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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일 칼럼] 죽어도 무슬림으로 죽어야만 하는 줄 알았어요!

사진: Milad Fakurian on Unsplash

밖에서 보는 이슬람(29)

내가 이렇게 간증문을 쓰면서 내가 만난 주님을 소개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제일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친구 제이에게 감사한다. 제이를 못 만났더라면 나는 아직도 예수님을 그냥 꾸란 속 여러 선지자 중 하나로 알고 살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의미 없이 살다가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진리가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고, 그 진리 속에서 황금 같은 내 젊음을 보낼 것을 생각하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비록 지금의 신앙적 현실이 암담하고 자유롭지 못하지만, 진리를 알았고, 그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했으므로 지금 나는 평안하다. 그리고, 이 평안을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빼앗기지 싶지 않다.

제이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교 2학년 초 기숙사에서였다. 그때는 여러 복잡한 생각으로 혼란과 방황의 시간을 보내던 시기였다. 나는 조용한 시골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면서 무척이나 엄하고 보수적인 부모 밑에서 자라났다. 내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그때까지 종교적 행위를 지속해 왔다. 매일 아버지를 따라 메카를 향해 드려야 했던 기도들, 매년 마을 전체 행사의 하나로 한 명의 예외도 없이 행해졌던 한 달간의 라마단 단식, 매년 한 번씩 나도 잘 모르는 내 죄를 위해 아버지가 대신 잘라주던 희생양.

여러 율법의 제한 속에서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어느새 고3이 되었고, 정신없는 입시 준비를 거쳐 꿈에도 그리던 대도시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집을 떠나 대도시의 기숙사에서 혼자 지내게 되었고, 부모의 곁을 떠나 은밀한 자유를 만끽할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매일같이 메카를 향해 기도하지 않아도 되었고, 종교적 행위를 지속하지 않아도 누구 하나 간섭하는 사람이 없어서 행복했다.

그러나, 여러 도시에서 온 학생들과 함께 시작한 객지에서의 기숙사 생활은 그리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머무는 기숙사에는 다양한 학생이 지내고 있었는데, 학문의 진정한 추구보다 같은 무슬림이면서도 신앙적으로는 보수파, 온건파로, 정치적으로는 좌익과 우익 등으로 나뉘어 매일같이 격한 논쟁이 있었다. 가끔은 그룹 안에서 패싸움까지도 일어났으며, 경찰이 기숙사 안에까지 들어와 잠자고 있는 학생들을 잡아가는 일까지도 생기곤 했다.

그리고, 주위에 스스로 무슬림이라고 말하는 많은 학생이 기숙사 안 기도처에서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면서도, 기도 후 이율배반적 행동들을 보면서 나는 무슬림으로 살아가고픈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더 이상 알라는 존재하지 않으며,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학생들까지 동원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후로 나는 형식적으로 따라 하던 기도조차 하지 않았다. 무슬림으로 해야 하는 어떠한 종교적 행위도 이제는 나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 되어버렸고, 세상의 일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내 종교에 관해 물어보면 나는 여전히 무슬림이었을뿐만 아니라 무슬림이 아닌 사람을 만나면 “왜 무슬림이 안 되느냐?”라고 설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철저히 이중적인 사람이었다.

바로 그때 만난 사람이 제이였다. 제이는 본인을 처음부터 기독교인이라고 소개하면서 유창한 우리말로 인사했을 때 나는 속으로 비웃으면서 생각했다. 내가 만난 무슬림이라고 자처하는 그 많은 사람의 위선을 보았듯이, 제이도 한낱 이름뿐인 그냥 종교인일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제이에게 ‘알라’는 없다고, 더는 종교적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제이가 우리 종교에 더 관심을 끌게 하려고 그를 돕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와 제이는 줄곧 같은 기숙사, 같은 방에서 생활했다.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각자의 학교생활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우리는 함께 보냈다. 그러나, 제이는 전혀 몰랐을 것이다.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말한 제이의 일거수일투족을 끊임없이 몰래 관찰하고 있었다는 것을.

왜냐하면, 기독교인의 위선적 행동을 발견하자마자 막 따질 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제이에게 어떤 위선적인 행동이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위해 그의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는 따듯한 말까지 건네주었다. 제이는 언제나 웃으면서 나를 친동생같이 대해 주었다, 고향을 떠나온 동병상련의 심정을 함께 나누면서 언제나 나를 정감 있게 대해 주어서 나도 모르게 어느덧 비판하려는 긴장된 태도에서 그가 외국인이라는 것도 잊어버린 채 그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조차 들게 되었다.

