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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일 칼럼] 튀르키예 동남부 최대 지진 피해지역, 수리아 안디옥 역사

▲ 튀르키예의 동남부를 강타한 두 차례의 강진으로 완전히 파괴된 지금의 안디옥 시내. 사진: 김종일

밖에서 보는 이슬람(49)

튀르키예 사상 최악의 재앙

이번 튀르키예 동남부에 강타한 사상 초유의 두 차례 강진은 우리나라보다도 넓은 면적을 가진 10개 주를 초토화했다. 튀르키예 재난관리청에 따르면, 이번 지진은 동남부 ‘카흐라만마라쉬’ 주를 근원지로 발발했으며, 지금까지 4만 명 이상이 사망했고, 이 지역에 사는 주민 1300만 명 모두를 한꺼번에 이재민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번 지진에 피해를 본 10개 주의 총면적은 11만km²로 우리나라의 10만km²보다 넓은 지역이다.

이번 지진은 ‘하타이’ 주에 가장 큰 피해를 줬는데, 여기가 바로 성경 속 ‘수리아 안디옥’이 있던 지역이다. 이곳 주민 중 한 사람은 안디옥(Antakya)이 지도에서 아예 사라졌다고 울먹인다.

성경 속 수리아 안디옥은 어떤 곳인가?

이곳이 바로 과거 초대 교회 당시 ‘크리스천’이란 이름이 처음으로 사용된 곳이다. 이곳에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세계 선교를 시작해서 당시 로마제국 안에서 소아시아가 복음화되었다. 이후 유럽에 복음이 전해졌으며, 결국 우리나라까지 복음이 전해지게 된 역사적 출발점이 바로 여기 수리아 안디옥이다.

수리아 안디옥의 유래와 환경

‘안디옥(Antioch)’이란 이름은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 중 한 명인 ‘셀루커스(Seleucus Nicator)’이 B.C. 301년에 입서스(Ipsus) 전투 승리 후 자기 부친의 이름을 따서 ‘안티오쿠스(Antiochus)’라고 붙인 데서 시작된다. 현 시리아의 북서쪽에 있는 안디옥은 오늘날에도 예전 발음과 비슷하게 ‘안타캬(Antakya)’로 부른다.

이 도시의 기후는 대체로 온화한 편이며, 도시 전체는 뒤쪽에 있는 실피우스 산에 둘러싸여 있으며, 약 560km 길이를 가진 오론테스(ORONTES)강의 하구에 위치한다. 오론테스강의 한 줄기는 레바논 베카 계곡에서 시작하여 시리아의 북쪽으로 흐르고, 또 한 줄기는 튀르키예 동남부에 있는 아마노스 산맥(현지명, 누르 산맥) 남쪽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흘러 이 두 줄기가 다시 한 곳에서 만나 여기 안디옥을 통해 지중해로 빠져나간다. 이곳 사람들은 오론테스강을 가리켜 ‘반역의 강(Asi Nehiri)’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거대한 유프라테스강의 흐름을 따라서 흐르지 않고 이를 거슬려 반대로 흘러나가기 때문이다.

수리아 안디옥의 간략한 역사

안디옥은 예로부터 지중해와 시리아, 그리고, 근동 국가의 무역 중심지로 주목을 받아왔다. 아마노스(Amanos) 산맥과 아믹(Amik) 평야 사이의 기름진 땅과 적합한 기후로 인해 좋은 환경 때문에 이웃 강대국들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아야만 했다.

이곳에 최초로 문명의 씨앗을 뿌린 사람들은 B.C. 3000년경 바빌론 문화를 영위했던 아카드 민족이다. 그 후, B.C. 2000년경에는 후리 족의 침략을 받았다. B.C. 1700년경에는 히타이트(헷 족속)가 이곳을 침략하여 B.C. 841년까지 지배했다. 이후, 아시리아인들이 이 지역을 점령했다가 B.C. 538년에 페르시아인들이 입소스 평원까지 지배하면서 페르시아 제국으로 편입되었다. 또, B.C. 300년경에는 마케도니아제국의 알렉산더 왕이 페르시아가 약해진 틈을 타 입소스 평원 전투에서 승리하면서부터 이곳에 헬라 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B.C. 323년에 알렉산더 왕이 죽자 그의 부하 장군 중 당시 바빌론 총독이던 ‘안티오코스(Seleucus Antiochus)’가 동지중해 지역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이렇게 세워진 셀레우코스 왕국은 지중해로 통하는 곳에 도시를 건설하는데, 그곳이 바로 수리아 안디옥이다.

