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늘 ‘천국갈 준비가 되었냐고 질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지난 14일 향년 84세를 일기로 소천한 오엠국제선교회(Operation Mobilization, OM)의 창립자인 조지 버워(George Verwer) 선교사의 삶을 크리스채너티투데이가 최근 추모하며 소개했다.
18세의 조지버워는 테네시 주 메리빌에 있는 기숙사 방에서 친구와 기도를 마쳤을 때, 친구에게 질문했다. “갈 준비가 됐나?” 데일 로톤은 깜짝 놀랐다.
조지 버워는 소유한 것을 팔아 그해 여름에 트럭을 사서 스페인어로 번역된 요한복음을 싣고 멕시코로 향했다. 그곳 사람들의 70%가 성경을 접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지 버워는 왜 그래야 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OM의 미래 창립자인 그는 영적인 필요를 보고 있었다. 그들은 그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로톤은 “조지 버워의 인생에서 그를 사로잡은 열정 중 하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오랜 친구가 될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는 “버워는 모든 위험을 감수할 때만 진정으로 안전함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선교에 대한 평생의 “열정”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감동시켜 국경과 문화와 대륙을 넘어 하나님의 사랑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게 했다.
OM은 20세기의 가장 큰 선교 단체 중 하나가 되어 매년 수천 명의 장단기 선교사를 파송했다. OM은 147개국을 섬기고 있으며, 현재 134개국에 3300명의 선교사가 있다.
40년 동안 국제복음주의학생회를 이끌었던 린제이 브라운은 그를 탁월한 선교 지도자로 기억했다.
그는 “순수한 활동과 그로 인해 세워진 기관 및 지도자들을 볼 때, OM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생각한다”며 “나는 조지 버워가 지난 60년 동안 탁월한 북미 선교 정치가라고 생각한다. 그는 놀라운 사역을 해왔다.”고 말했다.
버워는 1938년 7월 3일 엘레노어 캐델 베르베르와 전기 기술자로 일했던 네덜란드 이민자 조지 버워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뉴욕 시 외곽의 뉴저지 와이코프에서 자랐다.
가족은 미국 개혁 교회 회중에 속해 있었지만 조지 버워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젊은이들에게 교회는 거의 사교 클럽처럼 보였다.
어릴 때 버워는 운동 선수이자 보이 스카우트였지만 소녀를 쫓고 말썽을 피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지금 기준에 따르면 그 대부분은 “헛소리”로 여겨졌지만, 버워는 버겐 카운티의 일부 숲에서 불을 지르기도 했으며 어린 십대 때 누군가의 집에 침입하여 경찰에 잡히기도 했다.
버워를 위한 중보기도 이후 빌리 그래함 집회 참석
이 사건에 대한 소식을 듣고 도로시아 클랩이라는 지역 기독교 여성은 버워가 예수에 대한 믿음을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하기 시작했다.
클랩은 또한 버워에게 요한복음을 우편으로 보냈다. 이 책은 즉시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3년 후 그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빌리 그래함의 집회에 참석해야 한다는 마음을 강하게 느꼈다. 그와 몇몇 친구들은 1955년 3월 5일 빌리 그래함의 설교를 듣기 위해 버스를 타고 30마일을 갔다.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맡기라는 초대에 버워는 앞으로 나갔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며 그를 사용하실 수 있다는 메시지에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나는 하나님이 내 기질을 억누르거나 내가 비참한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사랑하시고 성령을 통해 일하셔서 나를 쓰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뉴저지로 돌아온 그는 즉시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알리는 일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고등학교에서 요한복음 1000권을 배포하고 복음 십자군을 조직했다.
당시 지역 신문 보도에 따르면 1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헌신하기 위해 나섰고 그 중에는 버워가 많은 관심을 보인 자신의 아버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젊은 버워는 그 당시에 감사하지 않았지만 그가 기독교인을 조직하고 동원하는 데 재능이 있음은 분명했다.
