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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양 칼럼] 불교, 종교다원주의의 최고 수혜자

사진: Jed Adan on unsplash

눈먼 기독교(16)

경북 김해에 있는 사찰인 선지사에는 500개의 나한상이[1] 안치돼 있다. 그런데 그 나한상 중에 예수 상(像)이 있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 사실이 TV에 나왔는데 그때 그 사찰의 주지 스님이 예수를 위대한 성인으로 존경하고 받들기에 그렇게 다른 불교 성인(聖人)들과 함께 모시고 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것은 현대 불교의 포용성과 개념 없음을 동시에 보여주는 모습이 아닐 수가 없다. 물론 이런 현상은 예수 신앙이 아예 없거나 왜곡돼 있는 자들에게는 바람직한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다음의 글을 보라.

불교는 ‘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으며 불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이웃 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진리에 대한 표현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열린 진리관은 이웃종교를 대하는 기본 원칙이며 대화와 소통을 위한 출발입니다. 진리란 특정 종교나 믿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진리는 모두에게, 모든 믿음에 다 열려 있습니다.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

이 글은 2011년 8월 23일 불교계에서 발표한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초안)”이다. 종교 간의 평화를 위해 불교계가 나름 고심해서 제안한 이 선언문은 상식적이고 설득적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리고 미안하게도, 모든 종교가 다 진리는 아니다. 모든 믿음이 다 진리는 아닌 것이다. 오직 예수만이, 하나님만이, 성경만이 진리다. 그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나만의 진리’를 고집하는 기독교에만 진리가 있다. 아무리 소통과 연합이 중요해도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할 수는 없다. 열린 진리관은 틀린 것이다.

이 선언은 또한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믿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모든 믿음의 대상이 다 진리라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당연한 생각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믿음의 ‘대상’ 보다 믿음의 ‘방법과 자세와 마음가짐’이 더 중요한 것일까? 어떤 사람이 약도 없는 중한 병에 걸려서 사경(死境)을 헤매고 있었는데, 마침 특효약이 개발되어 시판하게 됐다. 그 때 이 환자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시급하게 그 신약을 구해서 먹이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상태에서 아무 약이나 정성껏 온 마음을 다해 먹으면 그 환자가 나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혹시 배탈 환자라면 플라시보 효과를[2] 좀 볼 수도 있겠지만, 중환자에게 그게 과연 통할까? 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먹느냐이지 ‘어떻게’ 먹느냐가 아니다. 약이라고 다 같은 약이 아니듯이 이 세상의 모든 종교가 다 진리는 아니다.

인류에게 꼭 필요한 것은 아무 종교, 아무 가르침, 아무 이름이 아니고, 구원을 주는 예수라는 이름이다. 이것을 모르는 자들이 모든 종교가 다 약발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불교야말로 아무 약이든 다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라고 가르치는 대표적인 종교다. 숭산 스님의 다음과 가르침을 보라.

도교, 유교, 기독교, 불교, 어느 종교의 경전을 독송하느냐는 중요치 않아. 청정한 마음을 지닐 수 있으면 ‘코카콜라, 코카콜라, 코카콜라, 코카콜라…….’ 이렇게 코카콜라를 외우더라도 상관없어.[3]

과연 그럴까? 어떤 경전이든지 상관없고, 심지어 아무 의미 없는 단어를 정성껏 암송하기만 하더라도 진짜 영성이 만들어지는 걸까? 이에 비해 오직 참 신은 하나님 한 분뿐이며, 진리는 오직 성경의 가르침뿐이며, 생명은 오직 예수뿐이라는 기독교의 절대적 신앙관은 불교의 입장에서는 불편하고, 독단적이고, 한심해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불교의 거목인 성철 스님이 기독교를 비판하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천당에 가고 안 믿으면 모두 지옥 간다.” 이렇게 되면 참 곤란합니다. 우리 불교는, 부처님은 안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착하게 살면 다 좋은 데 간다. 부처님 믿고 안 믿고 할 것이 없습니다. 착한 일을 하기만 하면 좋은 데 간다고 하지 우리 부처님 믿어야만 극락세계 간다는 소리는 안 한다 말입니다. 그건 신사가 아닙니다.[4]
자기(自己)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중략)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영원하므로 종말(終末)이 없습니다.[5]

