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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하나님이 대량 학살을 용인하신다?

▲ 구스타브 도레(1832-1883)가 사무엘상 15장을 배경으로 그린 '아가그의 죽음(A morte de Agag)'. 사진: artbible.info 캡처

사울이 아말렉을 멸하는 사무엘상 15장은 성경 난제 본문에 해당한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도시 전체를,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모두 진멸하라고 명하시고, 일부 주민들에게 자비를 베푼 사울을 꾸짖으신다. 많은 사람이 이걸 학살을 용인하는, 대량 학살의 신을 묘사하는 “테러의 텍스트”라고 부른다. 

나는 이 본문을 그냥 어려운 구절로 남겨둔 채 회피하고 싶지 않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 본문을 더 정교하게 이해를 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다섯 가지 관찰 사항을 여기 제시한다.

1. 아말렉의 역사

아말렉 사람들은 친한 이웃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성경은 곳곳에서 그들을 공격하기 쉬운 약한 상대를 골라서 약탈하는 강도 같은 족속으로 묘사한다. 출애굽기 17장에서 그들은 이스라엘을 공격한다. 그때 이스라엘은 이제 막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벗어나 무방비 상태로 집도 없이 방랑하고 있었다. 민수기 14장에서 아말렉은 다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한다. 신명기 25:17-18에서 이스라엘은 이런 말을 듣는다. “당신들이 이집트에서 나오던 길에, 아말렉 사람이 당신들에게 한 일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당신들이 피곤하고 지쳤을 때에, 길에서 당신들을 만나, 당신들 뒤에 처진 사람들을 모조리 쳐죽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들입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사사기에서도 시시때때로 아말렉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고 압제한다. 뒤에 가서 에스더에서 유대인 대량 학살을 획책하는 장본인도 아말렉 사람이다.

아말렉은 나치와도 같은 존재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유대인 말살에 열중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은 나치를 “아말렉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강제수용소의 유대인들은 나치를 잔인한 학살의 역사를 연장한 현대의 아말렉으로 여겼다.

아니나 다를까. 하나님은 아말렉을 멸하시는 이유로 그들의 압제의 역사를 인용하신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한 일 곧 길을 막고 대적한 일 때문에 아말렉을 벌하겠다”(삼상 15:2).

2. 요새의 위치

고대 근동의 도시는 오늘날과 달랐다. 우리는 “아말렉 성읍”(삼상 15:5)이라는 말에서 그 성을 온 백성이 사는 “민간인 주민들이 거주하는 중심지”라고 생각한다. 나는 집 밖에 학교, 병원, 식당, 기업이 있는 피닉스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고대 근동에서 도시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이어지는 길을 지키는 요새화 된 군사 전초 기지였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아말렉 성에는 민간인이 없었다. 구약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Wright)가 관찰한 바와 같이, 그 전투에서 “소규모 가나안 왕국의 작은 요새 도시인 주요 군사 중심지가 전멸되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실제로 전멸한 것은 확실히 아니다.”

이스라엘은 뉴욕이 아니라 펜타곤을 멸하고 있다. 그 성읍은 민간인 인구 밀집 지역이 아니라 방어용 군사 요새였다.

3. 고대 전쟁의 본질

고대 근동에서는 민간인은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민간인이 보호받으려고 성 안으로 도망쳐 들어가는 중세 시대나 반지의 제왕과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군인과 소수의 정부 관리만이 성에 거주했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 근처에 있던 민간인들은 모두 도망쳤다.

“아말렉 성”은 매복 공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여성, 유아, 민간인이 없었을 것이다. 있었더라도 도망쳤을 것이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원래 청중은 이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히브리 학자들은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와 젖먹이, 소 떼와 양 떼, 낙타와 나귀”(삼상 15:3)라는 구절은 “전부”를 가리키는 고대의 통용어였다고 지적한다. 특정 전투에서 이런 범주의 대상이 반드시 존재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전투가 끝난 다음에 그 군사 전초 기지에 남아 있는 모든 사람과 모든 것(“전부”)을 파괴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4. 고대의 독설

고대 근동의 이웃들처럼 이스라엘도 전쟁 이야기를 할 때면 극적인 언어를 사용했다. 현대인의 귀에는 그 이야기가 대량 학살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현실은 더 복잡했다.

우리는 이스라엘 주변에 있던 고대 국가들이 남긴 전투 기록에서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 “우리가 그들을 전멸시켰다! 우리는 그 나라를 땅에서 쓸어버렸다! 그들은 더 이상 이 땅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전쟁사를 보면, 지구에서 전멸했을 것 같은 바로 그 적들이 1년 뒤에 전보다 더 강력한 대적으로 돌아와서 문제를 일으킨다.

