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홍 선교사(우크라이나)
282호 / 사람풍경
안산동산교회 9층의 한 사무실에 들어서자 한국어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난민이 된 고려인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김종홍 선교사가 한국으로 인도한 고려인이다. 처음엔 피난민이 된 교회 성도들을 돕기 위해서, 지금은 난민이 된 수많은 고려인을 돕기 위해 발이 부르트도록 뛰고 있었다. 그의 전화기는 수시로 울렸다. 고려인 난민들은 문제가 생기면 그를 찾기 때문이다. 고려인 난민의 피난처가 된 김 선교사의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을 때 어떤 상황이었나요?
“작년 초 전쟁 가능성이 있다며 대사관에서 철수하라는 연락이 왔어요. 당시는 철수하지 않으면 여권이 소멸된다고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몰도바로 이동하게 됐어요. 현지인들은 전쟁이 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결국 전쟁은 일어났고 모든 주민들이 피난을 떠나기 시작했어요. 이분들을 도울 방법들을 찾다가 일단은 루마니아에 있는 피난처를 연결해줬어요. 그러나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분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나 고민하면서 재정을 보내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찾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한국 전남 광주에서 고려인 마을을 섬기는 목사님을 알게됐어요. 우리 교회 성도의 여동생이 그 교회를 나가고 있었어요. 목사님에게 우리 성도들이 국경에서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문의했어요. 구체적으로는 비행기표를 구해달라는 요청이었죠. 목사님은 기도하고 모금해 보겠다고 하시더군요. 얼마 후 비행기표 15개를 구했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렇게 첫 그룹이 한국에 입국하게 됐어요. 그때가 작년 5월 초였어요.”
“난민 900명을 한국으로 데려왔어요”
– 우크라이나 난민이 우리나라에도 들어왔군요.
“이분들이 인천 공항에 들어올 때, 매스컴을 통해서 보도가 됐어요. 우크라이나에서 온 첫 단체 입국이었으니까요. 이 소식이 우크라에나에 전해지면서, 그곳에 있는 고려인 난민들이 자신들도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연락을 보내오더군요. 다시 광주 목사님과 통화를 했죠. 감사하게도 목사님이 끝까지 해보자고 하시더군요. 처음에는 우리 교인들만 데려오려고 했었는데, 추가적으로 고려인 명단을 계속 받게 됐어요. 비행기표가 구해지는 만큼 현지로 보냈어요. 작년 내내 이 일을 했어요. 표를 받고 들어온 사람들이 900여 명 정도 됩니다. 9억 원 정도 들었죠.”
– 어마어마한 섬김이었네요. 한국에 도착한 난민들은 어떻게 됐나요?
“초창기에 들어온 분들은 한국에 친인척들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왔어요. 이분들은 주로 광주로 내려갔어요. 그러나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광주가 포화상태가 됐죠. 또 한국에 연고가 없는 사람들도 많아지면서 제가 있는 안산에 정착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교회 주변에 집을 얻어주기 시작했어요. 이것도 한 가정 때문에 시작하게 된 것이었어요.”
– 한 가정이 이렇게 늘어나게 됐군요.
“할머니 한 분이 당뇨 때문에 발가락을 절단하는 일이 있었어요. 피난 중에 약을 못 구해서 몰도바 병원에서 발가락을 절단했는데, 한국으로 모시고 왔을 때 많이 아파하셨어요. 치료가 제대로 안된 상황이어서 이대로 놔뒀다가는 다리마저 잃을 것 같았죠. 자가격리하는 동안 집을 구하고 병원에 입원시켰어요. 이분들은 한국에 들어오고 6개월 동안은 의료보험 적용이 안돼요. 수술하고 나니까 비용이 1000만 원이 나왔어요. 이걸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한 단체를 연결해주셨어요. 한 교회에서 운영하는 푸른나눔이라는 단체였어요. 푸른나눔에 이분들의 상황을 나눴더니 한 가정, 한 가정을 지원해주셨어요. 그러다 푸른나눔이 전담해서 고려인 난민들의 거주, 생계를 지원해주셨어요. 그 외에 필요한 살림살이들은 각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수건이라도 모아서 챙기고, 필요한 것들은 구입해서 집을 꾸며줬어요.”
– 한 인생이나 가정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섬김인데, 어떻게 이런 일을 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들을 이렇게 도울 수 있게 된 계기가 있어요. 우리 교회 성도 몇 가정이 독일 난민이 되면서 독일이 난민 정책을 어떻게 펼치는지 보게 됐어요. 독일은 난민에게 집을 주고 생계비를 주더군요. 또 의료비도 공짜죠. 대신 8~9개월 동안 언어를 배워야 해요. 좋은 노동력이 들어왔으니 장기적인 투자를 한 셈인 거죠. 독일의 시스템이 좋아 보였어요. 우리나라는 난민에 대한 이런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나라에서 못하는 걸 내가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3개월 정착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그렇게 집을 구해주고, 3개월 동안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것이죠. 그리고 이곳에 온 사람들 모두에게 3개월 동안 한글을 배우게 했어요. 한국에 와서 일을 하고, 버스를 타고 물건을 사려고 해도 한글을 알아야 하니까요. 그렇게 언어 코스를 만들었어요.”
