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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그래서 바르트, 루터, 에드워즈를 ‘삭제’해야 할까?

사진: Markus Spiske on unsplash

현대 사회에는 과거에 위대한 신학자로 여겨졌던 사람들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가 존재한다.

첫 번째는 성인으로 추앙한다. 그들의 머리에 후광을 씌우고 그들을 신앙의 선조로 바라보고, 그들이 저지른 실수와 죄, 악행은 고작해야 흐릿한 렌즈로 대충 보고 넘어간다. 그들의 통찰력과 업적에 매료되어 그들이 저지른 잘못은 까탈스러운 역사가나 지적하는 그저 그런 사소한 “흠결”로 치부한다.

두 번째는 완전히 ‘삭제’한다. 이는 삭제 문화(cancel-culture)라는 충동성을 반영하는 태도인데, 그들을 오늘날 기준에서 볼 때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한 행동 또는 관점을 가졌던 사람으로 완전히 지워버린다. 한마디로 그들이 저지른 죄가 그들의 덕이나 선을 신뢰할 수 없게 만들므로, 오늘날 분명히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이로울 만한 그들의 성과조차도 철저히 철회한다.

이 두 가지 태도 모두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두 가지는 하나같이 인간의 본성, 그러니까 죄가 선함과 얽혀 기생하는 본성, 달리 말하면 성화의 불균일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런 태도에는 더욱 심도 있는 복잡성이 요구된다. 언제는 성인으로 떠받들다가 순식간에 인생 전체를 시궁창으로 던져버리는 게 오늘날 세상의 현실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세상과 똑같은 태도로 신학자를 대한다는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누군가를 무시하고 그의 모든 업적을 최소화한다. 반대로 누군가의 공헌은 무분별하게 수용하고 그의 죄를 최소화한다. 우리는 이런 태도보다 더 나은 방향을 찾아야 한다.

과거 신학자의 죄와 관련해서 우리는 무시할 수도 또는 더 깊이 들여다볼 수도 있다. 더 깊이 들여본다는 것은 죄의 다양성을 고려한다는 것이다. 더불어서 그런 죄가 해당 신학자가 가졌던 신학적 사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또한 지혜와 분별력을 가지고 결함을 가진 신앙 선배를 연구함으로 오늘도 여전히 얻을 수 있는 보물이 무엇인지를 고려하는 것이다. 

칼 바르트 딜레마

내가 크리스티안 티에츠가 쓴 탁월한 칼 바르트 전기를 읽었던 때는 교부들이 신학이라는 과업에 어떻게 접근했는지에 관한 책을 집중적으로 읽던 몇 년 전이다. 칼 바르트의 전기는 한마디로 내게 충격을 주었다. 

바르트는 아마도 요제프 라칭거(베네딕토 16세)와 경쟁할 수 있는, 지난 세기가 배출한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신학자일 것이다. 그러나 숨겨졌던 바르트 삶의 한 측면이 드러났고, 우리는 그가 조수 샬로테 폰 키르쉬바움과 불륜 관계였음을 알게 되었다. 바르트는 심지어 삶 전체를 그 죄를 지속하기 위한 형태로 구성함으로 아내 넬리에게 상처를 주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불륜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왜곡되고 기괴한 신학적 변명까지 일삼았다. 

새뮤얼 파키슨은 최근 이 딜레마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칼 바르트가 불륜을 저지른 부끄러운 남편이라는 건 부끄럽지만, 그래도 위대한 신학자이자 교회에 주어진 선물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라는 말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물었다. 파키슨은 신학자의 삶에서 미덕의 역할에 대한 교부들의 글을 소개하고 거기에 동의한다. “독단적이고 습관적인 불륜”은 신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는 개인의 경건이 신학 과제에 필수라고 주장했다. 청결한 마음을 가진 자만이 하나님의 찬란한 빛을 받아들일 수 있다. 신학은 결코 추상적인 학문, 삶과 유리된 순수 학문이 아니다. 바르트조차도 이런 현실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랬기에 그는 자신과 키르쉬바움이 저지르는 죄악의 “경험”이 그의 신학적 반추에 과연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하다는 내용을 편지에 썼다. 

신학자와 청결한 마음

과거 신학자에게서 도덕적 올바름을 요구해야 할까? 성경이 제시하는 신실함(fidelity)의 기준에서 볼 때,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신학자에게서도 배울 만한 게 있을까? 

