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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자주 오용되는 성경 구절: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병고침을 받았나? (사 53:5)

사진: Lilian Dibbern on unsplash

성경: 이사야서 53:5; 베드로전서 2:24

아마 치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은사주의 안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자기들이 병든 자를 고치는 초자연적인 신성한 능력을 하나님께 부여받았다고 주장한다.

이런 기적을 일으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역을 오래 끌고 가기 위해서 (실제로 그들의 많은 사역들은 수십 년 동안 번창하고 장수를 누린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환상이나 허상을 계속 정당화 시켜야 하고 개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선정적인 주장들이나 아주 웅장한 이벤트들은 열정적인 군중들을 이끌어 오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런 열정은 사람들을 거기까지 만 끌어줄 뿐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사역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성경의 권위를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많은 거짓 교사들에게 이사야 53장 5절은 자주 오용되는 구절이다. 본문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이 구절을 그들 자신들의 사역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끼워 맞추어 해석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3, 개역개정)

이사야 53장은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가장 유명한 구약 성경 구절이다. 존 맥아더는 이사야 53장을 일컬어 “첫 번째 복음”, 또는 “하나님의 복음” 이라고 지칭한다. 53장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에 대한 아주 생생하고 세밀한 예언적인 묘사를 담고 있다. 그리고 여기 5절에서 “채찍”은 십자가에서 로마 병사들이 예수님을 채찍질했던 것을 지칭한다.

은사주의인 Word-Faith(믿음의 말씀) 운동 안에 있는 설교자들은 계속적으로 이사야53:5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우리에게 육체적인 치유가 전해짐을 확증하는 구절이라고 주장한다. 한 예로, 조셉 프린스는 치유는 모든 믿는 자들이 가져야 하는 권리이고 우리가 단순히 “고백”함으로 실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예수님이 받으셨던 것은 등을 매질했던 채찍뿐만이 아니라 당신의 질병과 아픔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매질을 당하실 때마다 암, 당뇨, 감기, 뎅기열 같은 모든 질병들이 예수님께로 전해졌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치유는 당신이 가지는 권리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치유를 위해 값을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약 사탄이 여러분께 “넌 치유될 수 없어”라고 속삭인다면 이렇게 선포하세요. “예수님께서 나의 나음을 위해 대가를 치르셨어! 질병이 내 몸 안에 있을 권리는 없어! 나는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받을 수 있어!”

당신에게 발발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질병은 이미 예수님에게 대신 전해졌습니다. 예수님께 모든 종류의 매질을 당하셨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제 평생 동안 신성한 건강함으로 지낼 수 있습니다. 대가는 이미 지불됐습니다. 이제 침대에서 나와 그 고통에서부터 벗어나세요!”

프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잠재적 능력으로 주장한다. 그의 신학에 따르면 당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실제로 질병에서 해방된 것이 아니라 침대에서 나와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능력을 받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치유를 가져다 주는 그 십자가의 대속을 어떻게 하면 작동 시킬 수 있는가? 케네스 하긴(Kenneth Hagin)의 간증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해준다.

하긴은 그의 치유사역을 이사야 53:5절은 인용한 신약 베드로전서 2:24에 근거로 삼고 있다. 또한 하긴은 이 구절을 개인의 신성한 치유의 경험 또한 자신의 사역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사용한다:

“몇 년 전에 나는 아주 극심한 가슴 통증으로 새벽 1시 30분경 잠에서 깬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증상이 어떤 것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심한 심장 통증으로 몸져 누워서 거의 죽을 뻔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귀가 내게 말했다. ‘하긴, 이번엔 너는 치유받지 못하고 곧 죽게 될 거야.’ 나는 그 말을 듣고 얼굴을 이불로 덮은 뒤에 웃기 시작했다. 웃을 상황이나 기분이 아니었지만 십 분 동안 그냥 계속 웃어댔다. 마귀가 결국 나에게 어떤 이유로 웃는지 물어봤다.

‘나는 너를 비웃는 거야!’ 내가 말했다. ‘너는 내가 치유받지 못할 거라고 말했지. 하하. 마귀야, 나는 내가 치유받기를 기대하고 있지 않아!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치유해주셨어. 네가 읽지 못할지도 모르니 내가 너에게 베드로전서 2:24절을 읽어 줄게.’ 그리고 나는 그 구절을 마귀에게 읽어 주었다.

 구절의 마지막 부분,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를 읽고 나서 나는 말했다. ‘우리가 나음을 얻었다면, 나는 이미 치유 받은거야! 그렇기 때문에 내가 치유를 구할 필요가 없어.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위해서 다 이루셨기 때문이야. 나는 받아들이고 선포하고 내 것으로 가져오기만 하면 돼. 그러니 이제 이 고통들을 가지고 여기를 떠나버려.’”

하긴이나 다른 수많은 Word-Faith(믿음의 말) 설교자들에게 초자연적인 치유는 실제적인 것으로 선포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조이스 마이어(Joyce Meyer)는 이런 개념을 더 확장시켰다. 그녀는 사탄이 우리의 질병을 일으키는 그런 악한 일들에 관여하고 있다면서 사탄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둘 어떤 이유도 없다고 말한다:

“어떻게 질병 앞에 맞설 수 있을까요? 먼저 예수님의 보혈이 당신의 질병과 당신의 몸의 모든 구석구석 – 면역체계, 신체 장기 그리고 혈액 세포 등 –에 뿌려지도록 기도하세요. 그리고 당신의 몸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거예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요, “아버지, 나의 건강은 당신의 뜻에 달려 있음을 믿습니다. 나는 예수님이 당한 채찍으로 말미암아 나음을 얻었음을 믿습니다. 당신의 말씀은 나의 몸에 건강이 되고 생명이 됩니다. 그리고 당신의 말씀은 아버지의 기쁨과 목적을 위해 성취될 것을 믿습니다.”

