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교회에서 나는 누가복음 14:26에 대한 소그룹 성경 공부를 준비하고 있었다. 성경 공부 시간은 “적용” (그러니까 “오늘 배운 말씀을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부분에 와서 절정에 이르는데, 이건 모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 본문에서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내 삶에 적용”해야 할지 난감했다.
이 본문과 씨름하는 중에 나는 비로소 “적용”이라는 측면의 한계를 보게 되었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삶을 향해서 성경 전반에 걸쳐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은 단지 사소한 변화나 약간의 조정 정도가 아니다. 누가복음 14장에 (그리고 성경 전체에) 나오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단지 “적용”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어림없다고 할 정도로 깊고 넓으며 또 실제적이다.
세 가지 흔하고 틀린 가정
다시 말하지만, 나의 관심사는, 베스 펠커 존스가 말한 것과 같이, “기독교 교리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우리 삶의 모든 면을 변화시킨다. 또한 성경은 우리가 복음이 가져다주는 많은 열매를 볼 수 있도록 돕는다.
“적용”이라는 단어에 대한 나의 주요 관심사는 바로 이것이다. 적용이라는 도구로 인해 우리가 단지 틀릴 뿐 아니라 해롭기까지 한 가정을 가지고 성경에 접근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바로 다음 세 가지 가정이다.
잘못된 가정 1: 나와 내 질문으로 시작해야 한다.
적용이라는 말 속에는 주체가 되는 사람과 그의 목적을 지원하기 위해 외부 물체를 사용한다는 가정이 담겨있다(가령, 자외선 차단제를 얼굴에 바르기 또는 생산성 기법 적용하기 등). 그러므로 “성경 적용”은 얼마든지 나와 내 삶이라는 우선순위를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그렇게 되는 순간, 성경 진리는 단지 하나의 외부 대상으로 전락한다. 우리는 종종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인식을 바탕으로 성경을 읽는다. 그리고 “성경이 나에게 의미하는 바”를 발견해서 내 삶을, 내 질문을, 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이런 가정 속에 숨은 위험은 성경 해석이라는 태양계의 중심이 내가 된다는 것이다. 성경 말씀은 오로지 나와 내 삶을 중심으로 돌아갈 뿐이다. 진리를 더 많이 삶에 “적용”할수록, 중심에 있는 내 삶은 더 큰 중력을 갖는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 적용되지 않는 말씀은 모두 기각되어 우주 쓰레기로 강등된다.
대안: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라.
내 질문과 가정을 우선순위에 둠으로 “성경의 서사를 가려버리는” 대신에, 하나님 이야기와 하나님이 세우신 이 세상이라는 현실로 시작해야 한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창 1:1)로 모든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근본적 실재이신 하나님과 함께 성경 읽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렇다고 성경을 읽으면서 내 질문 또는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가령 고통이나 두려움, 슬픔의 계절을 이기기 위해서 특정 시편을 읽거나 지혜의 습관을 기르기 위해 가족 예배 시간에 잠언을 읽는 것 등). 그렇지만 우리는 “그의 나라를 먼저 구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내 질문과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한, 인류의 “관점”에서 해결책을 찾는 “비성경적” 탐색을 피해야 한다.
하나님의 이야기, 즉 실제 일어난 사건 속에서 내 위치를 찾을 때 사실상 많은 질문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주님이 내게 주시는 응답은 욥과 베드로에게 하신 응답처럼(욥 38-41장; 요 21:22) 직접적인 대답 또는 내 문제에 대한 즉각적인 해결책이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주님의 응답은 훨씬 더 위대한 해결책, 바로 주님의 임재이다.
잘못된 가정 2: 성경은 원리원칙 모음집이다.
적용이라는 얕은 접근 방식은 사실상 검색 대상에 대한 가정을 깔고 있다. 성경을 단지 문제 해결 열쇠 꾸러미, 원칙 모음집, 또는 “발견되고 적용되길” 기다리는 “영원한 진리”로 전락시킨다. 성경 이야기, 시편, 예언서, 서신서, 묵시 문학을 읽고 우리는 “여기서 빼낼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묻는다. 차라리 엑셀 스프레드시트 형태의 성경이 우리에게 더 적합할 것이다. 일련의 진술, 규칙, 삶의 원칙, 그리고 CTRL+F 키만 누르면 세상 흐름과 주어진 상황에 따라 빠른 적용거리를 순식간에 나열해주는 스프레드시트 말이다.
품위 있는 삶에 적용할 현명한 통찰력을 찾기 위해 예수님을 찾은 부자 청년처럼(막 10:17-22), 우리도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원칙을 찾기 위해 성경을 펼친다. 때로는 직장에서 필요한 말씀 또는 자동차 범퍼에 스티커로 붙일 말씀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도 부자 청년처럼 성경 속에 담긴, 삶 전체를 휘어잡는 하나님의 놀라운 초대를 놓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대안: 성경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일하심의 이야기이다.