이때부터 정식 도시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전형적인 헬라 풍으로 장식되기 시작한 안디옥은 지중해로 통하는 이점을 안고 빠르게 발전하여 동지중해의 가장 중요한 무역 항구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러나, 페르시아, 애굽 그리고 로마인들의 빈번한 침입과 BC 148년 대지진 등으로 건물 대부분이 무너지는 등 평안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 결국, 셀레우코스 왕국의 마지막 왕인 안티오코스 8세는 안디옥을 로마제국에 바치면서 B.C. 64년부터 로마제국의 통치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로마가 안디옥을 점령하면서 로마 황제들의 지시로 도시 건설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로마제국이 점령한 지역마다 늘 그랬듯이, 먼저 도시 성벽이 건설되었다. 그 뒤로 시청 건물, 원형 극장, 경기장, 체육관, 시민들의 광장인 아크로폴리스, 시장터인 아고라, 많은 신전과 온천장, 수로들이 차례로 건설되면서 B.C. 42년경에는 로마제국에서 로마,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큰 도시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발전한 안디옥은 당시 너무 아름다워서 로마인들로부터 ‘동방의 여왕’ 혹은, ‘동방의 로마’라는 별명을 받기도 했다. 초기 안디옥은 도시의 벽을 따라서 동에서 서로 큰 기둥들이 달리고 있었고, 10미터 넓이로 된 도로 바닥은 온통 호화스러운 각종 대리석으로 깔려 있었으며, 도로의 한 측면에는 두 줄로 된 지붕을 가진 복도가 약 4km나 길게 늘어져 있었다.

이렇게 안디옥은 점차 지중해 지역에서 로마 행정의 중심은 물론, 학문, 종교, 무역의 중심지로 주목받았다. 안디옥 중심부에 있는 거리와 귀족들의 집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예술 기법으로 장식되었으며, 세계의 부자들이 이곳에 몰려들어 시간을 보내는 도시가 되었다.

이 당시 이 안디옥에는 건물의 천장과 벽을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세계에서 유명한 조각가들이 여기 안디옥을 수놓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안디옥 전체가 화려한 모자이크와 대리석으로 장식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변모하였다. 이번 지진 피해가 있기 바로 전까지도 안디옥 시내에 있는 박물관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모자이크 박물관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과거의 화려함과 호화스러움을 단면적으로나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예술품과 모자이크가 장식되고 있을 때 안디옥 시민들은 종교적 분열과 정치적 분열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게다가, 두 번의 대화재와 여섯 번의 크고 작은 지진이 이 도시를 강타했으며, 이와 함께 발생한 각종 전염병은 당시 많은 안디옥 시민들을 죽게 했다. 당시 경마장에 있을 때 일어난 지진으로 안디옥의 전체 인구 75만 명 중 약 25만 명이 죽었다는 소문도 전해져 오고 있고, A.D. 71년경에 일어난 화재로 당시 도시에 있던 도서관, 각종 종교적 건물, 아름다운 귀족들의 저택을 다 태워버렸다.

이후, 로마의 트리안과 하드리아누스 황제로 이어지면서 안디옥이 재건되기 시작하여 다시 로마풍의 많은 건축물과 저택들이 세워졌으며, 당시 세계에서 가장 유명했던 다이애나 신전도 안디옥의 ‘하르비에(Harbiye)’ 지역에 세워졌는데 지진 전까지는 이곳에 9킬로 정도의 수로를 비롯한 당시의 유적이 남아 있었다.

