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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 칼럼] 예수와 바리새인들과의 논쟁(I)

사진 Diana Polekhina on Unsplash

<역사적 예수 논구 시리즈>

복음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예수와 바리새인들 사이에 논쟁이 자주 있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왜 그런가?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이 다른 종파보다는 바리새파의 가르침과 공통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동시대의 종교권력가들이었던 사두개파는 부활과 내세를 믿지 않았고, 율법을 준행하고자 하는 열심이 없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그대로 믿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와 선지자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자 하는 자들이었다. 예수도 모세와 선지자의 전통을 수용하면서 그것들의 정신을 바르게 구현하고자 하신 것이다. 따라서 유대교의 전통을 경시하는 자유주의 유대교보다는 그것을 보존하고자 하는 보수주의 유대교가 나사렛 예수와 공통점이 많았던 것이다. 예수나 바리새인들은 모두 안식일 규례와 정결법을 존중하였으나 그것들을 이행하는 방식이 달랐다. 예수는 내면성을, 바리새인들은 외면성에 치중하였다. 예수는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가르치시고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의 조문에 얽매여 율법의 정신을 놓쳤다. 그래서 둘 사이에 논쟁이 자주 일어난 것이다. 논쟁은 주로 안식일 준수와 정결법에 관련된 것이었다. 나사렛 예수와 바리새인들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다음과 같이 열거될 수 있다.

I. 공통점

1. 구약의 율법을 믿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믿었고 율법 준행을 종교의 핵심으로 간주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율법이 명하는 윤리적 조항을 지키려고 애썼다. 바리새인들은 613조문(條文)으로 된 계명과 규례를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겼다. 그중에서도 365조문은 소극적인 것이고 245조문은 적극적인 것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이 조문이 율법 종교 전체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바리새 정통주의자들은 이 조문(條文)만이 진리라고 보았다. 그래서 613조문에 몇조문을 첨부한다거나 빼는 것은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그래서 이들에게 예수는 이단자로 취급된 것이다.

예수도 마찬가지로 유대의 경전을 읽었고, 구약을 소중하게 여겼다. 예수 자신이 유대인이었다. 바리새인들과 같이 예수도 구약성경을 믿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회당에서 유대교가 기반하고 있는 구약의 성경을 열심히 읽었다. 예수는 성경을 폐할 수 없으며, 율법은 일점 일획도 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복음서 저자 마가는 바리새인이 예수의 제자들이 금식(禁食)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시비를 거는 것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막 2:18). 예수 자신은 금식을 부정하지 아니하신다고 이르신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막 2:19-20). 유대인들은 회개와 속죄를 수행하기 위하여 금식하였고,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도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였다(눅 18:12). 그러나 메시아이신 예수가 계신 중에는 제자들은 잔치의 주인공 신랑과 같이 있기 때문에 속죄일에 행하던 금식 자체는 불필요하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기념일인 성 금요일에는 금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가르치신 것이다.

2. 하나님의 사역과 기적을 믿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시고 병자를 고치신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들은 고칠 수 없는 병자들을 고치는 예수의 기적을 보고 예수가 자기들 종교를 위협한다고 생각하였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예수께서 나면서 소경된 자를 고치신 일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는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요 9:6)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요 9:7)하시고 소경을 치유하신다. 이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은 치유받았다는 소경의 말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에게 이 사람이 정말 소경으로 태어났는지를 묻고 소경에게 이른다: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요 9:24).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기적을 보고 당황하였다. 이들은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시는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기적을 일으킨 예수를 자기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로 간주하였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이 젊은 청년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나타난 것을 보고 오히려 이 젊은 나사렛 출신 청년의 사역을 하나님의 사역으로 받아 들여야 했다. 그리고 이 나사렛 청년 예수의 가르침을 자세히 연구하면서 자신들의 율법과 유전(遺傳)에 얽매임과 낡은 관습에 대한 갱신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직업 종교인들이 되어 이 젊은 청년 예수가 자신들의 종교와 직업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여기에는 인간의 제도 종교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유전(遺傳)을 절대화하고 종교적 권력을 내놓지 않고 자기 소유화하며 이에 대한 도전을 배척하고 제거하려는 인간 원죄성이 내재되어 있다.

