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기독교(2)
종교나 윤리보다도 높은 위상
다음의 모든 질문에 알맞은 답은 무엇일까? (1) 종교가 아니면서 종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2) 어떤 면으로는 종교보다 더 폭넓은 지지와 호응을 얻고 있다. (3) 시공을 초월하고 빈부귀천을 망라하는 인류 보편적 가치관이다. 정답은 바로 박애주의(博愛主義)다.
박애주의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가치관으로 자리 잡아왔는데, 그것은 쉽게 말해서, 사랑과 선행보다 높은 가치는 없다는 것이다. 개인을 대상으로 한 사랑이 아니라더 넓은 대상을 향한 사랑이기에 그 가치는 훨씬 더 높게 여겨진다. 다음의 글이 바로 이 가치관을 잘 드러내고 있다.
참된 종교의 진리는 무엇보다 모든 것을 함께 살리는 공생(共生)의 원리여야 한다. 이러한 원리는 모든 것을 함께 살리는 것이므로, 모든 것들의 순수한 본심, 즉 양심이 기뻐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모든 것들의 양심이 모두 기뻐하는 것, 모든 것들을 함께 살리는 것, 그런 것이란 구체적으로 과연어떤 것인가? 그것은 곧, ‘밝음’ • ‘바름’ • ‘착함’이다. 이것들은 우주만물을 살리는 법칙이며, 모든 생물이 함께 살아가는 기본 윤리인 것이다.(한길로, 무가애, 예지각, 140쪽)
이 글은 불교학자가 쓴 것이지만 실상은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의 가치관과 사상을 보여주는 글이다. 양심대로, 착하게, 모든 이들을 위해 사는 것이 진짜 종교가 갖는 진리란 주장이다. 이 사상은 현 시대를 사는 평범한 한국 사람의 생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오랜 옛적에 영화롭게 살았던 서양 사람의 생각이기도 하다.
꾸준히 바른 길을 가라. 항상 올바른 생각과 행동을 한다면 행복의 조용한 여울목 가운데서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명상록, 청목서적, 52쪽).
이 글은 로마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한 말이다. 두 개의 인용 글들이 보여주는 사상은 시공을 초월해 서로 통하고 있다. 우리는 결국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착함을 추구하는 본성(즉, 도덕성)이 있고 그것의 가치를 최상위에 두는 본성이 또한 있다라고. 그런데 이런 생각과 달리, 도덕과 차원을 달리하는 신앙의 세계가 또한 있음을 발견한 사람들도 있다.
도덕의 길이 개선(改投)과 수선의 길이라면, 신앙의 길은 거듭남의 길이다. 도덕의 길이 자신을 고치고 수선하는 길이라면, 신앙의 길은 자아의 파산을 인정하는 길이다. 이 시대 기독교가 참 기독교답지 못하게 된 커다란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독교와 박애주의(선행, 도덕. 윤리)가 뒤죽박죽 섞여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구원자가 아닌 윤리 교사나 박애주의자로 인식하고 있다. 박애주의는 좋은 것이지만 그것은 가치관일 뿐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고차원의 도덕일 뿐 진리가 아니다. 기독교는 가치관이나 도덕이 아니라 거듭나는 것이다. 그 거듭남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것을 인정하지않고 거듭남의 신비를 알지도 못한 채 자신만의 기독교를 만들어 온 세상에 퍼뜨려온 위인들을 한번 살펴보자.
알버트 슈바이처, 역사상 가장 엄청난 짝퉁 기독교인
아프리카의 성자(聖接) 또는 20세기의 성자로 불리는 알버트 슈바이처는 마하트마 간디 그리고 마더 테레사와 더불어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박애주의자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인류를 향한 형제애’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52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한 평생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봉사했던 의사로서 널리 알려졌지만, 슈바이처는 또한 철학박사이자 신학박사였으며 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했다.