이렇듯 다시 한번 조이스 마이어에 따르면 치유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기정사실이 아니라 우리의 권리이다. 조이스에 따르면 치유는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잘 취득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포함으로 그것을 실제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믿음의 힘으로 치유를 내 것으로 만들라는 것이다. 요셉 프린스나 마이어가 주장하는 신학은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잠재적인 대속의 역사는 마치 스위치를 올리는 것처럼 믿음의 선포를 통해 우리가 작동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그리고 영적인 고문과도 같은 것이다. 또한 이 거짓 가르침으로 인해서 교회를 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에 대한 실망감을 안겨준다.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인 천국을 소망하기 보다 현실성 없는 기대로 여기저기 가득 차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고쳐지지 않는 질병을 바라보며 자신들이 치유받을 권리를 제대로 취하지 못한 믿음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이 여전히 아담의 죄의 저주 아래에 놓여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세상에 있는 질병은 타락한 인류의 단면을 나타내는 현실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주장하는 치유나 건강도 이 현실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초대교회의 제자들조차 육체적인 질병을 허상처럼 여기지 않았다.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해서 그 질병들에 대처하려고 노력했다.

디모데후서 4장을 살펴보면 사도바울은 선교여행에서 병든 드로비모를 밀레도에 두고 왔다(딤후 4:20). 또한 바울은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권했다(딤전 5:23). 감옥에 있던 바울을 섬기던 에바브로디도는 병에 걸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빌 2:25-27). 그리고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교회 성도를 징계하실 목적으로 질병을 보내시기도 한다(고전 11:29-32).

그러면 이사야서 53:5절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즉각적이고 완전한 육체적인 치유를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과연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것을 약속하고 있는가? 존 맥아더는 이 문제에 관해서 베드로전서 2:24절의 주석에서 아주 명확한 답을 제시해 준다 (베드로전서 2:24절은 이사야 53:5절을 인용한 구절이다):

“그리스도는 그분을 믿는 성도들을 죄의 영원한 형벌로부터 분리시켜 주셨다. 그래서 결코 다시는 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없다. 유죄 선고를 받은 그들을 지옥문으로 끌고 가던 모든 죄들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골 2:12-24). 예수님은 죄인들이 하나님께 빚진 것을 대신 완전히 갚아 주셨다. 이런 관점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형벌과 심판에서 완전히 자유하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죄의 강력한 지배로부터 자유하게 되었고 이제 의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참고, 롬 6:16-22).

죄에 대해서 우리가 죽고 의로운 삶으로 다시 태어난 것을 가리켜 베드로는 이곳에서 치유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또한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가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에서 표현한 것과 같은 것이다. 채찍이란 단어의 사용은 예수님께서 고문당하심이 구원을 가져온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상처’가 채찍 보다 더 나은 단어의 사용이다. 이사야와 베드로 모두 예수님의 상처는 예수님의 처형 과정 중에 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여기서 상처는 예수님께 고통을 주고 죽음에 이르게 했던 일반적인 개념의 모든 상처를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나음을 받았도다’ 즉, 치유는 육체적인 치유가 아니라 영적인 것을 가리킨다. 이사야나 베드로 누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결과가 육체적인 치유라는 것을 말하려고 의도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육체적인 완전한 치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온 결과가 맞다. 하지만 그 완전한 치유는 우리가 천국에서 완전한 모습이 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날에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고 영광 가운데에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영원한 새 하늘, 새 땅을 경험할 것이다(계 21:4; 22:1-3).”

공평하게 짚고 넘어가자면 마태복음은 이사야 53:5절을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서 일어난 치유와 연결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6-17)

하지만 그리스도의 치유의 사역이 그분의 사역의 종착점이었는가? 아니면 그 치유는 영원한 치유를 가리키고 있는가? 결국 예수님께 치유를 받은 모든 사람은 사망에 이르렀다. 나사로 또한 죽음에서 부활했지만 결국 다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사람들은 치유를 받지만 여전히 저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순 없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지만 인간은 여전히 계속해서 죄를 범한다. 그분은 사망을 이기셨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죽음을 맞는다. 그렇기에 로마서 8장에 따르면 미래에 이 땅에서는 실현되지 못할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의 성취가 있을 것이다(롬 8:22-25). 이것이 바로 존 맥아더 목사가 올바르게 관찰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절대 질병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똑같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이 없다고 주장해야 이치에 맞는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대속을 통해 사망도 이기셨기 때문이다. 복음의 중심이 되는 메시지는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죄 사함을 주는 복음이지 건강을 주는 복음이 아니다.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다. 질병으로 삼으신 것이 아니다(고후 5:21). 사도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상처는 우리를 죄로부터 치유해 주었다. 질병으로부터가 아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24)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하여 치유가 있지만 이 땅 가운데 완전하게 드러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건 불신자이건 똑같이 이 땅에서는 죄로 저주받은 타락한 세상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 그리고 모두 결국엔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완전한 치유는 분명히 약속되었지만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는 것을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가 영화롭게 될 그때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실망감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큰 소망과 기쁨을 고대하게 해주는 영광스러운 미래의 현실인 것이다. [복음기도신문]

출처: http://www.gty.org

카메론 뷰텔(Cameron Buettel)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리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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