한편, 로마가 왕권 다툼으로 정신이 없을 때, 여기 안디옥에서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예루살렘의 박해로 인해 복음을 받아들인 자 중에서 평범한 유대인들이 안디옥으로 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신을 믿던 당시의 헬라인들은 유일신을 믿는 유대교에 깊은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헬라인들의 관심과 열정으로는 유대인들의 신앙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바로 이때, 예수를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받는다는 소식은 이들에게 매우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많은 무리가 점차로 예수를 믿게 되었으나 당시 안디옥에서 발생한 여러 차례의 지진과 화재, 그리고, 열병들을 기독교인들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이곳 기독교인들은 많은 박해를 받게 되었다.

안디옥의 화려한 문명과 이방 신을 숭배하는 사상은 오직 예수만을 따르려는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당시 도시 뒤를 둘러싼 실피우스 산 중턱의 깊은 동굴로 숨어들게 하였다. 이들은 이곳에서 비밀리에 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이곳이 오늘날 세계 최초의 동굴 성만찬(The Eucharist) 교회로 알려진 베드로 교회[1]이며, 동시에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했던 그 유명한 안디옥 교회였다. 당시 기독교에 대한 로마제국의 박해가 얼마나 심했던 가는 이 실피우스 산 중턱 동굴교회로부터 여러 갈래로 난 미로와 비밀 통로들을 보면 금방 짐작할 수가 있다. 로마제국에 의해 이곳에 모였던 예수를 따르는 무리에 붙여진 이름이 바로 ‘크리스천(Christian)’이었더, 그 뜻은 ‘예수를 추종하는 무리’란 뜻으로 당시 안디옥에 살던 유대인들과는 달리 구별된 이름이 필요해서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좋은 뜻으로 불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했다고 전해지는 수리아 안디옥 실피우스 산 동굴교회. 사진: 김종일

초대 안디옥[2]은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 로마제국 당시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500킬로 북쪽에 위치하며 지중해 연안으로부터는 약 30km 떨어진 내륙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소아시아로 들어가는 입구에 시리아 북단에 있는 교통 중심지로 ‘아시아의 눈’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이는 아시아가 유럽을 보는 눈이기도 하고, 동시에 유럽이 아시아를 보려면 안디옥을 통해서만 볼 수가 있다는 데서 붙은 별명이다. 당시 안디옥은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로마제국 안에서 3대 도시 중 하나로 A.D. 40년에는 바울의 고향인 다소에서 당시 다소 총독인 마르코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만나 사랑을 속삭이며, 안디옥에서 남쪽으로 8킬로 정도 떨어진 다프네(Daphne)라는 지역에서 결혼하여 이곳 안디옥에서 신혼을 보냈다고 전해지고 있다.

교회사적으로는 바울과 바나바를 중심으로 세 차례에 걸친 세계 선교 여행이 시작된 것을 필두로 A.D. 252~300년 사이에 십여 차례에 걸쳐 교회 총회가 열렸으며, 아시아 교회의 대주교가 거하는 곳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바울의 주치의(主治醫)이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의 고향이 바로 이곳 안디옥이었으며, A.D. 373년에 성 제롬(St. Jerome)은 이곳에서 예수의 환상을 보았고, 당대 주상성자(柱上聖者; Stylites)[3]로 불리던 시몬이 이곳에서 수도원을 시작하고 이곳에 묻히기도 했다(A.D. 495). 게다가, 초대 교부 중 한 명으로 로마 원형 경기장의 불 속에서 순교 당한(A.D. 110) 안디옥 교회의 두 번째 감독인 이그나티우스(Ignatius)와 그의 제자이자 서머나교회 감독이었던 폴리갑이 모두 이곳 안디옥 출신이다.

A.D. 396년에 로마제국이 동서 로마로 양분되면서 동로마에 속하게 된 안디옥은 A.D. 638년에 아랍 무슬림들의 침임을 받기도 하였다가, 결국 동쪽으로부터 밀려오는 오스만제국을 막지 못한 채 이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A.D. 1098~1268년 사이에 십자군들이 잠깐이나마 안디옥을 탈환한 적도 있었지만, A.D. 1260년의 몽골 침입 등을 제외하고는 이때부터 줄곧 아랍 무슬림들의 지배 아래에 있었으며, A.D. 1516년 오스만제국의 야후즈 술탄 셀림(Yavuz Sultan Selim)의 이집트 원정 때 정식으로 안디옥을 오스만제국 영토 내에 포함했다.

