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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일 칼럼] 튀르키예의 외교정책, 어디로 가나

사진: Unsplash의Ahmet Demiroğlu

밖에서 보는 이슬람(60)

튀르키예공화국 외교정책의 특징

2023년 현재까지 튀르키예를 20년 동안 철통 통치한 현 에르도안 정권 이전까지 튀르키예 외교정책의 특징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아타튀르크에 의해 세워진 공화국의 기본 이념을 바탕으로 초지일관으로 밀고 나갔던 세속주의와 서구화’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 튀르키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면에서 자신을 스스로 유럽 국가 중 하나로 보고 있다. 튀르키예는 이런 생각을 유럽 제국에게도 각인시키면서 유럽과 동등한 구조를 가진 주요한 국가로의 자리매김을 목표로 해 왔다.

그러나, 1997년 유럽연합(EU)의 ‘룩셈부르크’ 결정은 또다시 튀르키예를 후보국에서 제외했다. 이는 200여 년 동안 모든 면에서 스스로 유럽인으로 자처해 왔던 튀르키예를 의도적으로 따돌리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해 주었다. 이후, 튀르키예의 여론은 사무엘 헌팅톤의 저서 ‘문명의 충돌’을 입증해 주는 사건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단지, 종교와 문화적 차이 때문에 튀르키예의 유럽연합 가입이 비준되지 못하고 있다는 강한 허탈감과 배반감을 느끼게 해 준 것이다.

1990년대 냉전 시대 종식으로 튀르키예는 서구 열강들의 눈에 군사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그 중요성이 점차 줄어들게 되면서 유럽으로부터 외면받게 되었다. 이로 인한 튀르키예의 외교정책은 국내 여론의 질타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유럽연합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튀르키예 국내에 증대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1999년 12월에 있었던 헬싱키 회담에서 튀르키예는 유럽연합의 회원 후보국으로 다시 승인되면서 튀르키예 여론의 유럽을 향한 질타는 대체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일련의 변화들에도 불구하고 튀르키예 외교정책의 기본 특성은 서구를 지향하는 일관된 정책으로 봐야 한다. 그러므로, 국내외의 적지 않은 우려들과 비평에도 불구하고, 에르도안 정권을 통해 계속되는 튀르키예 외교정책의 변화도 기본적으로는 이런 서구를 향한 외교정책의 틀 안에서 주변 지역과의 조화를 위한 노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서구를 향한 튀르키예의 일관적인 외교정책의 추구는 일종의 역사적 필연성을 가진 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오스만제국의 붕괴로 인해 나타났던 서구 열강을 상대로 있던 독립전쟁이나 정치적 면에서 서구 열강에 보였던 국가적 반감들도 결코 서구 열강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시스템에 대한 반대는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서구 열강에 대항했던 튀르키예의 독립전쟁 이후에 나타난 튀르키예공화국 초기 일련의 개혁은 여전히 튀르키예 자신을 스스로 서구 유럽의 한 구성원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증명해 주는 것들이었다.

한편, 튀르키예 외교정책 결정에 영향을 준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국가 안보를 언급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튀르키예공화국의 국부이자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Kemal Mustafa ATATURTK, 1881~1938.11.10) 기간과 그 이후, 튀르키예 외교정책을 당시 국제사회에 나타났던 변혁의 틀 안에서 알아보고자 한다.

튀르키예공화국의 독립전쟁 시기

무스타파 케말 파샤의 리더십 아래 서구 열강들을 상대로 시작한 독립전쟁(1919-1922)의 기본 목적은 제1차 세계대전 결과 패전국으로 전락한 오스만제국 안에서 서구 열강의 통치로부터 튀르크 민족을 구출하여 궁극적으로 유럽 모델의 독립 국가로서의 정부수립으로 본다.

당시, 무스타파 케말은 동쪽으로는 아르메니아, 서쪽으로는 그리스와의 전투를 이끄는 한편, 이 국가 서약문 속의 기본 이념들과 더불어 새로운 정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당시의 국제 정세들을 적극 활용하는 등 매우 성공적인 외교정책을 펼치게 된다.

새로운 케말 정부의 외교정책 성공 요인

여기에서 당시 케말의 새로운 정부가 이러한 성공적인 외교정책들을 만들어 낼 수 있던 데에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배경이 있었다.

첫째, 소련과의 연맹 체계 구축.

케말 정부는 당시 서구 제국에 대한 견제 조치로 소련과의 연맹 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이런 케말의 새 정부와 소련의 연맹 체계가 비록 서로 각각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을지는 몰라도 당시의 서구 제국이라는 공통의 적을 견제하는 데 매우 필요한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케말 정부의 국가 존립과 이념이 당시 소련 덕분에 전 세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당시, 서구 제국을 대상으로 외롭게 투쟁하고 있었던 케말 정부에 커다란 힘으로 작용하였다.