특히 그는 소위 ‘역사적 예수’에 대해 연구를 깊이 하여 성경에서 나타내는 예수를 문자 그대로 믿지 아니하고, 자신만의 상상력을 사용하여 ‘진짜’ 예수를 찾는 시도를 하였다. 그래서 소위 ‘자유주의’ 신학이 온 세상에 널리 퍼지고 ‘성경의’ 예수가 아니라 ‘신학자의’ 예수를 창조해 내는 데 엄청나게 이바지했다. 그의 사상은 한마디로,“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인 예수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인류 가운데 최고의 자비와 희생을 보여준 선각자로서의 예수를 믿기에, 그를 본받아 나도 헌신과 섬김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슈바이처는 예수를 따라갔지만 성경이 말하고 선포하는 예수가 아니라 그냥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으로서의 예수를 따라갔다. 그런데 세상은 이러한 슈바이처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독교인으로 대접을 한다. 그의 진짜 사상은 기독교인으로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박애주의자로서 만들어진 것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의 선행은 매우 위대한 것이나 그의 신앙은 절대 진품이 아니다. 슈바이처가 짝퉁 기독교인이라는 점을 그의 자서전을 통해 확인해 보자.
19세기 후반에 행하여진 과학적 연구에 의하면, 예수는 그가 지상에 건설하려고 한 순수한 윤리적인 하느님의 나라를 신자들에게 알려 주어 그들이 바라고 있는 초자연적 메시아의 나라를 다시는 기대하지 않도록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설에 의하면, 민중은 예수를 메시아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오히려 예수는 민중에게 정신적 • 윤리적 메시아에 대한 신앙을 가르치고, 그 신앙에 의하여 그를 그러한 메시아라고 인정하게 하려 했다.
슈바이처는 19세기에 급속도로 퍼져간 과학 만능주의를 따랐다. 과학으로 정신과 마음과 종교까지도 살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자기가 생각할 때 꽤 ‘과학적’인 방법으로 예수를 재해석했다. 예수가 윤리적인 의미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가르쳤다고 슈바이처는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이 아닌 박애주의자가 갖는 예수 인식의 한계다.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 곧 구원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슈바이처는 주장하는데, 그는 신학자임에도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한 것 같다. 아니, 실상은 그가 그 구절을 읽지 못한 게 아니라 읽었어도 그것을 예수가 말씀하신 것으로 믿지 않았다. 성경이 선포하는 것을 그대로 믿지 않고 자신이 추구하는 관념에 맞는 구절만 골라서 수용하는 것이 자유주의 기독교의 특징이다. 그는 성경의 온전함을 믿지 않았는데, 그것은 예수의 참 모습이 초대 교회 성도들 특히 제자들에 의해서 왜곡되고 변질됐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가정(?)을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 마태, 요한, 바울 같은 사도들까지도 진실성을 결여한 인물이라고 보거나 아예 예수 추종자들이 사도들의 이름으로 거짓문서를 작성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도들이 성령으로 성경을 기록한 것을 믿지 않았으니 구약 선지자들이 성령으로 성경을 기록한 것을 인정할 리 만무했다. 성경을 사람이 쓴 저작물로 확신하는 것이 결국 슈바이처 사상의 시작이고 끝인 것이다.
우리로서는 예수가 그렇게도 혐오감마저 드는 후기 유대교의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이해하기 곤란할 뿐만 아니라 불쾌하게까지 느껴진다. 그래서 예수전(傳) 연구는 차라리 두 개의 가장 오래된 복음서의 신빙성을 어느 정도 의심하고 거기에 기재되어 있는 예수의 말씀의 내용 일부분의 진실성을 부정하려 한 것이다.
