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선교는 150년을 훌쩍 넘었다. 전쟁으로 마이너스에서 출발했던 지난날 기독교 역사를 되새기면서 앞으로의 일본 선교의 추수를 위한 선교 방향을 소개한, 한국선교연구원의 ‘파발마 플러스’ 3월호에 실린 동경기독교대학 학장인 야마구치요우이치 박사의 기고문을 요약, 소개한다. <편집자>
전쟁에서 패한 1945년은 일본의 개신교 선교가 100년을 맞이한 해였다. 일본기독교단은 선교 100주년 대회를 개최하면서 회복과 부흥을 도모했지만, NCC(National Church Council, 교회협의회) 계열과 복음파 계열로 나뉘었다.
전후 60년의 교회, 선교 100주년
일본기독교단은 우상숭배로 인한 죄의 책임과 전쟁 책임을 자각하지 못한 채, GHQ(패전 후 일본에서의 미군정 사령부) 점령하에서 기독교 붐을 맞이했고(1946~48년), 신일본 건설 기독교 운동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일본기독교단으로부터의 탈퇴도 이어졌다. 이윽고 붐은 잦아들고, 전후 프로테스탄트는 NCC 계열의 교회와 복음주의 계열로 양분되어 성장해 기독교 신자는 1948년 20만 명에서 1968년에 40만 명으로 증가한다.
이 시기에 NCC에 의한 선교 100주년 기념대회가 1959년에 개최됐다. 또한 세계대전 이후 라쿠아 전도1, 동경 크루세이드(1959, 61년) 등 미국교회의 지원에 힘입어 전도가 활발히 진행됐다.
프로테스탄트 선교 100주년은 교회가 잿더미에서 다시 부흥한 축복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시하에서 있었던 일본 교회의 죄에 대한 책임 문제는 남아있었다. 1967년 전쟁 책임에 대한 사죄 이후, 일본기독교단에서는 사회파와 교회파 사이에 분쟁이 계속됐고 교세는 정체됐다. 한편 사회‧정치에는 관여하지 않고 전도를 계속했던 복음파는 성장을 거듭했다.
복음파의 대두
선교 100년을 맞이해 복음파 계열의 단체는 선교 100주년 기념 성서신앙 운동을 전개한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에 의한 것으로 오류가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범이 된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표명하면서 협력관계를 구축했다. 그 결과 1960년에 일본 프로테스탄트 성경신앙동맹(JPC), 1968년에 일본복음동맹(JEA)이 창설됐다. 1974년 JEA에 의해 제1회 일본전도회의가 교토에서 개최됐고, 1300명의 참가자들이 함께 기도하면서 선교협력을 구체화 시키게 된다. 또한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선교 국제회의에서 채택된 로잔 언약은 1960년대 이후 복음파의 지침이 됐다. 전도뿐만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교회의 사명으로써 확신했다고 하는 점에서 선교 이해와 실천의 폭을 확장시킨 계기가 됐다.
이것은 동시대의 오사카 만국 박람회 문제와 동경신학대학 기동대 침입으로 혼란이 가속화되고 있던 일본기독교단과는 매우 대조적인 것이었다. 일본기독교단에 문제를 제기한 청년들이 NCC계열의 교회를 떠나는 가운데 교회에 머물던 청년들이 복음파를 활성화시켰다. YMCA와 YWCA가 문화 분야에서 활동한 것에 반해, 기독교학생회(KGK)와 캠퍼스크루세이드(CCC)는 학내 전도에 매진하게 된다.
일본복음동맹은 1986년에 재편되어 성경 신앙과 기본 교리에 입각해서 칼뱅주의로부터 알미니즘의 성결파에 이르기까지 신학의 차이를 넘어 함께 협력관계를 구축했고, 1980년대에는 숫자적으로도 주류파(NCC 계열)와도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복음파 계열의 교회들은 1970년대 야스쿠니 신사 국영화 법안 반대 운동 당시 신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도 참가했다. 그러나 1989~90년 천황의 이임식과 황위 계승식을 통해 천황의 우상화는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신사 참배 사죄와 정치에서 분리된 기독교
1951년에 일본기독교단을 탈퇴한 일본기독교회는 1990년에 이르러 조선의 장로교회에 대한 신사 참배를 설득한 죄에 대한 책임을 사죄했다. 복음파 계열에서도 전후 50년을 맞이한 1995년이 되어 전시하에 있었던 죄에 대한 고백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바이츠 제커(Richard von Weizsäcker) 서독 대통령의 연설 “광야의 40년”과 전후 50년 무라야마 수상의 담화에 이르기까지 전쟁 책임에 대한 자각의 흐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자국 중심적인 역사관 등 보수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신교의 자유,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둘러싼 투쟁은 교회와 국가를 둘러싼 교회의 자율적인 과제로 취급되었다. 일본기독교개혁파와 일본장로교회 등 개혁파 신학은 이론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고, 신사 참배 회개를 통한 한국교회와의 교류, 자기 교파에서 있었던 탄압의 역사를 새롭게 인식한 호리네스 교단의 대처도 귀중한 것이었다. 전후의 교회였기 때문에 가능한 회개라는 측면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세기를 거치면서 일본 교회의 근본적인 과제를 파악한 이 시기의 선언이 다음 세대까지 계승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마침내 복음파 교회의 미숙함도 성숙을 향해 나아간다. 성령파(카리스마파)로 불리는 제3의 그룹이 대두됨에 따라 교회론도 함께 성장해가는 것은 교회사 전체에서 볼 때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50년을 지나온 복음파의 정체성은 성경에 충실하고 조용히 기도하는 정숙한 교회의 모습으로 자리잡게 된다.
