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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일 칼럼] ISIS사태, 이슬람 종파전쟁에서 정치전쟁으로

▲ ‘IS’ 사태가 발생한 중동 아랍지역(출처 픽사베이)

밖에서 보는 이슬람(47)

아랍어 타아슬룸

최근, 아랍 세계에서 새로 등장한 신조어로, ‘타아슬룸(ta’aslum)’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슬람’이 아니면서 ‘이슬람’이라고 칭하는 것을 말한다. ‘타아슬룸’의 능동 분사형은 ‘무타아슬림’이라고 하는데, ‘무타아슬림’은 자신은 ‘무슬림’이라고 말하는데 자신이 말하는 것과 반대로 행동하는 위선자이며, 이슬람이 명령하는 것을 어긴 자를 말한다. 예를 들면, 하루 다섯 번 기도하면서 도둑질하는 무슬림이다. 그러므로, 이 ‘타아슬룸’과 ‘무타아슬림’이라는 말은 현 ‘IS’ 조직원들 같은 극단주의 이슬람 세력에게 붙여질 수 있는 말이다.[1]

‘ISIS’ 사태의 시작

최근까지 중동을 중심으로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갔던 ‘ISIS(아이시스)’ 사태를 간단히 보면, 강성 ‘수니’ 원리주의 무슬림들에 의한 무자비한 ‘카피르’ 처형식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중동의 종파갈등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2014년 6월 어느 날 자기들을 ‘이라크와 시리아의 이슬람국가(ISIS)’라고 밝히면서 이라크 지역을 점령한 일종의 테러 사건 정도로 인식될 수도 있다.

그러나, 금세 제압될 것으로 여겼던 이들은 당시 이라크의 제2의 도시인 ‘모술’을 점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티크리트’와 ‘바이지’ 등 이라크 북부의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라크와 시리아의 이슬람국가’(ISIS)라는 이름에서 ‘이슬람국가’(IS)로 자기들의 명칭을 변경하면서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니(2019년 사망)’를 자기들의 ‘칼리프’로 선언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때 이르러서야 비로소, 전 세계는 중동의 ‘ISIS’ 사태는 단순히 무명의 한 테러 집단에 의해 발생한 일시적 사건이 아니라, 중동 역사와 판도를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는 매우 심각한 사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중동에서 시작된 ‘ISIS’ 사태는 수많은 중동의 해묵은 문제가 복합적으로 뒤얽힌 금세기 최대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중동과 서구의 모든 국가가 공동으로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는 어려운 상황에서 그 해결점을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대기 시작하였다.

종교적 관점으로 본 ‘ISIS’

‘ISIS’ 사태를 보는 종교적 관점은 이슬람 ‘수니’ 보수 무슬림들에 의한 ‘카피르’ 개념과 연결해서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 이들이 가지고 있는 궁극적 목적이다. 이들은 ‘칼리프’ 제도의 부활을 선언하면서 자기들의 지도자를 ‘칼리프’로 소개하며 민족과 인종을 초월한 모든 무슬림 공동체, 칼리프 국가의 재건을 목적으로 한다.

물론 ‘칼리프’ 선언이 있었다고 해서 전 이슬람 세계에 의해 이를 인정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저들의 숨은 의도는 바로 자기들이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들로서 그 정통성을 가지고 있음을 만방에 알리면서 최소한 전 세계 ‘수니’ 무슬림의 동조와 인정을 받으려는 강한 의지의 발로였다.

둘째, 이들이 내세우는 ‘검은색’의 상징적 의미이다. 당시 이들은 검은 깃발, 검은 복장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는데 이는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당시 메카를 정복(AD 630)했을 때 이와 비슷한 검은 터번을 두르고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아마도 이에 대한 정통성을 상징적으로 보이려는 의도로 보인다.

셋째, 국제 이슬람 ‘지하드’ 운동 경향이다. 이들은 국지적인 다른 이슬람 ‘지하드’ 단체들과는 달리, 전 세계적으로 용병을 모으는 등 국제적 운동 성향을 보였다. 이는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그들의 입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자리 굳히기 전략 정도로 볼 수 있다.

넷째, 영토 확보의 강한 의지이다. 이제까지 알려진 다른 테러 단체들은 주로 지하비밀조직으로서 단발적 테러 공격으로 심리적으로 압박 주기에 그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ISIS’는 특정 국가의 지역을 아예 광범위하게 점령하면서 결국 그 지역에 이슬람교를 표방하는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게 비쳤다.