– 좋은 구상이지만, 혼자 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 같은데요?
“구호품은 교회가 나눠주도록 교회로 전달했어요. 이 근처에 고려인 교회가 여럿 있어요. 난민들을 교회로 다 보내서 필요한 물품도 받게 하고, 영혼들 케어를 교회가 하도록 했죠. 제가 교회까지 개척해서 섬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어요. 난민들은 강제로 교회를 가게 된 거지만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3개월 정착 프로젝트를 하면서 부닥친 현실이 하나 있어요. 어른들은 그런대로 정착이 돼가고 있는데 아이들이 문제였어요.”
“국가가 못하면 교회가 돕자!”
– 어떤 문제가 있는 거죠?
“유아들은 어린이집에 보내줄 수가 있었는데, 초등학생들은 아이들 관련 서류를 준비할 수 없어 학교에 들어가기가 어려웠어요. 그러나 학교와 이야기하면서 감사하게도 전쟁 상황인 것이 고려가 되면서 학교에 갈 수 있게 됐죠.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청소년들이었어요. 이 아이들은 집에서 게임하면서 집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 거예요. 말이 안 통하니까 어디 갈 수도 없고요. 이 아이들을 어떻게 집에서 나오게 할까 고민하다가 한 장소를 마련하고 아이들을 오라고 했어요. 공부하러 오라고 하면 오지 않으니까 일단 와서 놀고 먹으라고 했죠. 아이들은 반강제적으로 부모님 손에 이끌려 왔어요. 아이들을 계속 먹이고 2주에 한 번은 놀이공원이나 좋은 곳들을 찾아갔어요. 몸도 마음도 즐겁게 해주면서 한글도 가르쳐줬더니 아이들이 이곳을 아지트삼아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놀더군요. 아이들도 많이 밝아지고요.”
– 난민들을 섬긴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군요.
“청소년 중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나이도 있었어요. 대학을 못 갈 바에 한국에서 기술이라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곳에 온 난민 중에는 우크라이나에서 헤어샵, 네일샵, 카페 등을 하다 오신 분들이 있어요. 이곳에서 디저트 카페를 하게 되면 그 수입으로 생활도 할 수 있고 청소년들이 기술도 배워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기도하면서 경제 공동체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곳에 온 난민들은 한국 법을 잘 모르고, 어떻게 사업해야 할지 모르니까 경제 공동체를 통해 청소년들을 고용하고, 이후에 여러 가게들을 열고요. 사실 이 어머니들은 남편들이 동원령 때문에 나오지 못해 아이들만 데리고 나와 생계를 책임져야 해요. 이렇게 섬기면서 무연고, 무국적, 무적응 청소년, 한 부모 가정들 같은 취약계층들을 돕는 ‘무한도전 프로젝트’를 만들게 됐어요. 무모한 도전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무한한 도전인 것이죠.”
무국적 난민들에게 여행증명서 발급 도와줘
–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씩 난민 지원 시스템을 갖춰가게 됐군요.
“처음에는 필요에 의해 시작하게 된 일이었는데 하다 보니 지금까지 왔네요. 주님의 인도하심이죠. 독일 난민으로 갔던 할머니 성도님은 무국적자였어요. 교인들 중에는 무국적자가 몇 명 있었어요. 구소련 시절에는 구소련권 나라들을 쉽게 왕래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고려인들이 우크라이나로 이주했어요. 이곳은 땅이 좋거든요. 고려인들은 농사를 매우 잘하는 민족이고요. 그런데 소련이 붕괴되면서 이분들이 우크라이나에 남게 됐고, 그때 서류 정리를 하지 못하면서 국적이 없어진 것이죠. 그런 사람들이 2000년도 초반까지 3000명 정도 있었기 때문에 국적 회복을 위한 일들이 진행이 됐지만 몇 백 명 정도는 국적 회복이 되지 않은 상태였어요. 이런 사람들은 여권이 없기 때문에 피난을 도울 방법이 전혀 없었죠. 기도하다가 외무부와 법무부에 이 문제를 알리고 이슈화가 되면서 고려인이라는 게 확인되면 여행증명서를 만들어주게 됐어요. 그런 방법으로 무국적자들이 한국에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죠.”