과연 성철 스님이 말한 것처럼 ‘자기’가 영원하고 무한할까? 자기는 종말이 없을까? 기독교는 ‘마음’을 다스리는 이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기독교는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통치와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종교다. 이것이 바로 불교가 현대인들에게 통하고 기독교는 통하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절대적 가치관을 싫어하고 자기중심주의가 팽배한 현대인들에게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말하는 기독교는 비호감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시대 종교다원주의는 마음을 강조하는 불교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다.

숭산 스님의 “부처님을 쏴라!”

국내보다도 오히려 해외에서 더 유명하고 인정받은 숭산 스님이 있다. 숭산은 살아생전 티벳의 달라이 라마, 베트남의 틱낫한과 더불어 세계3대 생불(生佛)로 존경받기도 했다. 이 스님이 미국에서 포교를 할 때 어떤 여성에게 이런 가르침을 준 적이 있다.

부처님이 나타나면 부처님을 쏴라! 하느님이 나타나면 하느님을 쏴라! 하나님이 나타나면 하나님을 쏴라! 스승이 나타나면 스승을 쏴라! 조사(祖師)가[6] 나타나면 조사를 쏴라! 마구니가[7] 나타나면 마구니를 쏴라! 마음속에 무엇인가가 나타나면 그걸 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알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당신은 부처가 됩니다![8]

부처가 되기 위해 부처님마저도 마음에서 지워버려야 한다는 가르침이 불자에게는 위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참된 기독교인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 예수를 가득 채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성화(聖化) 정도는 ‘마음 비움’ 정도가 아니라 ‘예수 채움’ 정도다. 그런데 요즘 희한하게도 불교를 본받아 예수 채움이 아닌 마음 비움이 기독교의 정수(精髓)인 듯이 여기고 있는 변종 기독교 성직자들이 있다.

숭산 스님은 가끔씩 미국 켄터키 주에 있는 겟세마네 수도원에서 법회를 가졌다. 그곳에서 수사(修士)들은 불교식으로 염불하고 승려들은 로마 가톨릭식으로 독송을 했다. 가톨릭 수사들과 불교 승려들이 상대방의 수행(修行) 방식을 따르는 것을 숭산은 자랑스러워했다. 가톨릭 수사가 불교식으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모습이 어떻게 느껴지는가? 기독교는 내면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보다 이미 주어진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우선인 종교다. 기독교를 깨달음의 종교로 바꾸려는 시도는 어리석고 교만한 인본주의일 뿐이다.

숭산은 과거 전두환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여기서 그는 예수의 말씀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며 기독교를 비판한다.

기독교 성경 말씀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로다”[9] 하시었습니다. 우리 불교에서도 ‘나’를 깨달으면 대도를 알아 대우주의 진리를 증득(證得)하여 일일 올바른 생활을 한다 하였으니, 기독교나 불교나 목적은 같으니 기독교는 객관적 종교요, 불교는 주관적 종교이므로 방법이 다를 따름이옵니다. 그럼 보시오. 요사이 기독교가 너무 날치는 꼴 그것은 기독교 문턱에도 못 간 인간들이 기독교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나를 깨닫는 참선을 가르치며 많은 신부님과 목사님이 찾아와 같이 참선하고, 도담을 하고, 중생을 위하여 같이 손잡고 일하고 있습니다.[10]

숭산은, 안타깝게도, 기본 어법을 무시하고 있다. 예수가 말씀하신 ‘나’는 오직 예수 ‘당신’을 가리킨 것이지 흔히 말하는 ‘자기’, ‘자아’, ‘자신’이 아니다. 예수 한 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지 ‘나 스스로’가 그렇다는 말이 아닌 것이다. 불교에서 ‘자기’를 강조하는 것은 이해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견강부회로[11] 남의 경전을 해석하면 안 될 것이다.