다섯째, ‘두려움’과 ‘공포’라는 심리전 전략의 사용이다. 이슬람 무장 단체 대부분은 ‘신’의 이름으로 ‘지하드’의 명분을 가지고 정적들을 처단하는 모습 속에서 ‘ISIS’도 그 예외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좀 더 특별한 부분은 ‘참수’ 같은 공개처형 방식과 총을 가지고 수많은 ‘카피르’들을 무자비하고 처참하게 살해하는 모습들을 일부로 미디어를 통해 공개하면서 극도의 ‘공포감’을 유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하나는 이들의 잔인한 공포의 처형방식을 통해 서방세계의 중동진입을 막아보겠다는 생각이다. 또 다른 하나는, 반대로 이런 ‘공포’라는 그들의 전략으로 서방세계를 자극하여 보복과 응징의 이유로 자기들의 전쟁에 합류시키려는 생각이다.

이 두 추측 중 만약 전자가 맞는다면, ‘ISIS’는 그 땅에서 더 큰 입지를 굳히면서 자기들의 영역을 넓혀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후자가 맞는다면, ‘ISIS’는 서방과 중동의 연합군들에 의해 가까운 시일에 밀려 나갈 것이다.

물론, 후자조차도 ‘ISIS’의 치밀한 심리전 중 하나일 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 후자의 생각대로 서방이 중동으로 진압을 위해 들어오면 ‘카피르’로 대변되는 서구 기독교 세계의 진입을 빌미로 전 세계 무슬림의 반감을 자극하며 봉기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자동으로 ‘IS’의 종교적 리더십에 그 힘이 실려지기 때문에 그들 측면에서는 사실 그렇게 나쁜 전략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극도의 공포 심리전으로 어떤 결과가 도출되어도 상관없이 저들은 그 땅에서의 입지를 넓혀나가는 데 큰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이슬람 교의를 스스로 어기는 모순적인 행위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이슬람의 정당한 처벌방식이라고 주장하는 ‘참수’에 대한 모순적 행태를 보였다. 참고로, ‘참수’라는 형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존재했으며 그 대상은 언제나 대역 죄인에 한정된 극단적 형벌이었다.

꾸란 ‘무함마드’장 4절[2]과 ‘안팔’장 12절[3]에서 언급이 된 ‘참수’ 처형은 전쟁 중에 ‘알라’를 거부하는 자 즉, ‘카피르’들에 한해서만 허용된 법이다. 그러므로, 이슬람교 안에서도 이 ‘참수’ 개념이 잘못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슬람 신학자 대부분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러나, ‘IS’에 의해 자행된 끔찍한 ‘참수’ 희생자들 대부분이 꾸란 구절처럼 전쟁 중에 ‘신’을 거부한 것이 아니므로 이슬람법과 전통을 따른다고 주장하는 자기들 스스로가 이슬람법을 따르지 않는 오류와 모순을 범한 것으로 봐야 한다.

정치적 관점으로 본 ‘ISIS’

‘ISIS’ 사태를 이해하는 정치적 관점은 종교적 관점만큼이나 복잡하게 얽혀있는데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첫째로, 2003년 미국의 공격으로 이라크 내에서의 ‘수니’ 무슬림들의 몰락을 최근 ‘ISIS’ 사태와 연결 지을 수 있다. 당시 미국의 이라크 공격으로 중동 ‘수니’ 무슬림들의 맹주를 자처해 오던 ‘사담 후세인’이 제거되었다. 이후 이라크에서는 소수의 ‘수니’ 무슬림들에서 다수의 ‘시아’ 무슬림들로의 정권교체가 진행되었다. 이제 이라크 땅에는 1979년부터 24년간을 집권했던 ‘수니’ 무슬림들이 서야 할 자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정치적 보복의 두려움으로 그 땅에 남아 있던 소수의 ‘수니’ 무슬림들은 모두 그 땅을 떠나야만 했는데 바로 이들이 후에 ‘IS’ 세력에 합류한다. 그러므로, 미국에 의해 ‘사담’ 정권이 해체되지 않았더라면 ‘IS’ 출현은 없었을 것이라고 봐야 한다.

둘째로, 2010년경부터 중동에서 시작된 아랍 민주화 항쟁으로 당시 중동 국가가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여념이 없을 때 어부지리 격으로 ‘ISIS’가 준비되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2010년에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에서 시작되었던 소위 ‘아랍의 봄’ 혹은 ‘재스민 혁명’[4]은 전 중동에 뜨거운 민주화 바람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러나 전 중동이 이런 민주화 운동으로 독재정권들이 하나씩 쓰러지고 있을 때 특이하게도 중동 ‘레반트’[5] 지역의 ‘시리아’에서는 유일하게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에 제동이 걸려 결국 오늘날까지 끝날 조짐 없이 진행되어 오고 있다.