둘째, 이슬람적 요소의 활용.

당시, 아나톨리아 반도 안에서 펼쳐졌던 독립전쟁에서 케말 정부는 이슬람적 요소를 활용하면서 당시 서구 압제 아래에서 항거하던 주변 이슬람 국가로부터도 도움을 받아내는 일에서도 성공적인 외교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실제로, 앙카라(Ankara) 새 정부는 아프가니스탄과의 조약 체결이라든지, 시리아 및 이라크 지역에 남았던 서구 국가에 대한 이슬람 항거 세력들과의 연합전선 구축 시도 등은 당시 그 지역에 거주하던 영국과 프랑스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서구에 대해 강한 저항 의지를 보이던 케말 정부의 독립전쟁은 당시 전체 이슬람 국가 사이에서 서구 제국에 항거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보일 정도였다. 이런 일련의 변화로 인해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게 된 영국과 프랑스는 당시 그 지역에서 이슬람 봉기의 위협마저 느낄 정도로 앙카라 정부의 성공적 외교정책으로 평가될 수 있다.

셋째, 영국과 프랑스의 견제 세력으로 미국을 이용.

앙카라 정부는 당시 아나톨리아 반도에서의 독립전쟁을 수행하면서 미국이 가지고 있던 영국과의 갈등 요소들을 간파했으며, 이 지역에서 발생한 서구 열강의 이익 분배에 대한 마찰이 결국 튀르키예 쪽에 득으로 작용하도록 하였다.

이 점은 앙카라 정부가 취한 당시 고도의 외교술로 평가되며, 이 결과 이탈리아, 프랑스가 영국으로부터 격리되었고, 영국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제, 영국은 앙카라 정부와의 타협의 장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게 된 것이었다.

이와 같은 튀르키예의 독립전쟁 기간에 나타난 성공적인 외교정책은 무스타파 케말의 탁월한 지도력 아래 새로운 국가 건설이라는 일념으로 나타났다. 결국, 튀르키예공화국 수립이라는 외교적 성공을 낳게 되었다. 이런 군사 및 외교적 성공으로 케말의 앙카라 새 정부는 결국 로잔조약(1923.7.23)을 통해 공식적 국가 지위 확보와 함께 튀르키예공화국(1923.10.29)의 수립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되었다.

아타튀르크와 튀르키예공화국 시기

이제, 성공적으로 독립전쟁을 마치고, 로잔조약으로 새로운 공화국의 시작을 끌어낸 튀르키예는 이 시기에 두 가지 정책 방향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동안 수많은 국내 문제를 뒤로 미루어 왔던 새 정부는 국내 정치에 큰 비중을 두며 정책을 끌어나갔다. 또한, 새로운 ‘튀르키예공화국’은 현대 정부로서의 국가 신분을 국제무대에 적극적으로 알리려는 외교정책에도 소홀히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튀르키예로서는 이러한 양면적 적극적 정책으로 주변 국제 정세 변화에 상당한 관심이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로잔조약에서 완전하게 마무리 안 된 국가적 미제의 해결에 상당히 고심했던 시기였다. 당시 이런 국가적 미해결 문제들을 보면, 영국과 모술 지방을 둘러싼 분쟁, 프랑스와의 국가적 부채 지급, 시리아와의 국경 분쟁, 그리고, 그리스와의 민족(주민) 교환 협정과 ‘에게’해를 둘러싼 해상 문제들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튀르키예는 공화국 건립 이후부터 줄곧 독립과 영토의 통일 문제를 극도로 예민한 사안으로 다루면서 외교정책을 펼쳐왔다. 왜냐하면, 당시 튀르키예로서 가장 커다란 조바심은 바로 국가의 안보였다. 그중에서도 1923~30년 사이에 튀르키예 외교정책을 이끈 당시 정치인들은 서구 열강에 대한 불안감이 매우 고조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 기간에 튀르키예의 외교정책은 그 목적과 행해진 일들이 확고한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오스만제국 말기와의 지속성을 갖고 있었다. 이런 지속성은 오스만제국 말기의 외교정책에 영향을 준 당시 국제 정세와 새 정부가 마주친 국제 정세와의 유사성에서도 기인한다. 그러나, 과거 오스만제국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한 당시 공화국 정치인들의 같은 외교정책과도 그 관련성이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런 이유로, 이 시기의 튀르키예 외교정책은 이전 독립전쟁 시기와 같았다. 즉, 로잔조약 이후에도 서구 열강의 위협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과 연맹 체제를 지속해서 유지하면서, 1925년에 소련과 상호불가침협정을 맺게 된다. 그러나, 1923~30년 사이에 로잔조약 시 미해결 문제들이 풀리면서부터 튀르키예는 다시 서구 열강과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서구화에 대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강한 신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는 튀르키예가 문명국가로 새롭게 발돋움하기 위해서 국가의 현대화를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이를 위해 매우 혁신적인 개혁안들로 더욱 안정적인 시스템 안에서 튀르키예를 서구로 향하게 만든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이고도 변함없이 펼쳐왔던 튀르키예의 서구 지향 외교정책이 바로 이 시기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930년대의 튀르키예공화국