멸시의 눈으로 과거를 내려다보는 대신에 더 깊이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교부들의 관점에 동의하게 된다. 즉, 하나님 속에 숨은 신비의 깊이를 측량하고자 하는 신학자 내면에는 “점점 더 커지는 청결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높은 표준을 요구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전기(biography)가 어떻게 신학을 형성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신학함(theologizing)이 항상 죄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도 고려하게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계몽주의 체계주의자나 과학자가 신학을 하는 것처럼 개인의 성결 문제를 아예 차단하고 다루지 않는 것이 답이 될 수는 없다. 성품은 우리가 성경을 신학화하고 해석하고 또 적용하는 방식에까지 차이를 만든다. 교부들이 한 말이 옳다. 삶 속에 지속적으로 짓는 죄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신학이 죄에 의해서 어떤 영향을 받는지 깊이 생각하길 꺼리는 신자가 적지 않다. 왜냐하면 그러는 순간, 과거의 신학자들에 대해 (특히 여러 형태의 백인 우월주의에 연루된 신학자들에 대해) 온갖 종류의 불편한 질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만연한 무비판적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말이 보여 주듯이, 앞서간 신앙의 선배를 너무 빨리 무시하는 철회 문화 사고방식에 대한 반발 때문인지 몰라도, 우리는 학문적 연구와 개인의 경건을 아예 분리하는 계몽주의 양식에 빠져드는 것이, 이 문제에 천착한 모더니즘 이전 시대(premodern) 교부들의 주장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보다 더 쉽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방향이다. 그렇다고 내가 바르트를 포함한 중요한 신학자들을 아예 삭제하자는 취소 문화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영향력 있는 신학자들의 죄가 그들의 신학적 추론과 결론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다 더 신중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하자는 것이다. 역사가 데이비드 스타인메츠(David Steinmetz)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역사 연구는 과거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유를 교회에 줍니다. 과거의 지혜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자유뿐 아니라, 꼭 필요한 경우에는 불성실함과 죄를 극복하는 자유까지 줍니다.”

죄에 빠진 신학자의 세 가지 유형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 다른 유형의 죄성을 구분해야 한다. 크든 작든 모든 죄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기에 모든 죄가 같다고, 따라서 죄의 유형을 구분하는 데에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도 적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 전통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듯, 어떤 죄는 “다른 죄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더 가증하다”(문 151)라고 가르친다. 

나이가 많아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 사람이 짓는 죄, 하나님을 더 직접적으로 모독하는 죄, 또는 단지 마음의 관념에서 벗어나 일련의 추악한 말과 행동이 되어 회개 없이 지속되는 죄는 훨씬 더 심각하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이 별도로 언급하는 죄 중에는 본성을 거스르는 죄, 양심에 어긋나는 죄, 그리고 고의적이고 주제넘게 서원을 깨는 죄가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과거 신학자가 범한 죄를 몇 가지 범주로 구분할 수 있다. 

1. 고의적인 반역

죄인 줄 알면서 고의로 죄를 고집했던 신학자의 범주에 속하는 사례는 바르트에게서 시작할 수 있다. 폴 틸리히도 여기서 포함된다. 그의 상습적인 혼외정사는 당시에도 유명했다. 습관적으로 부정한 활동에 관여한 신학자가 저지르는, 회개나 회복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죄는 죄 중에서도 가장 악질에 속한다. 

2. 비난받을 무지 

두 번째 범주에는 그 시대의 죄와 악, 불의에 연루된 목회자와 신학자가 포함된다. 그들의 죄는 비난받을 무지(culpable blindness)의 결과이다. 마르틴 루터의 반유대주의적 견해와 저술,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가 (비록 그가 노예무역은 비난했지만!) 노예제를 옹호하고 노예를 부린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에드워즈와 루터는 그들의 도덕적 책임을 제거하거나 축소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촉구할 것이다. 당시에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죄를 저지르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영적으로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여전히 눈이 먼 상태 자체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 세상에는 종종 마음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진리가 있기 마련이다. 

3. 죄 가운데서 분투

세 번째 범주는 죄 가운데서 몸부림치면서 산 신학자를 포함한다. 한편으로 그들은 죄와 싸우고, 교회라는 큰 맥락 안에서 죄를 고백하고, 또 때때로 넘어지더라도 죄에서 돌이키려 노력한다. 죄는 항상 우리의 삶과 주변 사람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에 어떤 형태로든 죄를 최소화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경우 신학자가 추구하는 욕망은 죄를 거부하고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몇몇 청교도의 글과 더 거슬러 올라가서 안셀무스나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을 읽어보라. 타락한 세상의 오물 속에서도 거룩함을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만날 것이다. 그렇다.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몸부림치는 신학자가 있다. 

범주를 복잡하게 바라보기 

지금까지 소개한 범주에는 몇 가지 제한 사항이 있다. 첫째,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죄에서 멀어지거나 죄를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군가를 그 시점에 “붙잡아 두는” 경향이 있다. 설혹 인생의 한 계절에 고의적인 반역을 저질렀다고 해도 다른 계절에는 메마른 땅을 뚫고 피어오르는 회개의 싹으로 인해서 죄의 종류가 죄 가운데서 몸부림치는 투쟁으로 바뀔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비난받을 여지가 있는 무지가 얼마든지 아예 고의적인 반항으로 굳어질 수도 있다. 