슈바이처는 복음서의 진실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이 독일에서 꽃을 피운 것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예수의 진짜 모습을 찾아내는 데 맨 앞에서 애쓴 독일 신학의 영적 위대함과 독창성을 장차 후대의 사람들이 알아줄 것이라 그는 확신했다. 그러나 그의 확신과 달리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이 들어간 곳은 모두 영적인 퇴락을 맞았음올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슈바이처의 확신, 산상수훈이 곧 예수 가르침의 핵심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슈바이처는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에 최고의 가치를 두었다. 그가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최고봉으로 산상수훈을 꼽았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산상수훈은 기독교인이 아닌 그 누구라도 탄복할 수밖에 없는 최고의 윤리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가 제시한 이 높은 수준의 윤리는 보통 사람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슈바이처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의 산상수훈은 내일 당장 세상이 끝난다는 종말관을 가진 사람만이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극단적 윤리관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오직 예수만이 산상수훈을 그대로 실천에 옮긴 위대한 인물이라고 인정했다.
산상수훈은 자유사상적 기독교의 이론의 여지가 없는 헌장(憲章)이다. 윤리적인 것이 종교의 본질을 이룬다는 진리가 예수의 권위로 확립된 것이다. (중략) 만일 교회에 예수의 정신이 있다면, 자유사상의 신앙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일 것이다.
윤리가 종교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슈바이처가 인간적 관점으로 기독교를 해석하고 있다는 증거다. 윤리교사로서의 예수라면 그 어떤 종교도 예수를 거부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슈바이처는 교회가 이러한 (윤리 교사로서의) 예수를 믿고 있다면, 모든 형태의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즉, 모든 이단 종파와 자유주의까지도 다 수용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 산상수훈은 기독교 헌장이며 그 중에서도 마태복음 7장 12절은 황금률(黃金律)로 손색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구절은 매우 위대한 가르침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구절이 성경의 핵심 구절은 아니다. 이 구절이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하는 결정적 가르침이 아닌 것은 다음의 글을 보아도 알수가있다.
종교는 욕망의 절제를 가르칩니다. 나의 욕망을 앞세우지 말고, 오히려 타인의 욕망으로 입은 피해를 감수하고 용서할 것을 가르칩니다. 바로 여기에서 궁극적인 평화가 실현되는 것을 말하는데, 각 종교에서 말하는 황금률이 모두 여기에 닿아있습니다. 공자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라” 하였고, 붓다는 “내게 해로운 것으로 남에게 상처주지 말라”하였으며, 예수는 산상수훈에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힌두교에서도 “내게 고통스러운 것음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하였고, 이슬람교에서도 “나를 위하는 만큼 남을 위하지 않는 자는 신앙인이 아니다”라고 강조합니다.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서도 이렇게 유사한 가르침을 말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더 이상 이 구절을 기독교의 황금률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이 구절은 ‘세상적인 시각에서 그렇게 불릴 수는 있지만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결코 황금률이 아니다. 이 구절보다 오히려 다음의 성구(聖句)가 기독교의 사상을 더욱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태복음 7:13-14)
슈바이처는 좁은 문이 아닌 넓은 문을 선택한 자다. 비록 한 평생 헌신과 봉사의 삶을 살았지만, 예수를 거부하고 자기 나름의 의(義)를 추구한 그의 생애는 안타깝게도 넓은 길이었다. 지금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길을 선택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인 가운데도 그런 길을 선택하는 자가 참으로 많다.
다음의 글은 국내에서 꽤 유명한 한 목회자가 슈바이처에 대해 우호적으로 쓴 글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알버트 슈바이처는 『문화와 철학』에서 저 유명한 ‘생명 외경’ 사상을 주창합니다. 슈바이처는 “선이란 생명을 보호하고 증진시키는 것이고, 악이란 생명을 부정하고 저해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의사요, 음악가였지만 유명한 신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주창한 ‘생명 외경’ 사상은, 유럽 문명사회가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수많은 인명피해를 냈고 강대국들의 국가주의가 서로 전쟁을 일으켜 생명을 경시하는 가치관의 혼돈 시기에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슈바이처가 말하는 생명 외경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한 생명 외경인가? 생명은 존엄하다는 일반적 가치관에 근거한 주장 아닌가? 이 정도의 가치관은 누구라도 말할 수 있고 수용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대단히 존귀한 사상이지만 생명 외경은 기독교의 핵심이 아니며, 그렇기에 슈바이처는 지금 기독교의 핵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슈바이처가 말하는 ‘선’과 ‘악’도 마찬가지다. 그의 선악 개념은 지극히 일반론적이다. 그러나 성경적 가르침은 아니다. 그의 선악 인식은 어떤 종교, 어떤 사상, 어떤 윤리도 동의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성경이 말하는 선악에는 하나님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이 인정하고 기뻐하는 것은 선이고,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고 싫어하는 것은 악이다. 이것이 성경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고백하는 선악의 개념이다.
