을 교회에 오게 하려고 기독교가 가진 대담한 신학적 확신을 감출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사명은 “모든 것이 지난 시대에(Post-Everythings)”를 사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부르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복음 속 풍성함을 우리부터 제대로 인식함으로 믿음을 더 현명하게 활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날 켈러는 믿지 않는 이들이 가진 우려 사항과 함께 우리가 지향하는 개혁신학이 그들을 향해 얼마나 놀라운 관련성을 가지고 선포될 수 있는지를 조목조목 나열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사람들이 중시하는 경험적 성향은 복음이 진리일 뿐 아니라, 실제적인 체험, 즉 하나님 그분을 경험하게 하는 것임을 증명하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더 주목하게 만든다. 또한 세상의 잘난 체하는 도덕주의에 대한 혐오감은 분명하고도 도전적으로 복음과 독선을 분리한 마르틴 루터의 가르침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더욱이, 사회 정의에 대한 우리 세대의 강렬한 열망은 하나님 나라를 강조하는 헤르만 리델보스와 다른 개혁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주창되었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예술에 대한 사랑과 관련해서는 총체적 세계관으로서의 기독교를 주장하는 아브라함 카이퍼라는 옹호자가 있다. 따라서 이런 선배를 발판 삼아 누구라도 삶과 문화 전반에 걸쳐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따를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의 요점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신학 자체가 오늘날 뜨거운 이슈에 대해서 얼마든지 설득력 있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그런데 왜 우리가 신학을 꼭꼭 누르며 숨 막히게 만들어야 하는가? 우리가 좀 더 겸손하고 현명한 태도를 가진다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신학 속에는 선교적 지혜가 담겨있고, 그 지혜가 우리를 기다린다. 켈러가 가르쳐준 게 바로 그 부분이다. 나는 켈러만큼 설득력 있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 이 정도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팀 켈러는 이제 우리가 잃어버린 이 세대의 첫 기독교 거물이 되었다. 이것은 냉정한 사실이다. 당신에게 그리스도의 대의를 위해 헌신할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가? 그 기간이 길든 짧든, 나는 이제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게 팀 켈러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 그렇기에 내가 삶을 마칠 때 나의 인생 전체를 요약하는 진술이 그리스도께 조금은 더 진실해질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팀 켈러, 그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복음기도신문]

원제: Ray Ortlund: I Thank God for Tim Keller

레이 오트런드 Ray Ortlund |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MA), Dallas Theological Seminary(ThM)와 University of Aberdeen, Scotland(PhD)에서 공부했으며, Renewal Ministries의 회장과 TGC의 이사로 섬기고 있다. 테네시주 네슈빌에서 Immanuel Church를 개척했으며, 저서로 ‘The Gospel: How The Church Portrays The Beauty of Christ and Marriage and the Mystery of the Gospel’이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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