3. 부활과 내세를 믿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과 내세를 믿지 않았으나(마 22:23-28), 바리새인들은 부활과 내세를 믿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교의 가르침을 계승하는 정통파였다. 예수는 유대교가 증거한 부활신앙에 근거하여 종말에 일어날 두 가지 부활에 관하여 설교하신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예수는 단지 죽은 모든 자가 부활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들이 생명의 부활이나 심판의 부활에 직면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예수는 심판과 영생이 내세에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아들의 음성을 듣는 때에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4-25).

“이 때”란 하나님의 아들인 나사렛 예수의 복음을 듣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말한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기대한 아주 먼 미래에 있을 내세의 사건이 아니라 이미 나사렛 예수의 현재적 복음 사역 속에서 이루어지는 종말론적 사역을 말한다. 예수의 복음사역 자체가 종말론적 사건이다. 영생과 심판은 내세에서 이루어지기 전에 벌써 지금 하나님 아들의 복음 선포의 시각에 이루어진다. 예수는 종말론적 심판은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8-19).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믿지 아니한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미래에 이루어질 종말론적 심판과 영생이 지금 예수의 종말론적 사역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저 멀리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일어날 막연 한 사건을 기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지금 믿음의 수용 행위나 불신앙의 거부 행위에서 이미 야기되고 있다. 그러므로 복음은 막연한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현재적 종말론적 사건이므로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에서도 그것이 일어날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4. 니고데모는 진실한 바리새인이었다.

니고데모는 예루살렘의 공회의 일원이었다. 이 공회 안에서 그는 서기관 집단에 속한 인사(人士)였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를 “이스라엘의 선생”(요 3:10)이라고 칭했던 것이다. 서기관들은 대다수가 바리새파 출신이었다. 니고데모와 그의 많은 동료들에게 예수는 하나님의 보내신 선생(랍비)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가 행하신 표적들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여 밤에 예수께 와서 그의 신앙을 고백한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중생의 도리를 가르치신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느니라”(요 3:5). 니고데모는 중생의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니고데모는 질문한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 3:4).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요 3:9). 예수는 대답하신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6-8). 종교는 단지 종교 제도에 머물어 있으나, 영은 제도와 인습을 뛰어 넘어 바람이 보이지는 않으나 하나의 영적 실재로서 인간의 인격을 변화시킨다.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실은 유대교라는 율법 종교의 지식으로는 알 수 없다. 이스라엘의 선생, 문자적 율법 지식만으로는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인자(人子)라는 사실을 알 수 없다. 예수는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 온 인자임을 증언하신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

예수는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자신이 십자가에 들려야 하심을 예언하고 있다. 예수는 자신의 십자가 사건을 구약 이스라엘의 구리뱀 사건과 비교하여 설명하신다. 구약 민수기에 의하면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민 21:5). 이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여 불뱀을 보내어 징계하신다: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았다”(민 21:6).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구리뱀을 장대에 세운다. 구리뱀을 보는 자들은 나음을 입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민 21:8-9).

예수는 구리뱀 사건에 유비하여 자신의 십자가 처형의 사건을 예언하신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인자가 들려야 하리니”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그의 죽으심이 십자가 대속의 사건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예수는 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하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그 날 밤 니고데모는 변화받은 사람이 되어 돌아간다. 니고데모가 예수의 제자가 된 증거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그의 시신(屍身)에 사용할 몰약과 향품과 세마포를 가지고 와서 예수를 장례한 데서 증명되어진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요 19:39-40). 저자 요한은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와 니고데모의 담화(談話)의 끝맺음을 하지 않고 있는데, 요한복음 19장에서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라는 말을 넣음으로써 3장의 담화(談話)가 열매가 있었음을 우리에게 암시해주고 있다. 니고데모는 그 날 예수로부터 중생의 도리를 듣고 예수가 하나님 아들인 것을 믿고 거듭남을 체험하고 예수의 제자가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계속)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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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 | 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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