그는 자신의 전도 행사에서 다섯 명의 고등학생에게 간증을 나누고 설교하도록 했다.
몇 년 후 대학에서 버워는 자신만 물건을 팔아 멕시코 선교 여행 자금을 조달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두 친구인 로톤과 월터 보르하르트에게도 같은 일을 하도록 설득했다.
그러다 그는 더 많은 공부의 필요성을 느껴 시카고에 있는 무디신학대학교로 옮겼다.
그곳에서 그는 선교 사역을 완전히 포기할 생각을 했다. 그때 복음주의 목사인 오스왈드 J. 스미스가 예배당에서 설교하는 것을 듣게 됐다. 스미스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있고 그리스도께 온전히 헌신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버워는 자신의 죄인됨을 깨달았다. 그는 예배당 앞으로 뛰어나가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었음을 회개했다.
그는 “내가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모든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이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고백했다.
나중에 그는 젊은이들에게 선교지로 갈 것을 촉구했으며, 그때마다 자신이 선교에 대해 주저했던 모습을 나누면서 하나님의 끈기를 강조했다.
그는 “하나님이 나를 보셨습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버워는 1958년 두 번째 멕시코 선교 여행을 계획했다. 또 1960년 아내 드레나 크네히트를 만나 결혼했을 때도 신혼 여행을 멕시코 선교 여행으로 떠났다.
이들 부부는 복음에 헌신적이었다. 버워는 남쪽으로 차를 몰고 가는 길에 그들의 웨딩 케이크를 휘발유 한 통과 바꿀 정도로 오직 선교만을 위해 살았다.
버워는 멕시코에서 6개월을 보낸 후 스페인으로 이주했다. 스페인은 당시 개신교 목사들을 쫓아내고 모든 공적 예배 활동과 발표를 금지하고 개신교 성경을 압수한 파시스트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통치하던 때였다.
그러나 버워가 배부할 성경으로 가득 찬 차를 몰고 소련으로 운전하고 가면서 문제가 생겼다. 그는 당국에 의해 제지당했고, 추방됐다.
버워는 오스트리아로 추방돼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기도하면서 자신이 그다지 좋은 선교사는 아니지만 사람들을 동원하는 데는 능숙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럽 관광객들이 소련으로 가는 버스에 짐을 싣는 것을 보았고 그가 해야 할 일은 다른 사람들을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듬해, ‘빛을 보내라(Send the Light)’는 사역을 통해 공산주의 통제 국가로 약 2000개의 단기 선교팀을 조직했다. 그들은 1963년에 이슬람 국가로 확장했고 그 후 인도에 선교사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복음 서적을 가득 실은 트럭을 몰고 동유럽과 인도로 진출한 영국 젊은이 중 한 명인 피터 댄스는 그 일이 무섭고 짜릿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예수 외에는 더 이상 나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며 “국경을 넘기 전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있었다. 내가 그녀를 필요로 하면 어머니도 거기 계셨다. 나는 인도에 여러 번 갔고, 좌절과 어려움을 통해 주님은 항상 찾아오셨다.”고 말했다.
크리스채너티투데이는 이들 새로운 선교사들을 “모험에 열려 있는 반문화적인 젊은이들”, 즉 “포괄적이고 복음주의적이며 순회하는” “복음 순례자”라고 묘사했다.
그들 중 25명은 버워가 출판하여 미국과 유럽 전역의 교회, 청소년 그룹 및 기독교 서점에 배포한 선언문을 작성했다.
선언문은 “주 예수 그리스도는 혁명가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혁명가입니다! … 그의 명령에 대한 절대적이고 문자적인 순종의 영역 안에는 세계를 복음화하는 능력이 있습니다.”라는 내용을 담았다.
버워는 그리스도에 대한 총체적이고 급진적인 헌신에 대한 요청과 단기 선교의 개념을 결합하여 봉사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고 사람들이 쉽게 시작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비록 그들이 수년간의 헌신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거나 신학을 하지 않았거나, 그들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었더라도 하나님께서 기쁘게 순종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결국 하나님은 혼란을 구속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일하실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 일하신다.
