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19세기를 복음의 빛으로 물들인 하나님의 일꾼

19세기, 기독교 선교의 위대한 세기의 복판에서 미국과 영국에 강력한 복음의 영향력을 미쳤던 한 사람, D.L. 무디. 그를 통해 헤아릴수 없는 사람들이 복음의 빛으로 나아왔고, 그를 통해 20세기의 선교가 힘 있게 이어졌다. 그는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으며, 아무런자격증도 없었다. 때로 사람들의 비난이 쏟아질 때면, “나는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라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편집자>

“제가 섬기는 주일학교에서 무디를 처음 봤을 때, 그 심령이 그렇게 어두워 보일 수 없었습니다. 무디는 복음의 진리에 굳게 선 그리스도인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였습니다.”

이것은 주일학교 교사였던 킴볼(Edward Kimball)의 무디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그는 청교도 신앙을 이어온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18세에 거듭나기까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어두움 가운데 있었다. 건축 노동일을 하던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난 이후, 찌든 가난 속에서 무디는 오직 부자가 되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해 무디는 무작정 집을 나와 보스턴에 있는 외삼촌의 구둣가게에서 일했다. 외삼촌은 무디를 받아주는 대가로 주일예배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예배, 신앙, 영적인 것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무디에게 의무감으로 참석하는 예배시간은 괴로움 그 차제였다. 그는 언제나 설교자로부터 가장 먼 구석에서 졸면서 시간을 때웠다.

킴볼 선생은 이러한 무디의 불신앙적 태도가 늘 마음에 걸렸다. 무디의 영혼 구원을 위해 간절한 기도를 드리던 어느 날, 킴볼 선생은 무디가 일하는 구둣가게에 찾아와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한다면 이렇게 가난하고 힘든 환경만을 주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무디는 킴볼 선생의 진심어린 전도를 통해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놓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진정 믿게 되었다. 그는 진실한 회개로 거듭났고, 빛 가운데 거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사함 받은 날 아침, 밖으로 나가 만물을 보았습니다. 태양이 그토록 사랑스럽게 보인 적은 없었습니다. 지저귀는 새소리도 내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모든 것이 달라진 것입니다.”

이전에 ‘부자가 되겠다’는 무디의 소원은 ‘영혼을 구하는 일을 위해서만 돈을 벌겠다’는 열정으로 바뀌었다. 1년 후, 무디는 급격하게 경제가 성장하고 있던 시카고의 한 제화점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학생 수가 12명뿐이었던 ‘어린이 선교회’에서 영혼들을 섬기기 시작했다. 그는 시카고의 빈민촌과 길거리를 다니며 만나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성경의 이야기들을 재미있고 실감나게 전했고, 아이들은 선교회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열정적으로 살았던 무디는 곧 시카고 최고의 구두회사에서 일하게 되고 돈도 많이 벌게 되면서 성공한 사업가로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꿈도 함께 커져갔다. 그러나 구두회사 사장 헨더슨씨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통해 무디의 마음은 더욱 본질적인 것, 영원한 것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그는 남편의 유언에 따라 모든 재산과 사업의 경영권을 맡아달라는 헨더슨 부인의 요청을 거절한다.

1859년의 어느 날, 무디에게 어린이 선교회 교사 히버트가 찾아왔다. 그는 폐출혈 증세가 심화되어 뉴욕으로 치료를 받으러 가야할 상황이었다. 죽음의 그늘이 얼굴에 짙게 드리운 채로 그는 무디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했다.

“저희 반 아이 중에 성경공부를 심하게 방해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이 아이의 변화를 위해 무디씨가 지금 나와 동행해 주신다면 그 아이 집을 집적 방문해 볼 참입니다” 그 아이를 찾아 간 히버트는 그 아이를 간곡하게 타이르며 복음을 전했고, 마침내 그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잘못을 회개했다. 무디는 심각한 병세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구원을 향한 열정으로 불타올랐던 한 교사의 헌신을 통해서 큰 도전과 충격을 받았다.

“나는 지금까지 무얼 했는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서 내가 지금까지 애쓴 것은 아이들의 머리 숫자를 세는 일 뿐이었다!” 무디는 가슴을 찢으며 회개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사업가로서의 꿈을 완전히 포기하고 하나님의 사역에 전적으로 헌신하게된다. 그리고 그는 하루에 한 명 이상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잠을 자지 않겠다고 결단하고 실천에 옮겼다.

이후 무디는 거처를 선교회 사무실로 옮기고 잠은 의자에서 자고, 식사는 크래커와 치즈와 우유 한잔으로 때웠다. 자신에게는 엄격했지만, 영혼 구원하는 일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심방하며 한 영혼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애썼으며, 틈만 나면 불량배들의 소굴, 부두노동자, 대합실의 행려객, 감옥의 죄수들, 실업자, 병원의 환자들 가리지 않고 전도에 열을 올렸다. 사람들이 그를 ‘미치광이 무디’라고 부를 정도로 그는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술집을 개조하여 만든 그의 설교 장소에는, 주로 빈민층의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1864년에는 그곳에 일리노이 스트리트 교회(Illinois Street Church)가 세워졌다. 무디는 자연스럽게 그 교회의 설교자로 세워졌다. 이 교회에서 무디는 교인들을 모두 전도자로 훈련시켰다. 수천 권의 성서, 쪽복음, 전도지가 온 지역으로 배포되었고, 인근 지역까지 전도운동이 퍼졌다. 그는 매일 밤 한 두 개의 거리집회를 열었고 기도회, 야외집회, 천막집회 등을 그치지 않고 부흥회를 열었다.

1861년 미국에 남북전쟁이 발발했을 때 무디는 기독청년회 간부로 군대 전도를 하기 시작해, 군인 교회에서만 1500여 차례의 집회를 가졌다. 또한 군에 입대한 청년들의 신앙을 위해 ‘형제의 띠’라는 공동체가 결성돼 군부대 안에 복음이 확산되도록했다.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난 후, 무디는 각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젊은 집사들에게 주일학교를 하라고 권유했다. 하여 수많은 주일학교가 설립되었고, 짧은 기간에 놀랄만한 성장이 있었다.

그는 생애의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쉬지 않았다. 1899년 11월 미주리주 캔자스 시에서 무디는 그의 마지막 집회를 인도했다. 전도집회 중 재발한 심장병으로 인해 쓰러져 집으로 돌아와, 1899년 12월 22일 62세의 나이로 마지막 다음의 말을 남기고 주님 품에 안겼다.’

“나는 승리하고야 말았다. 오늘은 내가 면류관을 쓰는 날이야! 나는 수년 동안 그 면류관을 쓰기를 고대하고 있었지.”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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