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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성공적인 기도의 단계(4) –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라

사진: Nathan Dumlao on Unsplash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가장 흔한 동기는 무엇인가? 죄를 고백하기 위함인가? 혹은 사랑하는 자를 돕기 위함인가? 우리의 가장 최근의 간구를 그에게 아뢰거나, 혹은 그가 간과하셨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을 상기시키기 위함인가? 우리는 많은 기도 시간 중에 많은 부분을, 우리의 초점을 기도 드리는 분에게가 아닌, 우리 자신에게 맞추고 있다.

우리가 단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하여, 혹은 그의 사랑과 자비하심과 은혜, 혹은 그의 성품에 대한 감사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기도한 적이 언제인가?

만약에 기도가 예배의 행위라면, 우리의 기도는 결코 우리의 주변과 우리의 계획, 우리의 시련, 우리의 필요와 부족, 그리고 염려들에 맴돌 수가 없다. 자기 중심적인 기도의 접근은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본보기와 분명한 차이를 나타낸다. 주님의 기도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에 대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주권적인 돌보심에 대한 묵상이다. 그것은 성공적인 기도의 형태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지고하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기도할 때에, 말하기를: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그리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옵소서”(눅 11:2-4).

기도의 전체적인 시작 문구는 예배의 직접적인 외침이다: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눅 11:2). 이것은 기원의 표현을 사용하였지만, 결코 사람의 요청이 아니다; 그것은 찬양의 표현이며, 하나님 자신의 우선권을 담고 있다: “나는 하나님이다, 그것이 나의 이름이다; 나는 나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을 것이다”(사 42:8)

예수님은 그의 기도 본보기를 그렇게 시작하심으로써 기도가 예배라는 사실을 확실히 하셨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그의 이름의 영광을 노래하는 것”이다(시 66:2). “그의 이름에 마땅한 영광을 주님께 돌리세”(대상 16:29; 시 29:2; 96:8). “우리에게가 아니요, 오 주님, 우리에게가 아니요, 당신의 이름에 영광을 드립니다”(시 115:1). 이러한 표현은 예배하는 마음의 참된 영을 포착하게 한다.

더구나 저 첫 문장은 다른 모든 구하는 것들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구할 때 그 기도가 낭비되는 것을 막아준다(약 4:3).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뜻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기원을 제거시킨다.

아더 핑크의 글 중에서:

분명 기도의 기초적인 의무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우리 자신과 모든 필요는 이차적인 자리에 있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소원, 그리고 간청에 있어서 그의 탁월하신 뜻을 자유롭게 이루셔야 한다. 이러한 기도가 우선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크신 이름의 영광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종류의 기도도 이러한 목적에 종속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이것과 조화되고 이것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지배적이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올바른 기도를 드릴 수가 없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소중히 여긴다면, 우리는 신성한 거룩함이 부여되도록 기도하는 일에 반대되는 어떠한 것도 구하여서는 결코 안 된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고”라는 표현은 무슨 의미인가? 성경적인 용어로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과 관계되는 모든 것, 즉—그의 성품, 속성, 명성, 영광, 인자되심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에 대하여 진실된 모든 것을 나타낸다.

우리는 때때로 그런 의미로 ‘나의 이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의 이름’을 망쳤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가 나를 수치스럽게 하고 또한 나의 명성을 훼손시켰다는 의미이다. 그는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명예를 실추시킨 것이다. 또한 내가 당신에게 위임장을 준다면, 나는 당신이 ‘나의 이름’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권한을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나의 법적인 대리인이 되고, 당신이 관여하는 나의 법적인 계약들은, 마치 내가 직접 사인한 것처럼 나에게 구속력을 갖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께서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가르치셨을 때 정확히 의미하셨던 것이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나의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그대로 행할 것이요,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 그 아들 안에서 영화롭게 되실 것이다. 만약 너희가 나의 이름으로 어떠한 것이든지 구하면, 내가 그것을 행할 것이다(요 14:13-14).