여기에서 중동의 많은 국가가 당시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 커다란 정체성의 변화를 맞이하였음에도 시리아에서 민주화 운동이 실패한 원인을 살펴본다는 것은 당시의 중동 정세 이해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여기에는 대체로 세 가지로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아랍 민주화 운동의 성공에는 정부군이 시민군에 합세한 것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시리아에서는 반대로 잘 훈련되고 충성스러운 정부군의 강한 방어벽에 오합지졸의 시리아 시민군이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다음은 이슬람 ‘수니’와 ‘시아’ 종파의 갈등 구조가 당시 시리아 상황에서 역력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즉, ‘수니’ 무슬림들로 이루어진 시리아 시민군은 시리아 아사드 정부군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시아’ 국가도 상대해야 했다. 다시 말하면, ‘레반트’ 지역에 형성된 ‘시아’ 국가(시리아, 이란, 이후의 이라크)의 합동 방어막을 뚫을 수 없었다는 것이 장기전 돌입의 핵심적 이유로 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시리아를 위한 당시 러시아의 적극적 개입이 그 마지막 이유이다. 당시까지 시리아는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중동 거점지역이어서 수많은 러시아의 무기가 판매된 국가이다. 그래서, 러시아는 시리아 안에서 보이지 않는 실질적 힘으로 작용해 왔다. 그로 인해서 러시아로서는 ‘수니’ 무슬림들로 이루어진 시리아 시민군과 다른 ‘수니’ 국가 그리고, 서방의 합동 공격으로 시리아 아사드 정부가 무너지는 것을 절대 방관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당시 시리아 사태는 ‘시아’ 무슬림들을 감싸는 러시아와 울며겨자먹기식으로 러시아의 견제를 위해서라도 ‘수니’ 무슬림들 쪽에 섰던 미국의 충돌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지역에서 ‘시아’ 무슬림들 편에 섰던 러시아 견제를 위해 무조건 반대편에 섰던 미국이 마치 ‘수니’ 무슬림들과 ‘ISIS’를 감싸는 것으로 오해되기가 십상이라는 것이다. 그로 인해, 당시 ‘ISIS’의 잔인성과 공포정책을 극도로 혐오했던 미국의 입지가 난처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는 일이다.

셋째로 정치적 관점에서 보는 ‘ISIS’의 특징은 현대 서방국가를 향한 ‘아랍민족주의’[6]의 재등장이라는 관점에서 ‘ISIS’ 사태를 바라볼 수 있다. 여기에서 짧게나마 중동에서 발생한 이슬람 테러의 원인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이유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잘 알려진 전형적인 발발의 이유 외에도 은밀하고도 비밀스러운 두 가지가 더 있었다. 하나는 당시 서구 열강은 자국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저렴한 원자재’ 구매가 너무 절실했으며, 다른 하나는 그 원자재를 수입해 만들어진 상품의 판매시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와중 중동에서 원유가 나오게 되었고, 서구 열강은 위와 같은 은밀한 두 조건의 실현을 위해 세계대전의 승전국 자격을 가지고 오스만제국의 땅이었던 중동을 ‘분할 통치(Divide and Rule)’ 정책으로 분리한다. 이때, 프랑스는 레바논, 시리아와 이라크의 모술 지역을, 영국은 이라크와 요르단 지역을 각각 차지한다. 이것이 바로 1916년 5월에 있었던 영국의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의 ‘조르주 피코’에 의해 비밀리에 체결된 ‘사이크스 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이다.

여기에서 프랑스는 과거부터 맺어온 종교와 무역의 연계 때문에 레바논과 시리아에 남아 있기를 원했으며, 영국은 수에즈 운하와 페르시아만에 있는 그들의 유전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이때, 영국은 아랍 국가와 맺은 ‘후세인-맥마흔 서신’[7]을 통한 약속을 파기하고서라도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당시 아랍의 독립은 자연히 유보될 수밖에 없었으며 아랍인들은 또다시 배반의 쓰라린 아픔을 견뎌내야 했다.

결국, 당시 이러한 서구열강들의 책상 위에 앉아 자로 줄긋기로 나뉘었던 지역이 지금 대부분의 중동 국가라는 것에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분개할 수밖에 없었다. ‘ISIS’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 미국으로 대변되는 서방국가를 향해 아랍 민족주의 감정을 새롭게 불러일으키면서 중동에서의 리더십 확보를 꾀하려는 전략을 펼친 집단이었다.