아무튼 그가 말하는 것처럼 지금 미국에서는 기독교와 불교가 밀착해서 교류하는 현상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데, 그것을 불교 입장에서는 엄청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숭산 스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외국인 특히 미국인이 많은데 그것은 그가 일찌감치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한국식 불교를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숭산의 미국인 제자 가운데는 현각 스님이 유명하다. 현각은 학부는 예일 대학에서, 대학원은 하버드 대학에서, 그 후에는 유럽에 유학도 다녀온 엘리트다. 로마 가톨릭 집안에서 성장한 현각은 본래 이름이 폴(Paul, 바울)이다. 폴은 로마 가톨릭에서 진리를 찾고자 했지만 선생들의 경직된 종교관에 실망하여 스스로 진리를 찾던 중 쇼펜하우어를 만났고, 불교를 만났고, 숭산 스님을 만났다. 그리고는 불가에 귀의하였다. 그는 현재 숭산 스님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 현각 스님이 미국에서 주지스님으로 있을 때, 기독교와의 교류와 연합에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음을 다음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내가 주지로 있기도 했었던 프라비던스 젠센터[12] 홍법원 옆 도시에는 아주 큰 교회가[13] 하나 있다. (중략) 그런데 그 교회 담임인 톰 목사님은 항상 불교 경전 가르침과 참선수행을 정규 과목으로 개설해놓고 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톰 목사님 역시 20여 년을 젠센터에서 참선수행을 해오셨다는 것이 아닌가. (중략) 어느 날 톰 목사님은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요즘 같으면 내가 도대체 기독교 신자인지 불교 신자인지 구분이 안 갈 때가 있답니다. 교회에 살긴 하지만 매일 불경을 읽고 참선수행을 하고 시간 날 때마다 현각 스님이나 티벳 승려들을 만나 부처님의 말씀을 얘기하고 심지어 주일날 설교 때도 불법을 전하니 이것 참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어요. 하하하.”[14]

물론 여기에 나오는 교회는 유니테리언 교회이므로 비성경적인 목사가 있을 수도 있다. 이 교회는 예수가 피조물이라고 믿고 삼위일체 교리를 거부하는 신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단 이 교회만이 아니라, 이 시대는 교회 설교단에 승려가 올라가 설법을 전하고, 목사가 불경으로 설교를 하는 시대다. 한국이나 미국은 물론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이미 이렇게 혼합된 기독교 영성으로 물들어 버렸다.

혜민 스님이 말하는 포용성

기독교는 원래 사랑의 종교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죄인을 위한 사랑 때문에 죽으신 분이 아닌가! 참된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사랑을 최고의 실천 덕목으로 삼아야 한다. 그런데 이 사랑이란 것이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 의미로서의 사랑은 아니란 것을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 예수만이 진리이고 생명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종교가 기독교이기에 이 혼합의 시대에 기독교는 타 종교에 비해 배타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불교를 보라.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주제로 하고 있는 불교는 모든 종교를 흡수하는 데 탁월하다. 그래서 불교는 포용력 있는 종교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최근 불교 신도들은 물론 일반 대중에게도 최고의 멘토이자 조언자로 인정받고 있는 혜민 스님이 있다. 미국의 UC버클리 대학 학사, 하버드 대학 석사, 프린스턴 대학 박사라는 화려한 학력을 가졌고, 현재 종교학 교수이기도 한 혜민 스님은 이런 글을 썼다.