잘 정리된 이론과 방법을 가진 선교 “전문가”에 대해 항상 비판적이었던 버워는 결국 그의 접근 방식을 “메시올로지”라고 불렀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엉망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어떤 실수는 영적으로 파괴적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나는 삶이 순탄치 않은 사람들을 만난다”며 “그들은 플랜 A나 플랜 B가 아니라 플랜 M에 가깝다. 그들과 이야기할 때 나는 그들에게 큰 알파벳을 상기시키고 급진적인 은혜를 받아들이고 계속 나아가도록 촉구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복음을 선포하는 올바른 방법은 없다고 주장했다. 선교 정신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효과가 있었던 것을 실험하고, 맥락화하고, 지속적으로 재평가해야 했다.
그는 “하나님이 다양한 방법으로 일하신다는 2000년의 증거가 있지 않은가?”라며 “여러 그룹의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이 다른 방식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가? 하나님의 일은 어떤 교제나 조직보다 크다.”고 했다.
버워는 때때로 OM의 모델을 빠르게 실험하고 변경해야 했다.
1968년 그가 인도에서 추방됐을 때 OM은 지도부를 인도인들에게 넘기기로 결정하고 수천 개의 교회를 개척하는 별도의 조직인 인도 동원 작전(Operation Mobilization India)을 설립했다.
1970년 이상한 결정 ‘선박 구입’
다른 때에는 버워는 전혀 필요하지 않은 믿음의 도약을 했다. 1970년에 선교단체는 배를 구입했다.
공식 OM 역사에 따르면 배를 구입한다는 생각은 “이상한” 것이었고 조직의 어느 누구도 그 구입 방법을 알지 못했다. 배를 타고 전 세계 항구로 항해하여 기독교 서적을 나누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전파하는 것이었다.
OM은 우마낙(Umanak)이라는 이름의 네덜란드 선박을 구입해 로고스(Logos)라는 이름을 다시 붙였다. 이 배는 23만 해리를 항해하여 250개의 다른 항구로 이동, 650만 명의 사람들을 섬겼다.
OM 지도부는 1977년에 두 번째 배를 구입했다. 로고스 호가 1988년 12만 5000 달러 상당의 기독교 서적과 함께 난파됐기 때문이다.
버워를 더욱 화나게 한 것은 전 세계에서 여러 명의 OM 선교사들이 자동차 사고로 다치거나 사망했다는 것이다. 때때로 그들은 지방 당국과 문제가 생겼다.
뿐만아니라 버워는 죄와 의심과 씨름했다. 그러나 결국 예수님에 대한 그의 사랑과 전 세계 사람들에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전하려는 그의 열정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했다.
이후 시카고 목사가 된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은 버워가 요한복음 3장 16절에 묘사된 신성한 사랑을 구현했다고 말했다.
마크 소더퀴스트(Mark Soderquist)는 “인간에 관한 한 버워만큼 온 세상을 사랑하고 그들이 예수님과 관계를 맺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마크는 “버워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며 “사랑보다 더 성경적인 가르침은 없으며, 사랑 외에는 성경적인 가르침이 없다. 겸손하지 않으면 정통이 아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성경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다.
버워는 2003년 OM의 국제 이사직에서 물러나 피터 메이든(Peter Maiden)에게 리더십을 넘겼다. 그러나 그는 전 세계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계속해서 말씀을 전했다.
그는 거대한 지구본을 꺼내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지구본 재킷을 입고 그들에게 18살 때 대학 친구에게 했던 질문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물었다.
“갈 준비가 되었는가?”
버워는 “해외에서 2년을 보낸다면 돌아온 후에는 예전과 같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기도에 응답하시는지, 성령께서 어떻게 삶을 변화시키는지 알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전 세계에서 하시는 일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버워는 아내 드레나(Drena)와 세 자녀 벤, 다니엘, 크리스타가 있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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