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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하나님의 사랑(4): 타락한 하나님의 사랑

사진: Matt Houghton on unsplassh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느니라(사 45:7)

성읍에서 나팔이 울리는데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암 3:6)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의 개념을 악과 고통, 재난으로 가득한 타락한 세상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학술적인 용어로, 이 난처한 문제는 신의론(악의 존재가 신의 속성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설-역주)이라고 알려져 있다.

침묵은 틀린 답이다

많은 설교자들에게 이 질문은 그저 너무 어려울 뿐이다. 그들에게 이것을 다루는 방법은 그것을 다루지 않는 것이다 – 마치 그들의 침묵이 이 질문을 사라지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딜레마에 대답하기를 거부하는 교회 지도자들은, 신도들을 신의론의 어려움으로부터 보호하지 않는 것과 같다. 오히려 그들은 교회 신도들 – 특히 어린 신자들을 – 결국 다윈의 진화론과 과격한 무신론으로 몰아넣게 된다.

요즈음 고등학교와 대학의 교육은 반기독교적인 의제로 가득하다. 그리고 학구적인 불신앙은 신의론의 고민을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 그것은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한 결정적 증거다. 그들은 하나님을 비난하며 공격하기 위해 신의론을 기쁘게 사용할 것이다. 현대 무신론의 일약 스타인 리처드 도킨스는 하나님에 대한 증오를 토해내는 데 이 신의론을 사용한다(그것이 마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구약의 하나님은 모든 소설 중에 아마 틀림없이 가장 불쾌한 인물일 것이다: 질투하고 그것을 자랑스러워하며 마음이 좁고, 불의하며, 용서하지 않으면서 만사를 자기 뜻대로 하고 싶어하며 복수심이 강하고, 잔인한 인종 청소자이며, 여성 혐오, 동성애 혐오, 인종 차별주의자이며, 유아 살해, 집단 학살, 자식 살해에, 역병을 발생시키고, 과대망상에, 가학 피학성 성욕에, 변덕스럽게 심술궂은 불량배다.’(도킨스)

필자는 많은 젊은 자칭 신자들이 도킨스와 같은 주장의 먹이로 전락하는 것을 보아 왔다. 어려운 신학적 질문들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려는 목회자들의 노력은 단지 그들을 세상의 쉬운 먹이로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성경적 갈등을 피하는 것은 그저 다른 무언가가 채울 공간만 남겨놓는다.

열린 유신론은 틀린 답이다

무신론자들이 신의론의 문제를 하나님의 성품을 비난하는데 사용하는 반면, 나쁜 신학자들은 그분의 성품을 바꾸는데 사용해왔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다른 속성들이 충돌하는 것을 볼 때마다, 문제가 되는 속성은 내던져지거나 바뀌었다.

열린 유신론이 그 예이다. 이것은 신의론을 다루기 위한 비교적 새로운 신학적 “혁신”이다. 열린 유신론자들은 사랑의 하나님과 미래를 아시는 하나님 사이의 양립을 보지 못한다 – 특히 그 미래에 비극과 재난이 포함되어 있을 때는 말이다. Greg Boyd 같은 열린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이러한 일들에 놀라신다고 주장한다 – 그분은 그런 일들이 오는 것을 보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이런 열린 관점에 따르면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일들은 하나님이 계획하지 않으셨거나 심지어 확실하게 미리 알지 않으셨다는 것이다(비록 그 일들의 가능성은 아신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열린 관점에서는 사건들이 모든 것에 앞서는 신성한 목적없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관점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분의 신성한 목적을 반영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열린 관점이 정말 하나님을 나쁜 일들이 벌어진다는 곤경에서 면하게 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신의론의 수수께끼를 푸는가? 아니고 아니다. Boyd는 미래 임의의 재난에 의해 압도될 수 있는, 축소된 형태의 사랑을 제공하는 하나의 신을 남긴 것이다. 열린 유신론은 한 분 참 하나님 – 머리털까지 세시고(마 10:30), 별들을 이름대로 부르시며(시 147:4), 우리가 입 밖으로 내기도 전에 모든 말을 아시는(시 139:1-4)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적인 왜곡에 지나지 않는다.