상대방이 종교에 대해 편협한 태도로 나오면 이번엔 당당히 말하십시오. 당신 종교의 큰 어른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셨다고. 김수환 추기경님과 강원용 목사님이 얼마나 서로 존경하셨고 법정 스님과 이해인 수녀님이 글을 통해 서로 얼마나 교감하셨는지, 달라이 라마 존자와 토마스 머튼 수사가 얼마나 절친이셨는지 알고 계시냐고. 종교의 본질을 보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다 통합니다. 영성이 깊지 않은, 말만 배운 초보 신앙인들만 모양과 형식이 다인 줄 알고 세뇌되어 자기 식만 옳다고 싸우는 것입니다.[15]

이렇듯 포용력 있는 모습으로 모든 종교가 다 진리라는 듯이 말하니 세상에서는 당연히 인정받고 존경받지 않겠는가? 우리는 다종교사회에 살면서 당연히 다른 종교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 밖에는 구원과 천국이 없다는 확고한 진리를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 이것을 포기하면 그것은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닌 것이다. 혜민 스님이 인용한 종교계 인사들은 한결같이 종교혼합적 성향을 지닌 인물들이다. 이들이 사회에서 존경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바로 이러한 혼합적 영성도 한몫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혜민 스님은 이런 것을 추앙(推仰)하며 기독교의 배타성을 논박하고 있다.

사실 혜민 스님은 어린 시절 기독교인으로 지내기도 했다. 또한 첫사랑 여인이 기독교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와의 설익은 접촉은 그에게 아무런 감동과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청년 시절, 신비사상가인 크리슈나무르티가 지은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 책은 한 마디로, ‘인간은 스스로가 신(神)이다’라는 것이다. 혜민 스님이 24세라는 젊은 나이에 출가를 한 것도 결국 그 책의 뉴에이지 사상에 심취했기 때문이다. 그의 다른 말을 살펴보자.

예수님, 부처님, 공자님이 같이 살아 계시다면 서로 자신 말이 옳다고 싸울 것 같은가요, 아니면 서로를 지극히 존경하며 사랑할 것 같은가요? 성인을 따르는 광신도가 문제이지 성인들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16]

혹시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도 지금 이 주장에 동조하는 자들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사람은 아직 예수를 알지 못하는 기독교인이다. 정말로 부처와 공자가 지금 예수와 함께 차 한 잔 하면서 저 세계에 있을 것 같은가? 이 분들이 서로를 존경하며 껄껄껄 웃으며 친구처럼 지내고 있을 것 같은가? 이렇게 생각하는 자들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자들은 부처와 공자가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다. 잊지 말라. 인생 가운데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그리고 예수는 구원자이자 심판자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이것이 기독교의 기본적 믿음이지만 지금 이 시대는 기독교가 앞장서서 그러한 믿음을 희석시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천주교가 바로 그러한 일에 앞장서고 있다.


[1] 羅漢像, 불교 성자 형상

[2] placebo effect, 가짜 약을 진짜라고 속여 환자에게 투여했을 때 효능이 나타나는 심리효과

[3] 현각, 『부처를 쏴라』, 김영사, 61쪽

[4] 성철, 『성철스님법어』, 고려문학사, 63쪽

[5] 앞의 책 75쪽

[6] 종파를 처음으로 세운 승려 또는 존경받는 승려

[7] 악령 또는 악한 생각

[8] 현각, 『부처를 쏴라』, 김영사, 55-56쪽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장 6절)

[10] 앞의 책 273-274쪽

[11] 牽强附會, 맞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 붙여 자기에게 유리하게 함

[12] Zen Center, 선(禪)센터

[13] The First Unitarian Universalist Church

[14] 현각,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2』, 열림원, 162쪽

[15] 혜민,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쌤앤파커스, 254-255쪽

[16] 앞의 책 259쪽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눈먼 기독교>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박태양 목사 | 중앙대 졸. LG애드에서 5년 근무. 총신신대원(목회학), 풀러신대원(선교학 석사) 졸업. 충현교회 전도사, 사랑의교회 부목사, 개명교회 담임목사로 총 18년간 목회를 했다. 현재는 (사)복음과도시 사무총장으로서 소속 단체인 TGC코리아 대표와 공동체성경읽기 교회연합회 대표로 겸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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