– 영화 같은 흥미진진한 스토리인데요. 뒤늦은 질문이지만 주님은 어떻게 만나게 되셨나요?
“모태신앙으로 순탄한 인생을 살았어요. 청년시절 선교사로 헌신을 하고 선교 훈련을 받고 에티오피아로 단기선교를 나갔어요. 나름 선교훈련을 받고 선교사로 헌신해서 나갔는데 어려운 일만 닥치면 정체성이 흔들렸어요. 이게 뭘까 생각했죠. 이후 2002년에 결혼을 하고 아내와 신앙 훈련을 받고 있다가 복음학교에 참석하게 됐어요. 저는 그동안 선교사로 헌신도 하고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저의 죄 앞에 직면한 건 처음이었어요. 저의 죄덩어리 모습을 보면서 고꾸라졌고 거기서 통곡하면서 주님이 이루신 십자가의 복음이 무엇인지 알고 믿게 됐어요. 이후 장기 선교 사역을 준비하다 2005년에 우즈벡으로 가기로 결정됐어요.”
– 그렇게해서 우즈벡으로 가시게됐군요.
“2006년도에 우즈벡으로 파송받아 선교지에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사실은 먼저는 투르크메니스탄으로 가기로 했지만, 들어갈 수 없게 되면서 우즈벡으로 가게 된 것이죠. 우즈벡으로 나갈 때는 평신도 전문인 사역자로 나갔어요. 당시 이슬람권에는 목회자 신분으로 갈 수 없는 곳이 많았고, 평신도 신분으로 갈 수 있는 곳을 찾다보니까 투르크메니스탄이 있더군요. 그렇게 선교단체를 통해 팀으로 들어가려다가 막혀서 우즈벡으로 가게 된 것이죠. 그곳에서 한국 기업과 연결해 여러 사업을 진행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추방으로 끝이 났어요. 독재국가인데다 감시가 워낙 심했어요.”
– 우즈벡에서의 시간들이 궁금합니다.
“처음 구호단체로 비자를 받아 들어갔다가 6개월 만에 그곳을 떠나야 했어요. 이후 키르기스스탄으로 옮겨 언어 공부를 하고 있다가 다시 2007년에 우즈벡으로 들어가게 됐어요. 이 때는 비즈니스 비자를 받아서 들어가게 됐죠. 우리 팀은 다양한 비즈니스를 했는데, 저는 1차 산업 관련 사업을 하게 됐죠.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 사업은 마피아가 하는 일이더군요. 저는 모르고 시작했는데, 완전히 사기를 당하고 막대한 재정을 날리게 되면서 아주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 너무 어려운 시간을 보내셨을 것 같은데요?
“거의 죽을 뻔 했습니다. 인생 밑바닥까지 내려갔어요. 비즈니스미션은 내가 해야 될 사역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에서도 비즈니스가 쉽지 않은데, 부패한 나라에서 사업을 한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어요. 서류 하나를 받기 위해서도 뇌물이 아니면 불가능했어요. 이런 것에 대한 갈등도 컸죠. 우즈벡으로 파송받고 8년 정도 지내면서 저의 팔, 다리가 꺾이는 시간이었다고 해야 될까요? 30대 혈기 왕성한 나이에 그때는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자신감도 충만했어요. 그런데 완전히 죽음을 맛봤어요.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 받았는데, 사기를 맞고 돈을 하나도 못 건지고 나왔어요.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모든 관공서를 다 다녔어요. 밤낮으로 쫓아다녔지만, 해결이 안 되고 마음에 큰 압박이 왔어요. 삶을 내려놓아야 되나?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게다가 아내가 많이 아팠어요. 우즈벡에서는 계속 감시를 당해야 했고, 모든 것이 자유롭지 못했어요. 결국 스트레스가 병이 됐죠. 몸도 망가지고, 정신도 망가지고, 이전에 있던 믿음마저 없어지고 처절하게 넘어졌어요. 그러다 2013년에 아내의 치료차 한국으로 오게 됐어요.”
– 한국에서 치료도 쉽지 않은 시간이었겠어요.
“우리는 거의 패잔병이었어요. 아내는 공황장애, 우울증이 심하게 왔어요. 하루 종일 물 한 모금도 먹기 힘들 정도로 공황발작이 계속 있었어요. 아내는 감사하게도 기도로 싸우겠다고 하더군요. 받아온 약도 쓰레기통에 넣었죠. 약을 먹는 것 자체가 나쁜 건 아니지만, 한번 기도로 싸워보자는 마음이었어요. 공황장애에 대해 공부를 하고, 왜 이렇게 됐나 알아보기도 했어요. 공황장애 치료법 중 인지행동치료가 있더군요. 공부해서 하나씩 해보면서 고비를 넘어갔어요. 발작이 올 때마다 기도했어요. 그러다 발작이 사라지면 또 움직였죠. 발작을 일으키는 시간 간격이 점점 길어지더군요. 용기를 내서 마트에 가봤어요. 그러다 발작이 오면 그 자리에서 빨리 의자를 찾아 앉아서 사람들이 보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기도했어요. 회복이 되면 다시 일어나서 움직였죠. 이것을 반복하면서 마트를 정복하게 됐어요. 다음은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면서 발작이 오면 내려서 기도하고, 괜찮아지면 다시 지하철을 타고 움직였어요. 조금씩 해결되니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그러면서 조금 더 오래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사람이 많은 곳도 정복해갔어요. 이렇게 1년 정도 지나면서 아내는 몰라보게 회복이 됐어요.”