현재 기독교에서는 슈바이처를 최고의 기독교 신앙인으로 여기는 경향이 워낙 짙기 때문에 이를 비판하는 것은 쉽지 않다. 보통의 기독교인은 물론 목사들마저도 그렇게 여기고 있기에 이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그뿐 아니라 나름 똑똑하다고 하는 인물들이 너도나도 슈바이처를 인용해서 기독교를 왜곡시키고 있으니 가수 조영남 같은 이도 여기에 한몫하고 있다.
이런 때에 슈바이처와 바이스는 우리더러 빨리 미련에서 벗어나 요한의 오판과 예수의 실패를 인정하자고 노골적으로 주장했다. 하늘나라의 왕림은 나태한 민중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한번 써 본 문학적인 가설이었다고 부추겼다. 요한의 오판과 예수의 실패를 인정한다고 해서 예수의 체면이 손상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예수의 품성은 우리가 평생 믿고도 남을 만큼 영원히 돋보인다는 것이다. 굴러가지도 않던 무의미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하나님의 수레바퀴로 바꿔 낀 예수의 공로, 이제 서서히 구르기 시작한 수레바퀴에 깔려 죽은 예수의 행적 하나만으로도 예수는 충분히 인정받을 만한 존재라는 것이다.
예수가 본래 부여받은 사명이 있었는데 그만 그것을 성취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 슈바이처의 시각이다. 한마디로 예수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그것을 잘못 판단해서 예수를 메시아 곧 구원자로 믿고 대중에게 그것을 선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성경을 짓밟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마지막 순간 “다 이루었다”고 선포한 것을 비웃는 것이다.
슈바이처 외에 통일교의 문선명 같은 이도 이같이 주장한다. 예수가 실패했지만 슈바이처는 그래도 그를 존경하기에 그를 따른다고 했다. 그런데 문선명은 예수가 실패했기에 자기가 그 일을 완성했다고 한다. 전자는 박애주의자이기에 존경의 대상이 되고 후자는 기독교 이단이기에 비웃음의 대상이 될지는 모르지만, 예수를 실패자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실상 예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모두 불신앙의 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슈바이처에게는 커다란 덕(德)이 있었지만 그것이 예수를 향한 참 신앙을 대신할 수 없기에 그는 죄 가운데서 인생을 마친 것이다. 이 점이 불편하게 느껴지더라도 할 수 없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 내용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키에르케고르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매우 정당하다.
죄의 반대가 덕이 아니라 신앙(믿음)이라 함은 그리스도교 전체에 있어 가장 결정적인 규정의 하나인 것이다. 믿지 않는 것이 선택의 문제나 취향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죄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을 키에르케고르는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슈바이처가 예수 그리스도를 잘못 알고, 성경을 잘못 믿고, 진리를 잘못 선택한 것은 명백한 죄인 것이다.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눈먼 기독교>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박태양 목사 | 중앙대 졸. LG애드에서 5년 근무. 총신신대원(목회학), 풀러신대원(선교학 석사) 졸업. 충현교회 전도사, 사랑의교회 부목사, 개명교회 담임목사로 총 18년간 목회를 했다. 현재는 (사)복음과도시 사무총장으로서 소속 단체인 TGC코리아 대표와 공동체성경읽기 교회연합회 대표로 겸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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