이후, 세계 1차 대전으로 패망한 오스만제국은 1918년 무드로스 협정으로 안디옥은 프랑스 가 통치하기 시작했으며 1938년까지 시리아와 함께 프랑스의 통치를 받다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후 ‘하타이 공화국’으로 발족했으나 10개월간 지속되다가 당시 하타이 공화국 대통령과 장관들의 만장일치와 국민투표로 튀르키예 공화국으로 편입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 뒤로부터 튀르키예 공화국의 동남부의 한 도시로 통합되어 지금에 이르게 된다. 현재 이곳 주민 분포는 과거 로마제국의 식민 통치 때와 비슷하게 튀르키예 사람들을 중심으로 시리아인, 아랍인, 쿠르드인, 유대인 등 다양한 민족이 섞여 살아가면서 터키어와 아랍어가 거의 공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이슬람교가 주류를 이루면서도 아랍 시리아 정교, 아르메니안 정교, 가톨릭교 등의 순으로 자리를 잡고 있으며, 다양한 종교와 인종이 서로 종교 분쟁 없이 살아가는 유일한 지역으로 이곳 인구는 지진 발발 전까지 약 40만 명으로 기록되고 있다.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설립과정과 전개

사도행전을 보면, 당시 아람어를 쓰던 히브리파 사람들의 한계 때문에 이방인을 향한 세계 선교의 그릇들은 베드로와 요한 등의 인물에서 점차 빌립과 스데반,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 등의 인물로 교체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인물의 교체는 ‘배척’이라는 박해의 위기에서 시작되었다. 이 위기는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본토 출생의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외국 태생의 헬라 파 유대인들(디아스포라) 간에 발생한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모두가 본토 출생으로 아람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었다. 이들이 외국 태생의 헬라 파 과부들을 소홀히 대접한 데서 불평이 생겨났고, 외국 태생의 헬라 파 유대인들 가운데서 일곱 사람을 뽑아 그들의 지도자로 삼았는데, 이 중 한 사람이 스데반이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유대인들의 회당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는 헬라 파 유대인들만이 따로 모이는 회당이 두 개 정도 있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한다. 후에 바울 사도가 된 사울과 스데반이 부딪힌 곳이 바로 헬라파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이었다. 이곳에 출입했던 스데반이 회당 예배 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전파하였고, 설교를 듣고 난 사울은 스데반을 이단자로 간주하였다. 당시 율법은 이단자를 돌로 쳐 죽이도록 정하고 있었기에 사울이 앞장을 서서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스데반을 돌로 치게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울은 헬라 파 유대인들 가운데 기독교에 개종한 사람들을 색출하여 말살시키기 위해서 이웃 나라에까지 갔다가 다메섹의 길에서 예수를 만나 거꾸러졌고, 후에는 바울로 이름을 바꾸어 기독교 역사에 가장 훌륭한 선교사가 된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박해받아 외국으로 흩어진 기독교인들은 한결같이 외국 태생의 헬라파 유대인들이었다. 사도행전 11장 19~21절을 보면, “스데반에게 가해진 박해로 흩어진 사람들이 베니게(레바논)와 구브로(싸이프러스)와 안디옥(안타캬)까지 가서 처음에는 유대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하였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는 구브로 사람과 구레네(리비아) 사람 몇이 있었는데, 그들은 안디옥에 이르러서 헬라인들에게도 말을 붙여서 주 예수를 전하였다. 주께서 그들을 돌보시니, 믿게 된 수많은 사람이 주께로 돌아왔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사도행전 8장 1~6절을 보면,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당한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날에 예루살렘교회가 크게 박해받기 시작하여, 사도들 이외에는 모두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그를 생각하여 몹시 통곡하였다. 그런데,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이 찾아 들어가서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끌어내서 감옥에 넘겼다. 그러나, 흩어진 사람들은 두루 돌아다니면서 말씀을 전하였다. 빌립은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무리는 빌립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가 하는 기적을 보기도 하는 가운데서, 한 마음으로 빌립이 하는 말을 좇았다.”라고 적고 있다. 헬라어를 사용할 줄 알면서 외국에서 태어난 유대인들이 흩어지면서 복음을 전하게 되니 위기가 변하여 기회가 되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빌립이 유대인들이 멸시하고 깔보는 절반쯤은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내려가 복음을 전하니 사마리아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탄생한다.