둘째, 고의적인 반역이 가장 심각하고 지독한 죄의 범주라는 데 대부분 동의하더라도 기억할 점이 있다. 비난받을 여지가 있는 무지가 초래하는 영향도 그에 못지않게 파괴적일 뿐 아니라 때때로 훨씬 더 끔찍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몇 년 동안 나치가 얼마나 루터의 주장을 활용했는지, 더불어서 에드워즈의 여파로 노예제라는 악에 계속 동참한 후기 미국 신학자를 떠올려보라). 그러나 아마도 신학자들 대부분이 해당하는 것은 세 번째 범주일 것이다. 비록 청결한 마음이 아니더라도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따라서 죄와 싸우는 사람들 말이다. 

셋째, 어떤 죄에 관해서 듣고서는 “말도 안 되게 끔찍하다”(disqualifying)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사실 성경 말씀이 아니라 문화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성경을 읽는 방식 때문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일부 아프리카 그리스도인에게는 문신 간음보다 훨씬 더 심각한 범죄이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솔로몬, 요나 같은 성경 인물은 지독한 죄도 지었지만 영광스러운 구원까지 이룬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인물이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적지 않은 목회자와 신학자가 자신이 추구하는 신학과 아름답게 일치하는 삶을 살고 있다. 고대 교회는 종종 그런 사람을 “성도”(saints)라고 불렀다. 비록 개신교 전통에는 공식적인 “성인”(sainthood)이 없지만, 누군가의 삶이 그들의 신앙 고백 및 신학 연구와 일치할 때 드러나는 아름다움과 영광을 우리는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 그렇기에 개인적 영역과 공적 영역 모두에서 경건함으로 특징지어지는 삶을 사는 사람의 신학적 사색을 더 신뢰할 만하다고 보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 

더 깊은 질문 던지기

그렇기에 신학자를 “전부 아니면 전무”로 취급하는 것은 올바른 길이 아니다. 무조건 비판하는 것도 또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것도 현명하지 않다. 하나 같이 죄 많은 신앙 선배지만, 그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있다.

소셜 미디어가 불러일으키는 충동은 모든 사람을 빠르고 쉬운 상자에 집어넣고 단숨에 “영웅”과 “악당”으로 갈라놓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진짜 삶은 결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오히려 영광스러울 정도로 복잡하다. 우리가 “악당”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영웅적인 미덕의 소유자도 있고, “영웅”이라고 부르는 사람 중에서도 악랄한 죄를 계속해서 저지르는 이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과거 신학자가 추구한 신학적 관점 중에서 과연 죄로 인해서 왜곡된 부분이 있는지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온시 카멜(Onsi Kamel)은 이렇게 충고한다. “사고의 좌표와 어떤 특정한 죄를 살펴보라. 그리고 특정 사고가 그 해당하는 죄에 의해 눈에 띄게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는지 조사할 것을 권한다. 그런 다음 그 사고가 미치는 전반적인 부분을 무시 또는 경고하거나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

이 시점에서 궁금해진다. 

그럼 루터의 비난받을 만한 반유대주의가 구약 성경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유대인에 대한 그의 관점이 율법과 복음 사이의 명확한 구분 또는 사회에 대한 두 왕국이라는 접근 방식을 만든 것일까? 

에드워즈가 노예를 소유한 사실이 그가 성경이 말하는 자비와 정의를 이해하는 데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노예 소유가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이나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견해를 어떻게 바꿨을까? 사회의 질서에 관한 생각 또는 인간성에 대한 교리를 확립하는 데에는? 에드워즈의 아들이 열렬한 노예폐지론자였다는 사실이 이런 질문을 더 복잡하게 만들지는 않는가? 

바르트의 간음은 죄와 은혜에 대한 그의 견해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고의적인 반역과 신학적 비틀기(gymnastics)가 혹시라도 그가 하나님의 심판을 이해하는 데에 악영향을 끼친 것은 아닐까? 그가 주창한 준-보편구원론(semi-universalistic musings)에도 그의 죄가 어떤 역할을 한 건 아닐까? 

성화는 사람마다 다르다. 지금 이 글이 답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신학자들에 대해서 침묵하기보다는 더 많이 논쟁해야 한다. 단순한 답보다는 차라리 복잡한 게 더 낫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다. 과거 신학자들의 죄를 최소화하는 성인전(hagiography)이나 좋은 말만 모은 전기 속에도, 그렇다고 그들의 삶에서 성화의 표징은 보지 않고 오로지 죄만 찾아내려는 충동 속에도 진실은 없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복잡성을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심지어 가장 존경받는 신학자조차도 얼마든지 자신의 신학적 비전에 영향을 미치는 죄나 무지를 품을 수 있음을 인식하자.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거룩함을 추구하겠다는 재헌신이다. 그리고 거룩함 없이는 우리가 그토록 더 알고 싶고 사모하는 하나님을 결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복음기도신문]

원제: Should We Cancel Karl Barth, Martin Luther, and Jonathan Edwards?

트레빈 왁스 Trevin Wax | LifeWay Christian Resources의 신학과 커뮤니케이션학과의 부학장이며 Wheaton College의 외래 교수이고, The Gospel Project의 편집자이다. ‘디스 이즈 아워 타임’, ‘일그러진 복음’, ‘우리시대의 6가지 우상’, ‘Gospel Centered Teaching’을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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