결국 이슬람 종파 전쟁을 빙자한 현실 추구의 정치전쟁

‘ISIS’ 사태는 종교적으로는 과거 역사를 통해 내려온 전형적인 종파갈등이 중동 지역에서 폭발한 것으로 보이면서도, 정치적으로는 미국과 러시아를 위시한 서방국가들을 배경에 두고 세계 평화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그러나, 결국은 또 다른 이름의 같은 자원전쟁 내지는 또다시 반복되는 열강들의 각축전처럼 보인다.

당시, ‘ISIS’가 자기의 입지를 굳혀 나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은 그 지역에서 정당성을 인정받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서 지역주민의 민심을 얻어나가는 일과 전쟁에서의 자금 라인을 계속해서 확보해 나가는 일이었다. 물론, 동전의 양면처럼, 반대로 그 땅에서 ‘IS’를 몰아내기 위한 중요한 전략이 되었다.

결국, ‘ISIS’ 사태는 이슬람 종파 전쟁을 빙자한 현실 추구의 정치전쟁이었다. 왜냐하면, 이미 19세기 서구열강의 각축전, 20세기 중동전과 걸프전 등에서 나타난 국제 열강이 보여준 자국의 이익과 실리 추구의 외교전을 잘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기도신문]


[1] 공일주, ‘이슬람과 IS’, p.15, 85, 2015, 기독교문서선교회.

[2] 꾸란 ‘무함마드’장(47) 4절, “너희가 전쟁에서 불신자를 만났을 때 그들의 목들을 때리라…(중략)”. 

[3] 꾸란 ‘안팔’장 12절, “(중략) 내가 불신자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리니 그들의 목을 때리고….”.

[4] 2010~2011년 독재 정권에 반대해 전국적 시위로 확산한 튀니지의 민중혁명으로, 튀니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 이름을 따 서방 언론이 붙인 명칭이다. 시위의 발단은 2010년 12월 남동부 지방 도시인 ‘시디 부지드’ 거리에서 무허가 노점상을 하던 한 청년의 죽음에서 시작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을 못해 노점상을 하던 20대 청년이 경찰의 단속에 항의하면서 분신자살을 시도했다. 이러한 사연은 청년층의 분노를 촉발했다. 여기에다가 극심한 생활고와 장기 집권으로 인한 억압통치, 집권층의 부정부패 등 현 정권에 대한 불만이 쌓여 있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독재 타도를 외치며 전국적인 민주화 시위로 확산했다. 결국, ‘지네 엘아비디네 벤 알리’ 당시 튀니지 대통령은 2011년 1월 14일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다. 2010년 말에 시작된 튀니지 혁명은 아프리카 및 아랍권에서 쿠데타가 아닌 민중봉기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첫 사례가 되었다. 또한, 인근의 이집트를 비롯한 알제리, 예멘,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 쿠웨이트 등 독재 정권에 시달리던 아랍 국가로 민주 시위가 점차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5] 그리스, 시리아, 이집트를 포함하는 동부 지중해 연안 지역의 역사적인 지명. 좁은 뜻으로는 이슬람교도가 살아가는 지중해 동쪽의 이슬람교 국가를 가리키기도 함.

[6] ‘아랍민족주의’(Arab Nationalism)라 함은 19세기 말 오스만제국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었던 아랍지역에 등장한 한 정치 사조로 아랍인들이 단일한 정치적 공동체를 구성하고 하나의 정부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아랍인의 통합을 주창한다는 점에서 범 아랍주의(Pan-Arabism)와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랍 민족의 통합뿐만 아니라 각각의 아랍 국가의 독립, 국민 통합, 중동에 대한 서구의 개입 차단 등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아랍 세계의 통합을 주창하는 범 아랍주의와는 다른 성향을 보인다(두산백과).

[7] 후세인-맥마흔 서한은 영국의 이집트 주재 고등 판무관 ‘헨리 맥마흔’이 아랍의 정치 지도자 ‘후세인 빈 알리’에게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1월부터 1916년 3월까지 10차례에 걸쳐서 전달한 전시 외교정책에 관련한 서한이다. 오스만제국의 영토인 팔레스타인에 아랍인들의 국가를 세우는 것을 지지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 후 1916년 맺어진 ‘사이크스 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과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의 국가를 세우는데 지지한다는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 1917)은 ‘맥마흔 선언’(McMahon Declaration)과 모순되는 내용이었다. 이와 같은 영국의 모순된 외교정책은 후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초래하였으며 현재까지도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한 채 계속되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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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일 | 장신대 신대원 졸업, 前 중동선교회(MET) 본부장, 現 FOT 선교회 대표. 국내 이슬람권 선교사 네트워크 회장, 저널 ‘전방개척선교(KJFM)’ 편집인, 아신대학교(ACTS) 중동연구원 교수. 저서: ‘밖에서 본 이슬람, 무슬림 이해하기’(20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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