또, 바울 일행은 외국의 선교지에서 같은 민족인 헬라파 유대인들로부터 심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생명까지도 위협을 당하였지만, 유대인들의 박해를 피하여 다른 도시로 피신할 때마다 그곳 도시들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유대지방에 교회를 세우는 데는 제자들과 같이 아람어를 사용하는 본토 출생의 유대인들을 들어 쓰셨지만, 안디옥과 같이 해외에 교회를 세우는 데에는 헬라어를 사용하는 외국 태생의 헬라파 유대인들을 들어 쓰셨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을 살펴보면, 예루살렘과 유대 지방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들어 쓰셨지만, 사마리아 지방에서는 빌립을 들어 쓰셨고, 해외선교는 바울과 바나바 등을 들어 쓰셨다.

그 이유는 첫째로, 해외선교는 무엇보다도 선교지역의 문화와 언어에 익숙한 사람이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빌립, 스데반, 바나바, 바울, 실라 등은 그 당시 상황으로 보면 이미 세계화가 이루어진 사람들이었다. 많은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이방 문화에 익숙했고, 무엇보다도 헬라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베드로와 야고보처럼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아람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본토 출생의 유대인들은 배움도 짧을 뿐 아니라, 배타적이고 민족주의적이며, 무엇보다도 헬라어를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그릇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이천 년 전의 로마제국 시대는 지중해 연안의 모든 국가가 로마제국에 속해 있었고, 알렉산더 왕 시절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도로와 항만이 있었고, 무역과 여행이 자유로웠다.

유대인들은 자의든 타의든 외국에 나가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이들을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고 말한다. 이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회당을 건립하여 예배당과 학교와 민족회관으로 쓰고 있었는데, 당시 많은 이방인이 유대교에 개종하여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할례받지 아니한 문의 개종자들(proselytes of the gate)이었는데, 사도행전은 이들을 일컬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God-fearer)”이라고 표현했다.

바울은 어느 도시에서나 유대인 회당을 찾아 들어가 전도했는데, 일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복음을 받아들여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개종자 대부분은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던 이들에 의해서 기독교 선교가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결국, 기독교는 처음에 하나님을 아는 유대인들로부터 시작되어, 팔레스타인 거주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전파되었고, 이들을 통해서 외국에 거주하는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전파되었으며, 이들 헬라파 유대인들에 의해서 다시 기독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에 의해서 완전 불신자들인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파되었다.

성령 하나님은 헬라파 유대인들을 통해 안디옥 교회를 세우시고 이방 선교의 전진기지로 삼으셨다. 안디옥 교회가 다른 지역들에 선교사를 보내게 된 것은 그들이 금식하며 기도할 때 성령께서 명령하신 일이었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지시에 따라 바울과 바나바와 마가를 택하여 선교사로 보낼 때도 금식하며 기도하고 안수하였다. 이들 헬라파 유대인들의 선교활동으로 인해서 선교지에는 많은 이방인 교회가 세워졌고, 그들의 선교로 복음의 씨앗은 문화가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거침없이 뿌리를 내렸다.

2천만에 이슬람 땅에 세워진 개신 교회당

2000년 6월 29일, 튀르키예의 남동쪽에 ‘안타캬(ANTAKYA)’라는 조그마한 지역에 이 땅의 이슬람권 선교 역사에 남을 만한 중요한 행사가 하나 있었다. 수년 전부터 서울의 광림교회에서 금식과 기도로 준비해 온 결실이 맺어진 것이었다. 바로, 이슬람화가 되어버린 그 땅에 세계 최초로 안디옥 개신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현 튀르키예 동남부 하타이주, ‘안타캬’시내에 세워진 안디옥 개신교회. 사진: 김종일.