한편, 튀르키예공화국은 1930년대로 들어와서 비로서 서구 국가와 정상적 외교관계를 지속하게 된다. 또한, 1932년에 현 국제연합(UN)의 전신인 국제연맹에 가입하면서부터 더 적극적으로 국제 외교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튀르키예를 서구 국가에 더욱 근접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로잔조약이 남긴 미제의 해결로 한숨을 돌리는가 했던 튀르키예는 1930년대에 접어들어서면서 다시 세계 경제 공항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 사이에 있던 이 시기를 평화의 기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앞으로 일어날 새로운 세계 전쟁의 씨앗을 남긴 기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당시, 세계는 1925~29년 사이 잠깐의 화해 분위기 외에는 1929년 세계공황의 시작으로 인해서 국제적 긴장감이 급속히 고조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가져다준 각국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기를 원하는 반 수정주의자들과 이를 뒤집어엎으려는 수정주의자들로 국제 정세는 갈수록 양극화로 치닫게 되었다.

이렇듯, 유럽과 거의 전 세계가 이렇게 혼란의 시기로 접어들게 되자 튀르키예는 평화와 안보의 수호신 역할을 하며 반수정주의 외교정책을 고수하게 된다. 이 시기에 아타튀르크가 외쳤던 “국가의 평화는 세계의 평화”의 평화 지향 외교정책은 이후 튀르키예 외교정책 중 또 하나의 핵심 이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편, 1930년대로 들어서서 유럽 국가 중 이탈리아의 군비 확충 소식은 전체 유럽을 긴장 속으로 몰고 갔다. 그러나, 튀르키예는 다른 유럽 국가와 함께 이를 방비하려는 움직임에 동참하면서도 동시에, 소련과의 연맹을 계속 유지해 나가는 정책을 고수했었다. 이는 당시 튀르키예의 특이한 정책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지형학적으로 극도로 중요한 전략 요충지인 튀르키예가 유럽과 소련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강한 외교적 의지로 봐야 한다.

이런 외교적 의지의 성취는 평화를 지향하고 다방면 외교정책을 이끌었던 튀르키예 초대 대통령 케말 아타튀르크의 강한 지도력 덕분이었다. 유럽에 생성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양대 체제로부터도 환영받고, 지형학적 뿐만 아니라, 외교 정책적으로도 균형과 조화를 잃지 않았던 튀르키예는 이제 명실공히 어느 나라도 쉽게 넘보지 못하는 대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튀르키예공화국

튀르키예의 국부 아타튀르크가 죽음을 맞이할 즈음(1938), 유럽은 굉장한 소용돌이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는데,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 그것이었다. 이런 대혼란 속에서 튀르키예의 외교정책은 중립을 고수하는 것이었다. 즉, 튀르키예의 외교정책은 국제적 힘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다방면적이면서도 다각적인 외교 노력의 결과 유럽 전쟁에 휘말리지 않게 되었다.

당시, 튀르키예의 중립 외교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것 외에도 두 가지를 더 언급할 수 있다. 그 첫째는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배운 국가적 경험이 두 번째 세계 전쟁을 적극 피하도록 해 주었으며, 두 번째는 그동안 튀르키예와 연맹 체제하에 우방으로 남아 왔던 소련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이제 세계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거대한 두 국가의 탄생, 동서 독일의 분리, 그리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양극화 체제의 종결과 함께 냉전 체제로 옮아가고 있었다. 국제사회 안에서의 이런 변화들은 튀르키예가 새 질서에 적응해야 할 필요성을 갖게 했다. 이에 어울리는 외교정책 수립은 튀르키예의 자발적 대응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러한 튀르키예 외교정책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다준 요소는 무엇보다도 튀르키예 영토 안으로 진입하려는 소련의 압력이었다. 즉, 유럽이 전쟁으로 한창 정신이 없을 때 힘의 비축을 통해 새로운 강국으로 등장한 소련이 튀르키예 영토와 영해에서의 기지 건설 압력은 튀르키예 외교정책에 비상이 걸리게 되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과 튀르키예공화국