무기력은 틀린 답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열린 유신론이 부정하는 것은 그분의 최고 권세에 부정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지 못하신다면, 그분은 또한 그것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힘이 없으시다. 그리고 이것이 왜 재난 사건들이 벌어지는가에 대한 Tony Campolo의 주요 논점이다.

Campolo – 목사, 대통령 자문위원, 공언하는 복음주의자 – 는 하나님께서 무시무시한 재앙들에 주권을 가지신다는 생각을 좋아하지 않는다. 카트리나 허리케인의 여파로, Campolo는 그가 하나님의 다른 속성들을 잠식시킴으로써 그분의 사랑하시는 본성을 방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행히도 안 좋은 답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대답 중의 하나는 어쨌든 모든 고통이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의 일부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이러한 진술들은 무신론의 철학자들이 지금까지 일으킨 모든 논쟁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홍수가 걸프만을 휩쓸었을 때, 하나님은 가장 먼저 슬퍼한 분이셨다… 분명히 하나님은 죄 없는 사람들, 대부분은 – 카트리나의 희생자들에게 고통을 창조하지 않으신다. 아마도 우리는 하나님은 사실 우리가 말해왔던 것처럼 강력하지 않으시다고 논쟁하는 랍비 Harold Kushner 같은 사람들의 주장을 듣는 것이 온당할 지 모른다. 구약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말하지 않는다.’

Tony Campolo는 “전능한”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한에서만 맞았다. 하지만 “삼위일체”라는 단어도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전능(모든 능력을 가지는 특성)은 성경이 광범위하게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그분의 속성이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

실제로 주 예수님은 성경이 반복적으로 인정하는 것에 대해 증언하셨다.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 19:26)

반대로, 눅 1:37에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했다.

전능한 하나님에 대해 논쟁함으로써, Campolo는 결국 사랑이 무력한 하나님, 즉 카트리나와 같은 악한 재난과 상대가 안 되는 하나님을 옹호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주권적인 성경의 하나님은 스스로에 대해 진리를 말씀하셨다.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암 3:6)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느니라(사 45:7)

실제로, Greg Boyd와 Tony Campolo 같은 사람들은 신학자들로 가장하는 우상숭배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들 스스로 그들의 신학이 실제로 얼마만큼의 편안함을 제공하는지에 대해 잠깐 고려해보기라도 했는지 궁금할 것이다.

생각해 보라. 무엇이 당신이 밤에 더 잠을 잘 자도록 돕는가? 암 진단에 놀라며 허리케인을 막을 수 없는 무능력에 슬퍼하며 선거에 행운을 비는 하나님인가. 아니면 모든 사건 – 좋든 나쁘든 – 을 그분의 사람들의 궁극적 선과 그분의 영광의 촉진을 위해 지휘하고 계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인가(롬8:28; 11:33-36).

복종이 맞는 답이다

틀린 답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어려운 문제들에 관한 한 아무런 쓸모가 없다. John MacArthur는, 대신에 우리는 하나님과 모든 삶의 상황들에 대한 그분의 섭리적 일하심을 신뢰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일어나는 모든 행운이나 재난의 의미나 목적에 대해 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종종 불의한 자들이 번성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는 것처럼 보인다.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라(욥 12:6)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래의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이 무성함과 같으나(시 37:35)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시 73:12)

따라서 종종 하늘의 축복이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잠깐이라도 번영이 하나님의 승인의 증거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길을 잃기 쉽다. 반대로, 의인은 자주 고통받는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고통을 선을 이루는 데 사용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다시 말하면, 선하게 보였던 그것들이 완고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악으로 끝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소유인 자녀들에게는, 모든 어려움과 훈련이 선하게 의도된 것이다(창50:20). 그러므로 우리의 관점에서 가장 큰 재난은 사실 하나님의 자비의 표시이다.’

역사 상 최악의 사건들이 또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일이었음이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가장 악하게 꾀한 음모의 결과였다. 타락한 인간에 의해 운영된 사법 제도는,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결백하고 의로운 사람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큰 실증으로 그분은 주권적으로 그 모든 십자가형을 우리가 영생을 상속받을 수 있는 방법으로 전개하셨다(행4:27~28).

갈보리의 추함과 악함 가운데서, 제자들조차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우리는 똑같은 류의 영적인 맹인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주권 둘 다로부터의 확신을 가지고,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때조차도, 그분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 [복음기도신문]

카메론 부엣(Cameron Buettel)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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