– 너무 감사한 일이네요. 고생이 많으셨어요.
“아내가 처음 한국으로 치료받으러 왔을 때는 선교지에 다시 못 가겠다고 했어요. 그럴만도 했죠. 그러나 주님이 부르신 곳이었기에 다시 나가게 될 걸 믿고 기다렸어요. 아내가 몸이 회복되고 나더니 다시 갈 수 있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비자를 신청해 선교지에 돌아갈 준비를 했는데, 비자가 거절됐어요. 하나님이 우리가 힘드니까 다른 곳으로 옮기시려나 생각하게 됐어요. 좀 더 열려있는 장소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 사역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컸어요. 워낙 그곳이 메마른 땅이었어요.”
– 그렇게 가신 곳이 우크라이나였군요?
“2014년에 우크라이나 오데사로 가게 됐어요. 우크라이나는 모든 것이 너무 자유롭더군요. 감시도 도청도 없고 복음 전한다고 잡아가지 않는 거예요. 우즈벡에 체류할 때는 공항에서 항상 쫒겨나지는 않을까 조마조마 하면서 살고, 경찰을 볼 때마다 위축됐죠. 그런데 여기는 자유로운 거예요. 그곳에서 6개월 만에 교회가 개척됐어요. 그동안 갈급했던 게 폭발한 것 같아요. 전도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모임이 만들어졌고, 그것이 교회가 됐어요. 오데사 지역은 친러 지역이었기 때문에 언어는 우즈벡에서와 마찬가지로 러시아를 사용했기 때문에 영혼들을 섬기는 데 어려움은 없었어요. 사역이 행복하고 좋았어요. 한 영혼 구원할 때마다 기뻤고, 그래서 재밌게 사역을 했어요. 그러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이죠.”
–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주세요.
“한국에 들어와 있는 고려인들이 3000명 정도 돼요. 이런 일이 우연히 일어났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이미 20년 전부터 세워진 고려인 교회가 전국에 80여 개가 있어요. 이 고려인 교회들이 연합해서 젊은 사람들을 선교사로 키우면 꼭 자기 땅이 아니라도 러시아어만 되면 갈 수 있는 나라가 많아요. 이 일을 위해 고려인 목사님들을 동원하는 중이에요. 한국에 들어와 교회를 하고 계시는 목사님들의 대부분은 한국 선교사 1세대들이 가서 전한 복음을 들은 분들이죠. ‘이제 이 은혜를 갚아야 될 때가 아니냐. 여러분의 교회에서 젊은이들을 다시 보내라. 내가 선교사로 당신들에게 갔던 것처럼 이제 당신들이 보내라.’ 쉽지 않지만 이렇게 계속 동원하는 거죠. 한국 선교사가 파송돼서 러시아를 배우고, 현지 적응하는 일들이 10년 정도 걸리는데, 한국교회가 이렇게 지원하기도 점점 어렵지 않을까 생각이 돼요. 고려인들에게 복음만 심어주면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 끝으로 기도제목 말씀해주세요.
“안산에 카페, 네일샵, 헤어샵 등을 운영하며 함께 생활하는 경제 공동체를 준비하고 있어요. 또 선교 공동체도 준비하고 있어요. 공동 생활을 하면서 교육을 시키고 신앙으로 훈련시켜서 선교지로 내보내는 공동체죠. 마침 우리나라 농촌에는 인력이 많이 필요한데, 고려인들은 농사가 탁월해요. 농업으로 자급자족하고, 신학교, 선교사 훈련을 시킬 수 있는 선교 공동체 마을을 놓고 기도 중이에요. 적당한 땅과 장소를 구하고 있는데, 주님이 인도해주시도록 기도해주세요. 개인적으로는 한번 꺾여봤기 때문에 내 힘으로 안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어요. 하나님 인도해 주셔서 기도하고 나가지만, 나도 모르게 내 힘으로 할 수도 있기 때문에, 매순간 깨어서 주님 뜻 아니면 멈출 수 있도록, 때를 기다리고 순종하는 삶 살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복음기도신문]
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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