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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그리스도인의 상투적인 말(2): 예수님을 영접하세요

사진: Aaron Burden on Unsplash

누구도 백악관에 자신을 초대해서 링컨실(백악관의 방 이름_역자주)에서 하룻밤을 잘 수 없고, 여왕과 차를 마시기 위해 자신을 버킹햄궁에 초대할 수는 없다. 아무리 동기가 진실하고 강력히 원한다고 해도 아예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이 거부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놀라지 않는다. 한 나라의 왕이나 국가의 원수 정도면 특정한 보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러한 경계선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과 그의 나라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이 자신들이 원하면 된다고 가정한다. “예수님을 영접하세요”나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합니다”와 같은 표현은 구원의 역할을 뒤집어 버리는 사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사상은 교회에 널리 번져 있다. 오늘날 이러한 표현은 기독교 상용구 중 가장 유행하는 것이며 영접 초대의(집회 후 예수님을 영접할 사람들을 앞쪽으로 초대하는 순서) 시대를 초래하고 있다.

필자도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고 있을 때, 이러한 표현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 의미에 대해서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표현이 성경적으로 보였고 예수님이 하신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의 말씀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의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예수님은 자신을 거절한 사람들에게 외면 당하여 문 밖에 서있는 사람이 아니다. 폴 워셔의 말처럼, ‘만일 예수님이 문을 부숴버리려고 한다면 부숴 버릴 것이다.’ 아울러, 그 문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메시지를 전달받은 특정한 교회를 가리킨다. 존 맥아더도 그렇게 지적하고 있다:

‘이 구절이 셀 수 없이 많은 전도지와 전도 메시지에서 죄인의 마음을 예수님이 두드리는 것처럼 인용되어 왔지만, 그보다 더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가 두드리는 문은 어떤 개인의 마음의 문이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이 타락한 교회의 밖에 서서 들어오시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는 오직 그들이 회개함으로만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했고 심판의 밤이 찾아오기 전, 영원히 너무 늦기 전에 그들과 교제하시길 원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당신의 영혼의 문턱에서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당신을 초대하기 위해서 기다리거나 그 초대를 받아들이기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성경의 언어는 일종의 강박감을 불러 일으키는 표현이다. 바울도 “(하나님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 17:30)라고 선포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했을 때, 그들 메시지의 마지막은 회개할 것을 강하게 명함으로 끝냈다(행 2:38; 3:19).

끝으로, 예수님이 믿는 사람 안에 거하시겠다고 약속한 것이 사실이지만(요 15:4), 동시에 그렇게 되기 위해선 철저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 믿지 않는 마음은 신령한 일에 대해서 죽어 있고 강퍅하고 냉담하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사람 안에 거하기 위해선, 주님이 그의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셔야 한다(겔 36:26).

이러한 점들을 생각해보면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분명 복음과 상반된 것이다. 또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새로운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하는 것이다.

누가 영접해야 하는가?

요즘 전도자들은 “예수님을 당신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라”는 상투적인 말을 사용하는데 이 또한 안타깝게도 매우 잘못된 말이다. 잠깐만 생각해 보아도 이 말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심판 날 천국으로 영접을 받아야 하는 쪽은 우리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재판장의 자리에 앉아서 피고석에 서 있는 그리스도를 심판한다는 위험한 가정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영접된다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우리의 전도 용어는 그리스도 앞에 우리의 올바른 위치가 어디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누가 누구를 영접하는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복음 7:21-23)

당신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과 그리스도가 당신을 영접하는 것은 중대하고 영원한 차이가 있다. 나는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아주 훌륭한 신학자였다고 자주 주장해 왔다. 왜냐하면 그는 누가 누구의 영접이 필요한지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상용구를 사용해 왔을 것이다. 무슨 이유로 이런 말을 했던 간에 기독교인들이 만든 간소화된 이러한 표어들이 바로 성경의 진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예수를 주로 삼는다?

오늘날의 전도는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세요”, 또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세요”라는 상용구를 자주 사용한다. 안타깝게도 내가 처음 예수님을 초대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기” 전에 그분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한 번도 질문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점에 대해서 매우 명확하다.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은 어느 누가 그 타이틀을 그분에게 주기 원하고 원치 않고에 달려 있었던 적이 없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그리고 당신의 의견과 상관없이 이 영원한 진리는 전혀 바뀌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인, 무신론자, 그리고 우주 모든 피조물의 주님이시다. 그들이 주님께 무릎 꿇고 회개를 하든지, 지옥불에서 영원히 후회하며 불 속의 고통을 당하든지 상관없는 일이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립보서 2:8-11)

바울에 의하면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6:16) 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논리대로라면, 당신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 단지 회개, 믿음, 순종으로 주님께 순복함으로 그가 당신의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입증하면 된다.

영접 초대와 그의 변덕스러운 산물

죄인에게 회개와 믿음을 촉구하는 전도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러나, 공식화 된 영접을 위한 초대는 온갖 무모한 기독교관과 잘못된 구원관을 낳았다. 이런 것들은 구원으로의 부르심과 죄인의 중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부인했던 19세기 전도자였던 챨스 피니의 비극적인 산물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기 원했던 피니의 욕망은 ‘불안한 사람들의 긴 의자’ (영접하기를 열망했던 사람들이 앉는 교회 앞쪽에 배치된 긴 의자)를 발상하게 했고, 피니는 교회의 부흥이 설교자와 그의 방법에 달려 있다고 확신했다. ‘불안한 사람들의 긴 의자’는 피니가 가장 좋아했던 전략 중 하나였다. 교회당 앞쪽에 빈 긴 의자를 준비해 놓고 영원한 운명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이 앉을 수 있도록 했고, 이들에게 겨냥된 설교를 하고, 집회 후 설교자와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오늘날 이와 똑같은 유형은 보이지 않는다 해도, 이런 실용적인 원리는 오늘날 ‘초대의 시간’이나 ‘전도대회’ 등에 응용되고 있다. 몇몇 사람들이 교회당 앞으로 걸어 나가는 것이 바퀴가 굴러가게 하듯 사람들이 앞으로 나오도록 충동했던 것이다. 또한, 회심자를 만들기 위해 인간적으로 설계된 방법은 그 후로 더 만연해 왔다.

적절한 성경적 언어의 사용

정반대로, 구원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방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죄인을 부르셔서 그에게 이끄시고(요 6:44; 롬 8:28), 성령으로 죄인을 책망하시며(요 16:8), 그 능력으로 죄인을 중생하게 하시고(겔 36:26; 고후 5:17), 죄인을 그리스도의 속죄하신 일을 통해 보신다(고후 5:21).

설교자가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대신하려고 해서는 절대 안 된다. 대신에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고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설교라는 방법을 정하셨다. 바로 죄로부터 회개하는 것과(행 17:30-31)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다(엡 2:8-9; 행 20:20-21).

죄인에게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권하기 보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께 영접받기를 간구하라고 촉구해야 한다. 죄인에게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세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주님 되심에 순복해야 할 것을 촉구해야 한다. 그리고 죄인들을 구원의 제단으로 부르는 대신 주권을 가지신 구세주에게 그들을 맡겨야 할 것이다. [복음기도신문]

Cameron Buettel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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