선교 150년의 과제
1990년 황위 계승식은 전후(戰後) 민주주의 사회로의 전환점이었다. 패전 당시 국가의 체제 유지를 간절히 원했던 사람들은 천황을 신격화하는 의례를 보면서 안도하기 시작했다. 버블경제가 붕괴되고, 1995년에 오움진리교(동경지하철 사린 가스 사건을 일으킨 이단 종파) 사건이 있었고,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가 등장하고, 글로벌화가 촉진되는 가운데 자국 중심적인 역사관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게 됐다. 포스트모던의 풍조는 종교적인 것에 대해 관심을 보였지만 종교 단체에 대해서는 더욱 경계를 하게 만들었다.
고령화가 두드러는 일본기독교단에서 교회 유지에 관심이 모아지면서 청년들에 대한 전도를 더욱 기대하게 됐고, 목사 부족의 위기에서 시니어 헌신자들의 수고가 이어졌다. 전쟁을 겪은 시니어 세대가 글로벌 시대의 국제적인 공헌이 요구되는 상황 속에서 헌법 9조(전쟁포기)를 지키는 것을 사명으로 삼아 다음 세대를 길러내는 일에 매진하고 있만 다음 세대의 사역자를 배출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복음파의 교세는 1995년을 기점으로 성장에서 정체로 돌아섰다. 성령파(카리스마파)는 1990년 이후 부흥운동 성격의 전도를 전개했고, 1996년에는 첫 전국조직으로서 일본부흥동맹을 설립했다. 보다 새로운 교회가 생겨났고, 성장점이 이동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에서 온 선교사는 천여 명에 이르고, 한류교회와 글로벌한 대형교회 등이 크게 부흥하고 있다.
복음파의 성장은 1995년경부터 둔화하기 시작한 반면 일본기독교단에서는 교회 계승을 중시하는 그룹이 세력을 펼치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성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1999년 일장기를 국기로, 기미가요를 국가(國歌)로 삼은 이후 야스쿠니 신사의 특수법인화가 거론되었고 교육기본법은 개정되었다. 일본에 있어 정교분리 확립을 위한 노력은 과거의 침략과 종교 지배에 협력했던 교회들의 회개의 열매이다.
앞으로의 일본선교
메이지 문명개화, 국체와의 충돌, 다이쇼 데모크라시, 신도(神道) 제국주의, 전후의 민주주의 시대를 통과해 온 일본교회는 1990년대부터 글로벌 시대를 걷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가 보냄을 받았다’라고 하는 책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포스트모던, 다원주의, 공생, 환경을 키워드로 하는 시대에 대한 적응은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교회의 책임이다. 특히 젊은 세대를 전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행 3:6)라고 하는 확신과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안에서 붙들어야만 한다. 기독교 연감 통계에 따르면, 일본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2007년에 8235개 교회, 61만 5918명의 성도였지만 2021년에 교회는 7468개로 줄었고, 성도들도 53만 6857명으로 줄었다.
또한 전후에 전도를 담당해왔던 교역자와 성도의 고령화가 두드러진다. 일본기독교단은 2030년이 되면 성도의 3분의 2가 평균 수명을 넘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저출산과 젊은층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도 앞으로의 큰 과제이다. 복음파는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지만 동일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신자가 모두 멸절된 것으로 여겼던 160년 전에는 제로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마이너스로부터 출발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일본의 600개의 사립대학 중 10%는 기독교 학교이다.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물려받은 믿음의 유산을 살리고 싶다. 1281명의 한국인 선교사의 존재는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힘이다. 『총‧균‧쇠』로 퓰리처 상을 수상한 재래드 다이아몬드(Jared Mason Diamond)는 코로나 이후 일본의 가장 큰 문제는 인구 감소, 고령화, 불경기보다 주변 나라들, 특히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라고 발언한 바 있다. 이런 적극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글로벌 사회에 있어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복음 선교에 조급해 하지 않고 쉼 없이 격려를 보내고 싶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요 4:35)라고 말씀하실 때,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그 밭이 추수할 밭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선교 150년을 훌쩍 넘은 지금, 일본교회는 고령화와 다음 세대 사역자 부재 등의 문제를 안고 있지만 마이너스에서 출발했던 지난날 기독교 역사를 되새기면서 추수를 위해 쉼 없이 나아가기를 다짐한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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