원칙 모음집으로 성경을 사용하면 살아서 역사하는 말씀의 능력을 무디게 할 수 있다(히 4:12). 성경에 원칙이 있는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원칙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누구시며 죄가 초래하는 해로운 영향으로부터 피조물을 구속하기 위한 그분의 사역에 관한 설명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성경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야기” 또는 “드라마”이다. 이야기에서 단지 원칙만 도출하는 것은 (원칙만 도출하고 이야기 자체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마치 원칙이 이야기라는 껍질 속에 담긴 핵심이라는 듯이) 핵심을 놓치는 결과를 초래한다. 성경 이야기의 본질은 나의 존재 전체를 통해서 이야기 속에 빠지고, 그 결과 이야기의 “저자”를 만나도록 하는 데에 있다.
잘못된 가정 3: 성경 읽기 목표는 내 삶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런 가정하에서 하는 성경 말씀 적용은 결국 나의 이익이라는 목표 추구에 하나님의 승인이라는 도장을 찍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이런 경향이 만연하면서 생긴 반사작용은 X(돈 벌기, 투표하기, 옷 입기, 육아, 사업, 심지어 다이어트 방법까지 다 X에 포함된다)를 하는 “성경적 방법”을 알려주는 (좋은 것과 나쁜 것 모두 다) 책과 설교의 범람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적용 습관”을 훈련한 나는 성경을 펴면 당장 내가 끄집어낼 수 있는 유익부터 찾는다. 예를 들어 본문에서 뽑아낼 수 있는 세 가지 요점 또는 당장 적용할 수 있는 사소한 행동 변화 등등이다.
따라서 즉각적 적용이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성경 측면, 즉 구약의 독특한 서사, 이스라엘의 의식 관습, 초대 교회의 묵시적 기대 등의 내용 앞에서 힘들어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이런 내용이 적용 가능성의 제한이라는 겉모습 때문에, 교회에서 외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피조물을 구속하기 위한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하나님이 이루신 일의 일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친구의 하루가 어땠는지 물은 후에, “잠깐만, 네 하루 이야기를 내가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하는 게 좋을지 좀 알려줄래?”라고 묻는 당신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가 지금 그러고 있다. 행여라도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가 주는 친밀함과 온전한 성장이라는 축제의 향연을 사소한 행동 변화와 내가 바라는 최적화된 삶을 위한 실용성이라는 팥죽 한 그릇으로 바꾸고 있는 건 아닐까?
대안: 성경 읽기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내 문제와 관점에서 시작하여 삶의 개선에 필요한 원칙 찾기에 골몰할 때, 우리가 놓치는 것은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더 깊이 교제하라는 성경의 초대이다. 하나님이 성경 속에 자신을 계시하신 건 내가 바라는 방식에 따라 내 삶의 특정 측면을 개선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즉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과 우리와 함께하시려는 그의 열망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정말로 삶을 “개선”하고 싶다면 바로 여기, 예수님 안에 있는 풍성한 삶(요 10:10)에서 시작해야 한다. 풍성한 삶은 내 구미에 맞게, 내 목표에 따라서, 적당하게 향상된 삶에서 나오지 않는다. 나 자신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진짜 삶을 찾아야 한다(갈 2:20). 그건 다름 아니라, 내 삶의 모든 측면을 하나님을 향하도록,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성경 읽기의 방향 전환
세 가지 잘못된 가정을 뒤집음으로써 나는 성경을 (그리고 성경의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성경 읽기의 방향을 바꾸면 더 이상 성경을 지침서로 보지 않는다. 저자를 더 알고 더 사랑하고 싶은, 일종의 좋은 자서전을 읽는 것과 비슷해진다. 성경 읽기가 단지 내 성품의 한 측면을 바꾸는 도구 또는 약간의 시간 투자 정도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성경 읽기를 통해 모든 것을(빌 2:8-10), 심지어 생명까지도(눅 14:26) 포기하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예수님은 나의 모든 것을 다 변화시키실 것이다(살전 5:23).
도로시 세이어즈의 말을 기억하자.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를 사람에게 맞추는 게 아니라 각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맞추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내 삶에 적용하는 것”과 “내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적용하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세이어즈는 분명히 후자를 선택하라고 강권할 것이다. 후자가 무엇인가? 나의 방향을 하나님께 맞추는 것, 이 세상에 대해서 들려주는 하나님의 진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 나누는 깊은 교제이다. [복음기도신문]
원제: Potential Dangers of ‘Applying Scripture to My Life’
타이 카이저 Ty Kieser | Criswell College의 신학과 부교수이다. 편집한 책으로는 Who Do You Say I Am?: On the Humanity of Jesus(Cascade, 2020)가, 그리고 곧 나올 책으로는 Theandric and Triune: John Owen and a Case for Classical and Reformed Christological Agency(T&T Clark, forthcoming)가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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