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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일 칼럼] 무슬림들과 인샬라

사진: Imad Alassiry on Unsplash

밖에서 보는 이슬람(44)

무슬림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 “인샬라

이슬람권 국가를 돌아다니다 보면, 외국인들의 귀에 가장 많이 들려오는 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인샬라’이다. 모든 무슬림이 일상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인샬라(inshallah)’는 ‘만일 알라의 뜻이라면(알라가 원한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물론, 반대로, ‘알라의 뜻이 아니라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이기도 하다.

아랍어에서 시작된 ‘인샬라’는 ‘~한다면’의 의미를 지닌 조건사 ‘인’에, ‘그가 원한다’라는 의미의 동사 ‘샤아’와, 신을 뜻하는 ‘알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의미는, ‘알라가 원한다면’이다. 그러나, 인샬라를 그 단어의 분석 및 직역에 따라 해석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을 정도로 무슬림들은 좀 더 넓은 의미로 생활 속에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아랍 언어학자 공일주에 의하면, 아랍인들은 현실을 보고 말하기도 하지만, 현재 상황을 잊고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할 때도 “더 좋아질 거야, 인샬라”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아랍어에 뿌리를 둔, “인샬라”는 ‘알라가 원한다면’이란 말로 번역하고 대개는 그 말을 성사가 안 될 것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려 하지만, 대화 상황에 따라서 좀 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다.

또, ‘인샬라’는 상대방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하거나, 특별한 요구를 수행하기를 거절하는 것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도 사용하지만, 자기 목표를 달성하려는 때도 ‘인샬라’라고 말한다. 따라서, ‘인샬라’를 반드시 ‘알라가 원한다면’이라고만 해석할 수 없으며, 상황에 따른 개념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옳은 일이다.

꾸란의 가르침에 따라 모든 무슬림은 그것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자기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알라의 허락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해진다고 믿는다. 알라는 만물을 주관하는 절대자이므로 신앙심을 가진 무슬림들에게는 절대 틀린 말이 아니다.

“분명 내가 내일 그것을 알라의 뜻이라 하되, 그대가 잊었을 때는 주님을 염원하라. 내가 바라보니 나의 주님께서 이것보다 더 가까이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실 것이라 말하라.”(꾸란 18:23~24).​

꾸란에 따르면,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알라에게 달렸으므로 어떤 행위나 약속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라고 단정하여 말하지 말라는 뜻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종교적인 말로 보인다.

그러나, 무슬림들과 함께 지내본 사람들은 무슬림의 ‘인샬라’가 너무 애매모호해서 ‘예’인지 ‘아니오’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인샬라’는 모든 무슬림이 사용하는 약속과 행동에 대한 종교적 반응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매우 무책임한 말로 오해받기도 하며, 대답하기 어려울 때 회피하기 위한 말로도 사용한다.

​일상생활에서 무슬림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대화들을 가지고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공부 잘하는 학생을 향해 “나중에 과학자가 되어라!”라고 말하면, 그는 노력해서 꼭 그렇게 되겠다고 말하는 대신, “인샬라!”라고 말한다. 알라가 허락하지 않고서야 과학자가 될 수 있겠냐는 대답이다.

무슬림 친구에게 다음 주 12시에 만나자고 말하면, “그러자” 혹은, “꼭 나갈게”라고 대답하는 대신에, “인샬라!”라고 대답한다. 알라가 자기를 그날 그곳에 보내줘야 나갈 수 있다는 대답이다.

돈을 안 갚는 무슬림 친구에게 돈을 달라고 요구하면, 그는 꼭 갚겠다고 대답하거나,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대신, “인샬라!”라고 말한다. 알라가 자기에게 돈을 줘야 갚을 수 있지 자기가 갚겠다고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내일 비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무슬림들은 “내일 비가 오겠지? 인샬라”라고 자기의 염원을 담아 말하기도 한다.

친구의 어떤 제의나 부탁에 대해 딱히 뭐라고 말하기 어려울 때도, ‘인샬라’라고 말한다.

무슬림들의 정명(定命) 사상

이슬람교에서는 모든 무슬림이 믿어야 하는 여섯 가지 믿음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정명(定命)’ 사상이다. 즉, 모든 무슬림의 운명은 알라가 이미 정했다는 믿는 믿음이다. 이슬람 교리 안에서 무슬림들의 정명 사상은 심판의 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꾸란에서 인간의 운명은 알라가 결정하고 인간이 무조건 받아들이는 일 외에 인간이 할 일은 없다.

그러므로, 무슬림들의 정명 사상은 세상만사와 운명, 인간의 신앙과 불신앙까지 전적으로 알라에게 달렸다고 믿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죽는다든지, 심지어,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도 알라가 정한 일이라고 믿는다(꾸란 8:15).