새 안디옥 개신교회의 선교적 역할과 책임

초대 안디옥 교회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하나님께서 지도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전 안디옥의 교인들과 파송 받은 선교사들이 확실히 인식했다는 것이다. 안디옥 교회에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신 분도, 그들을 보내신 분도, 그들을 이곳저곳으로 이끄신 분도, 그들의 말씀 전파에 능력을 주어서 회심자들이 생겨나고 교회가 설립되게 해 주신 분도 성령님이셨다. 보내는 교회는 하나님의 은총에 힘입어 그들에게 선교 사업을 위탁하였으며(행 14:26), 그들이 돌아와서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행 14:27)을 보고했다.

이제 세계 최초로 세계 이방 선교를 시작했던 초대 안디옥 지역에 다시 새롭게 개신 교회가 설립되었다. 특히, 무슬림 인구가 거의 전부이고, 이슬람권 선교를 위한 핵심 지역으로 알려진 튀르키예 땅에 안디옥 개신교회의 설립으로 그 땅의 이슬람교권 선교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면서 책임과 사명을 감당해 나가기를 기도한다.


[1] 이 초대 안디옥 교인들이 동굴 속에서 모임을 하던 장소의 이름을 오늘날 베드로 교회라고 붙인 것에 대해 조금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갈라디아서 2장에서 안디옥에 베드로가 자주 방문해서 이곳의 성도들을 돌보았다는 기록이 있다(11절). 또한, 예루살렘에 대박해가 시작되고 A.D. 70년부터는 유대인 자체를 아예 팔레스타인 땅에서 쫓아내 버리게 되자, 성도들도 속속 이스라엘 땅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정을 통해 볼 때 베드로가 안디옥의 집회를 이끌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A.D. 11세기 초(A.D. 1098~1268)에 안디옥을 잠깐 점령했던 십자군들이 이 동굴교회를 발견하게 되었고, 천국열쇠와 두루마리 성서를 안고 있는 베드로 사도의 동상을 만들어 세워 놓았으며 현재 실피우스 산속 동굴교회의 앞부분도 당시 유럽에서 성행하던 고딕양식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동굴 내의 모임 장소에는 십자군 점령 당시에 베드로 상과 함께 세워진 것으로 짐작되는 제단이 있고 그 뒤쪽으로는 약 1.4킬로 정도의 긴 터널이 나 있는데, 이는 기독교 박해 당시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피신하던 비상구로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동굴교회 안에는 A.D. 4~5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는 모자이크 조각이 보이고, 동굴교회 정면은 1863년에 새로 보수되었다. 지금도 안디옥에서는 매년 6월 29일이 되면 시리아 정교회와 가톨릭교회에서 바울과 베드로를 기념하는 축하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고 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베드로가 안디옥의 초대 감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2] 초대 교회 당시 안디옥이라는 이름은 여러 개 존재하고 있었다. 수리아 안디옥 이외에도 우리가 잘 아는 또 다른 안디옥은 바울의 1차 선교 여행 시 들렸던 곳 중 한 곳이 소아시아 내륙에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이다(행 13장). 이 외에도 안디옥이라는 이름의 도시가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 중 한 명인 셀레우코스에 의해 세워진 셀레우코스 왕국에 의해 당시 지중해 연안에 무려 14개나 더 세워졌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수리아 안디옥으로 알려진 원래 안디옥만이 튀르키예의 안타키아(Antakya)라는 이름의 도시로 존재하고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파괴되고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3] 기둥의 꼭대기로 올라가 그곳에서의 고행 생활을 통해 수도를 했던 중세의 한 수도원 운동의 한 형태로 시몬으로부터 주상성자(Stylites)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지금도 튀르키예 아나톨리아 반도 중앙에 있는 갑바도기아 지역에 가면 주상성자들이 대단위로 수도원 운동을 했던 곳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복음기도신문]

김종일 | 장신대 신대원 졸업, 前 중동선교회(MET) 본부장, 現 FOT 선교회 대표. 국내 이슬람권 선교사 네트워크 회장, 저널 ‘전방개척선교(KJFM)’ 편집인, 아신대학교(ACTS) 중동연구원 교수. 저서: ‘밖에서 본 이슬람, 무슬림 이해하기’(20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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