이 시기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국가는 동구 국가를 견제할 하나의 연합체 설립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의 탄생이다. 튀르키예는 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설립 시점에서부터 투르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의 틀 안에서 미국의 지원 약속을 받으면서 강력한 가입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유럽 회원국의 정치, 경제 및 문화적 감정으로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 시기의 튀르키예 국내 정치를 보면, 다당제 체제로 변화가 일어났다. 1950년 5월 14일 총선에서 민주당(DP)의 승리로 튀르키예에서 새로운 집권당으로 등장한다. 당시, 민주당은 일반적으로 전통 보수당으로 알려진 이전의 공화국민당(CHP)의 외교정책에는 어느 정도 만족하였기에 큰 변화 없이 같은 외교정책을 유지해 나갔다.

그러나, 경제정책에 있어서는 이전 당보다도 더욱 강력한 친 서방 경제정책으로 튀르키예를 유럽 사회에 더욱 강력히 연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튀르키예의 나토 회원국 가입에 더욱 강력한 의지를 보이게 된 당시 민주당(DP)에게 6·25전쟁의 발발은 튀르키예 국회의 승인도 없이 즉각적인 파병 조치를 하는 등 나토 가입 의지에 커다란 청신호로 작용하였다.

6.25 전쟁 이후 튀르키예의 나토 정회원국 가입은 미국의 태도 변화로 결국 1952년에 관철되었는데, 이는 당시와 향후 국제 정세에서 튀르키예의 역할에 대해 미국의 전략적 재인식이 결정적인 가입 성사 요인이 되었다.

튀르키예공화국의 나토 가입 성공 요인

이 외에도 튀르키예의 나토 가입이 성사된 주요한 원인을 살펴보면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시작된 튀르키예의 친 서방 정책 노력의 결실이었고, 둘째는 튀르키예의 경제발전과 군대의 현대화를 위해 필요한 외부 재원 확보의 성공이었으며, 셋째는 아타튀르크에 의해 시작된 튀르키예 현대화 운동의 열매로 평가된다. 물론, 튀르키예의 나토 가입으로 향후 튀르키예의 친서구 외교정책에 가속이 붙게 된 것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이후, 튀르키예는 서구 제도에 어울리도록 국내 정치에서의 복수 정당제 시행, 자유 경제 체제의 도입 등 커다란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런 튀르키예의 친서구 외교정책의 근본적이고도 우선적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소련의 존재로부터 돌출된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 부담이었음을 다시 한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1960년대 이후 튀르키예공화국

이후, 1960년대에 접어들게 되면서,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극 체제에서 다극화 체제로, 냉전의 분위기에서 화해의 분위기로 옮겨가기 시작하였으며 이런 국제 정세 안에서 사이프러스 섬 문제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 문제는 후에 튀르키예 외교정책에서 확고부동한 기본적 방향을 설정하는 요인이 된다.

튀르키예의 외교정책은 1990년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냉전 체제의 국제정치 틀 안에서 지탱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1989년부터 발생한 소련의 정치적 변화와 동유럽과 발칸 지역에서 발생한 일련의 변화들, 그리고, 이어지는 1991년의 소련 붕괴는 국제 시스템 안에서 튀르키예가 근본적인 변화를 필요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 안에서 동유럽 국가의 사회주의 정권 붕괴, 민주화로의 발걸음을 내던진 소련, 유고슬라비아의 해체 등으로 튀르키예의 주변은 수많은 독립 국가의 탄생을 맞이했다. 결국 이렇게 해서, 1945년부터 국제사회에서 냉전으로 이름 붙여진 동서체제는 이제 국제질서 안에서 그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냉전 시대의 종말은 수년 동안 전략적으로 소련의 위협을 제지하면서 서구 지향의 외교정책을 펼쳐 온 튀르키예로서는 새로운 시기로 들어가는 시작이 된다. 이 시기의 튀르키예 외교정책의 근간은 다각적, 능동적,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한편 냉전의 종말과 함께 찾아온 새로운 국제질서는 분명 협력과 화합이 화두였음에도 불구하고 튀르키예 국내 정세는 다시 새로운 충돌과 분쟁의 장으로 변해버린다.

[복음기도신문]

김종일 | 장신대 신대원, 국립 이스탄불대 역사학과 석사 및 박사, 前중동선교회(MET) 본부장, 現터키어권선교회(FOT) 대표. 국내 이슬람권 선교사 네트워크 회장, ‘전방개척선교(KJFM)’ 저널 편집인, 아신대(ACTS) 중동연구원 교수. 저서: ‘밖에서 본 이슬람, 무슬림 이해하기'(2022). ‘벌거벗은 세계사(경제편)’/(2023,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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