이처럼, 무슬림들은 인간의 선과 악, 행동 등 모든 것은 알라가 정한 것에 의해 운명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이로써, 자기 행동에 대해 책임은 전적으로 알라에게 있다고 믿는다. 이 교리는 알라에게 절대복종함으로써 모든 무슬림의 길흉화복과 성패를 알라가 정한다고 믿는다.

“보이지 않는 것의 열쇠들이 하나님께 있나니 그분 외에는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하니라 그분은 땅 위에 있는 것과 바다에 있는 모든 나뭇잎도 대지의 어둠 속에 있는 곡식 한 알도 싱싱한 것과 마른 것도 그분께서 모르시는 것이 없으니 그것은 성서에 기록되어 있노라.”(꾸란 6:59).

“알라는 그분이 원하시는 종에게 일용할 양식을 풍성케 하시기도 또한, 제한하시기도 하시니 실로 알라는 모든 것을 아시노라.”(꾸란 29:6).

이처럼, 인간의 모든 운명이 알라에 의해 미리 정해졌음을 의미하는 정명 사상으로부터 ‘인샬라’가 나왔다. 그러므로, 인간 활동과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이 알라의 뜻에 따라서 움직여진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수니파 무슬림들의 믿음이며, 소수를 차지하는 시아파 무슬림들은 오직 인간만이 이성을 통한 자유의지를 부여받았다고 믿는다. 이들은 알라에 의해 정해진 정명(定命)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더 믿고 있어서 지금까지 수니파 무슬림들과 갈등과 긴장이 끊이지 않고 있다.

기독교의 예정론

기독교의 예정론은 이슬람교의 운명론에 비해서 인간의 역사적 행위와 책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에 대한 감사와 찬양에 중점을 둔다. 이는 인간의 행위를 자유롭게 허용하면서도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창조주의 오묘한 섭리와 주권에 대한 찬양을 강조하고 있다는 면에서 이슬람의 정명 사상과 차이를 가진다.

기독교의 예정론은 칼뱅의 독창적 교리는 아니라, 사도바울과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이후, 루터, 츠빙글리까지로 이어진다. 그러나, 종교 개혁 이후 예정론은 주로 칼뱅과 그의 사상적 전통에 속한 신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었기에 오늘날의 기독교 예정론은 주로 칼뱅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

사도바울의 서신들에 보면, 예정론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3~4).

또한, 로마서 8장 29절과 9장 6~29절도 예정론의 중심적 교리이다. 어떤 이들은 바울의 예정 사상이 히브리의 선민사상에서 유래하였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바울에게서 드러난 예정론을 신학적으로 체계를 이룬 사람은 어거스틴(AD 354~430)이다.

어거스틴(Augustine)의 예정론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전적 타락이란 두 기둥 위에 예정론을 수립하였다. 하나님의 은총은 불가항력적이고 예정된 것이라는 어거스틴의 신론과 은총론은 ‘예정’이란 용어에 집중되어 있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의 주권적 특성에 관한 깊은 고찰로 말미암아, 예정은 그것 자체가 신적인 예지의 기초가 된다. 은혜는 인간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아주 무시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는 항상 자유를 가지고 선택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칼뱅의 예정론

16세기 종교개혁자들도 한결같이 예정론을 주장했다. 칼뱅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하고도 변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구원으로 받아들이실 사람들과 멸망에 내어 주실 사람들을 오래전에 작정하셨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칼뱅에 따르면, 인간의 전적 타락으로 구원에 이룰 수 없음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 혹은, 무조건적 선택에 따라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고 회개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예정론은 구원의 확실성을 강조하며, 인간의 불확실한 공로나 행위로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기독교의 예정론과 이슬람교의 인샬라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다는 가르침에서 볼 때 서로 유사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다. 이슬람교에서는 알라를 인간 위의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절대 제왕으로 만들어 놓았다. 알라는 사람들의 인격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인간의 복종에만 관심이 있다. 이에 따라서, 인간이 할 일은 오직 알라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며, 알라의 전능하심이 매우 절대적이어서 피조물인 인간 쪽에서 자율적이고 자주적 행동을 금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와는 달리, 오늘날 하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고, 오로지 깊은 숙명주의 속에서 살아가는 전 세계 무슬림들의 ‘인샬랴’는 자기들을 알라의 섭리라는 허울 좋은 틀 안에 가두어 놓았다. 이로써 무슬림들의 삶을 체념하게 만든 채, 스스로 개척하고 바꾸어보려는 자유의지를 잊어버리고 살게 하였다.

[복음기도신문]

김종일 | 장신대 신대원 졸업, 前 중동선교회(MET) 본부장, 現 FOT 선교회 대표. 국내 이슬람권 선교사 네트워크 회장, 저널 ‘전방개척선교(KJFM)’ 편집인, 아신대학교(ACTS) 중동연구원 교수. 저서: ‘밖에서 본 이슬람, 무슬림 이해하기’(20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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