그러나 기도를 시작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것을 구하도록 가르치심으로써, 그리스도는 우리가 자신을 과장하기 위하여 그의 이름을 오용하지 못하도록 안전 장치를 만드셨다. 만약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결코 그의 아들의 이름을 훼손시키거나 혹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이름으로 간구하도록 우리에게 주신 대리인의 자격을 예수님이 결코 허락하지 않으신 것을 위하여 남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이요, 또한 제3계명의 위반이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의 이름의 권위를 위임하신 직후에, 그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만일 나를 사랑하면, 너희는 나의 계명을 지킬 것이다”라고 하셨다(15절). 그리고나서 한 장 뒤, 요 15:7에서, 모든 필요한 자격에 대한 원리를 다시 언급하셨다: “만약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한다면, 너희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러면 너희를 위하여 그것이 이루어지리라”(강조 추가됨)

그렇다면 “당신의 이름”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적절한 명사 이상의 의미를 뜻한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가 어떠한 분이신가에 대한 모든 것, 그가 인정하시는 모든 것, 그리고 그에 대하여 알려진 모든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우리가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 그의 영광, 그의 세상 가운데에서의 명성, 그리고 바로 그의 존재가 따로 구별되어 높여지기를 원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거룩함을 받으시고(그리스어 하지아조)라는 단어는 “성별되다”, “성화되다”, 혹은 “거룩하게 구별되다”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모든 세속적인 것과 분리된다는 개념을 포함한다. 간단히 설명하면, 이 구절은 하나님 자신이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는 기도이다. 예수님 자신도 바로 이 사실로 인하여 요 12:28에서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옵소서.” 이것은 하나님이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기도이다.

그의 본보기 기도를 이렇게 시작하심으로서, 예수님은 우리가 드릴 수 있는 모든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을 우리에게 상기시키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시고 영광 받으시고 알려지시고 또한 높임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은 하나님 아버지를 값싼 감상주의나 지나치게 친밀한 방법으로 부르지 않아야 함을 더욱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지만, 동시에 그의 이름이 거룩하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이 결코 그의 영광을 감소시켜서는 안 되며,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면, 여기에 그것을 교정하는 조치가 있다: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입음을 받으시오며.”

그렇게 간청하는 영은 소위 말하는 번영 신학 복음의 주된 요점과 배치된다. 어느 텔레비전 전도사가 “긍정적인 고백”의 교리에 관하여 가르치는 것을 들었는데, 그는 청중들에게 말하기를 만약 그들의 기도에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라는 구절을 덧붙인다면, 그것은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것은 지옥의 구덩이로부터 나오는 거짓이다. 예수님 자신도 기도하실 때에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셨다(눅 22:42). 우리의 모든 기도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시작하도록 가르치심으로써,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뜻 위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모든 사람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신, 어떤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는 그런 종류의 신은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기도를 이러한 방식으로 묘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의 이름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들의 거짓된 가르침은 하나님의 본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쁜 신학이고, 중대한 불경이다. 그것은 신성모독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이고, 그것은 이러한 간청의 영에게는 명백한 반대를 뜻한다.

루터의 교리문답서(제 39항)는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하고 있다: “우리 가운데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가? 답변하라. 그것은 가능한 한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교리와 생활이 모두 경건하고 기독교인 다울 때이다. 이 기도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부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경건한 자녀로서 행동하고 처신해야만 하며, 그가 우리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하시지 않고 오직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며 그의 능력과 그의 은혜, 그리고 그의 완전하심을 나타내시도록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대로 응답하시는 경우는, 우리의 기도가 이기적인 욕구로부터 나오는 경솔한 간구가 아니라 그의 뜻에 대한 복종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가정했을 경우이다.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서 번영을 누리기 위하여 창조되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기 위하여 창조되었다. 우리는 자신의 번영이나 자신의 편안함, 자신의 문제, 혹은 어떠한 자기 중심적인 욕구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에 그것이 단지 우리의 원하는 것을 구하는 방편이 아니라, 하나의 예배 행위인 것을 생각하도록 가르치신 이유이다. [복음기도신문]

존 맥아더 |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 담임

원문 : www.gty.org/library/blog/B120508?term=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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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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