이것은 스포츠의 독설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기가 끝난 다음에 라커룸에 있는 농구 선수들은 이렇게 소리를 지른다. “우리가 그들을 파괴했다! 걸레를 만들었어!” 그 선수들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들이 120대 0으로 이겼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점수판을 보면 120대 105이다. 이기긴 했지만, 그들의 수사법이 암시하는 것처럼 그렇게 극단적인 승리는 아니다.

성경도 이런 식으로 언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여호수아 9-12장에서 여호수아는 일련의 군사적 승리를 축하하면서 “우리가 모든 왕을 멸하고, 모든 군대를 쳐서 멸하고, 가나안 온 땅을 정복하였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계속해서 여호수아 13-15장부터 사사기, 사무엘 상하를 읽어 내려가 보라. 그 적들은 여전히 주변에 있다! 여호수아가 묘사한 그런 일은 수십 년 후에, 다윗의 통치 때까지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원래 명령을 과장된 용어로 이해했음을 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는 반복해서 그들이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수 11:12-20) 실행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핵심 명령은 가나안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쫓아내라”는 것이었다. (이 “쫓아내다”라는 어구는 가나안 사람들을 상대할 때 자주 나타나는데, 독설은 비교적 드물다.) 이것은 살육이 아니라 격퇴의 언어이다.

그렇지만 “독설”이라고 해서 사무엘상 15장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라커룸에 있는 선수들이 경기에 대해서 거짓말을 한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성경의 기자들도 고대 전쟁 역사에서 통용되었던 말하기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5. 사울의 속내

9절에서 사울은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 준다: “사울과 그의 군대는, 아각뿐만 아니라, 양 떼와 소 떼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것들과 가장 기름진 짐승들과 어린 양들과 좋은 것들은, 무엇이든지 모두 아깝게 여겨 진멸하지 않고, 다만 쓸모없고 값없는 것들만 골라서 진멸하였다.”

많은 사람이 사울의 이러한 행동을 자비의 행위로 보고, 왜 하나님께서 사울을 책망하시고 버리시는지(삼상 15:26)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나 사울의 그 행동은 자비가 아니라 탐욕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사사로운 약탈을 하는 것을 어김없이 금하셨다(예, 신명기 71320장여호수아 7장). 실제로 탐욕은 전쟁의 주요 동기였다. 사울은 가장 좋은 동물을 취했고, 아말렉 왕을 승전의 트로피로 사로잡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백성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주변 국가들이 “저들도 그냥 돈 때문에 그렇게 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으셨다.

사울은 아말렉 왕은 전리품으로, 그들의 가축들은 자기 백성을 부자로 만들 재화로 취했고, 하나님의 명성은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 내러티브의 화자가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부패한 동기이다. 사울은 구찌와 아르마니를 가질 수 있다면, “쓸모없고 값없는 것들”(삼상 15:9)은 손쉽게 쓸어버렸다. 그는 “승전비를 세우고”(삼상 15:12)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 자신의 영광을 높였다. 그는 “약탈하는 데만 마음을 쏟으면서”(삼상 15:19) 할 수 있는 대로 가장 좋은 물건을 훔쳤다.

물론 사울은 사무엘에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가장 좋은 것을 골라왔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하려 한다(삼상 15:21). 이것은 당신이 목사님에게 “교회에 십일조를 내려고 세금을 속였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이런다고 하나님이 좋아하실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 15:22). 결국 부분적인 순종은 불순종이다. 사울이 왕이신 하나님을 거역하였으니, 하나님도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신다.

더 큰 희망

내 목표는 사무엘상 15장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이 구절은 캐리커처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 구절은 심지어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서 우리가 품어야 하는 희망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큰 그림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에서 원수를 물리치신다. 이 구절은 궁극적 승리, 곧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질 때, 우리에게 해를 입히고 우리를 무너뜨리는 악과 회개하지 않는 그 동맹군은 제거된다는 그 승리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대적이 되지 말자. 그렇지 않으면 멸망의 날이 우리에게 닥칠 것이다. 하나님은 아말렉 족속을 대대로 오래 참으셨지만, 그들은 사무엘상 15장까지 불의와 압제를 계속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오래 참으시며 십자가로 구원의 길을 만드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악을 심판하고 회개하지 않는 반역자들을 당신의 나라에서 제거하시는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

이렇게, 사무엘상 15장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세상의 소망을 가리킨다. [복음기도신문]

원제: Is God OK with Genocide?

조시 버틀러 Josh Butler | Redemption Church(Tempe, Arizona)의 교육목사이며, The Skeletons in God’s Closet: The Mercy of Hell, the Surprise of Judgment, the Hope of Holy War The Pursuing God: A Reckless, Irrational, Obsessed Love That’s Dying to Bring Us Home의 저자이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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