그에게는 나와 다른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는 적어도 진짜 신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이렇게 함께 생활하게 된 지 1년 정도가 흘렀을 때 제이로부터 성경 공부 모임에 초대받았다. 나는 그때까지도 비록 이름뿐이라고 해도 스스로 무슬림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의 모임에 함께 참석한다는 것이 몹시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제이와 같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한 번쯤 가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솔직히 그의 제의를 거절하는 것이 미안했기 때문에 용기 내서 같이 가 보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 모임에 간 것이 지금 예수를 믿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날 제이와 같이 성경 공부 모임에 초대받아 가서 몇 가지 사실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 그날 성경 공부 모임에 참석한 이들 대부분이 나처럼 현지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 날 성경 공부 모임을 따라가면서, 속으로 “오늘 꽤 많은 외국인을 만나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내 추측은 영락없이 빗나가버리고 말았다. 그날 거기 참석한 친구들을 통해 들은 사실은 그리 많지는 않지만, 현지인들로 이루어진 교회와 예수 믿는 이들의 모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모든 터키인은 태어나기 전부터 무슬림이고, 태어난 후에도 무슬림이요, 죽은 후에도 무슬림’이라는 나의 고정관념이 영락없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거기 참석한 현지인 모두가 전에는 무슬림이었지만, 지금은 모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그들의 언행이 지금까지 보지도 듣지도 못한 새로운 것으로 다가왔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날 함께 식사하고, 성경 공부 모임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이들에게도 제이한테서 느낀 것처럼 내게는 없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내게는 없고 이들에게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하는 생각이 모임 내내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나를 처음 대하는데도 마치 나를 한 가족처럼 따듯하게 대해 주었고, 내게는 그들의 지나칠 정도의 친절이 오히려 부담스러워 등줄기에서 식은땀조차 흐를 정도였다.

나는 이전에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낯선 이질감으로 되도록 빨리 거기서 뛰쳐나오고 싶었다. 그러나, 나를 초대한 제이를 생각해서라도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가족에게서조차 받지 못한 친절과 따듯함을 그날 그 모임에서 받았기 때문에 그런 것에 전혀 익숙하지 않던 내게 싫지 않았으면서도 곤혹이었다.

그날 이후, 그 모임에서 보았던 이들의 참신한 모습이 계속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제이를 따라 계속해서 그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는 조금씩 이들이 믿는 대상에 대해 알아 가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덧 나는 졸업하게 되었고, 제이의 소개로 기독교인들로 이루어진 회사에 취직도 하게 되었다. 나는 그 회사에서 고정 직원이 되었고, 같이 기도도 하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물론, 제이를 따라 교회에도 나가게 되었지만, 사실 나는 여전히 무슬림이었다. 이슬람을 버리고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절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비록 내가 이미 알라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완전히 이름뿐인 무슬림이었지만, 그래도 무슬림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 사람들 사이에 이런 얘기가 있다. “이슬람을 버리고 다른 종교로 개종하느니, 아무것도 안 하는 이름뿐인 무슬림으로 그냥 남아 있어라!”

시간이 흐르면서 내 마음은 괴로웠고, 더는 이대로 지낼 수 없었다. 내 일생 가장 중요한 결단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도 하고, 교회에서 찬송을 부르면서도 아직 기독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결단의 시간은 그렇게 어렵지 않게 다가왔다. 제이가 어느 날 조용한 시간을 갖고 싶어 했고, 그때 제이가 내게 조그마한 소책자를 심각하게 읽어주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대략, 하나님이 사람들을 사랑하시는데, 자기 죄 때문에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았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를 씻어 보려고 여러 종교적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어 보려고 하지만, 그건 전혀 불가능한 일이며, 오직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제이를 따라다니며, 교회와 성경 공부에서 늘 들었던 내용이었는데, 그날따라 아주 생소하고 놀라운 소식처럼 내 귀에 쏙쏙 들어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전혀 망설임 없이 제이와 함께 손을 잡고 간단한 기도문을 따라 하면서 예수님을 내 주와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내가 완전한 자유의지를 들여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얼싸안고 울고 있었다. 제이도 울고, 나도 울었다. 남자답지 않게 그때 왜 그렇게 눈물이 나왔는지 지금도 잘 이해가 안 되지만, 분명 기쁨과 결단의 눈물이었다. 후에 내게 닥쳐올 뜻밖의 고난도 예기하지 못한 채 말이다.

이후로 내 생활은 내면으로부터 시작해서 깊게 변화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홀가분했고 다시 시작하는 신앙생활이 얼마나 평안한지 몰랐다. 이후로 계속된 제이와의 새벽기도와 성경 공부를 통해서 나는 예수님을 더 알아 갈 수 있었다. 이제는 고향의 가족을 위해 기도할 정도로 주님은 내 믿음을 자라게 하셨다. 그리고, 얼마 후의 있던 세례도 담대함과 기쁨으로 받았다. 드디어 이제, 나는 속도 겉도 같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내 새로운 생활은 고향에 내려가 가족들에게 개종했다는 얘기를 꺼낼 때까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새해를 맞이하여 직장에서 휴가를 받아서 잠깐 고향에 내려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부모님과 형제들 앞에서 내가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담대하게 얘기하게 되었다. 그런데, 내 이런 뜻밖의 얘기는 내 모든 상황을 송두리째 바꿔 놓아 버리게 되었다. 가족은 나에 대한 노여움보다도 오히려 동네에 이 소문이 퍼질까 하는 두려움으로 조심스럽게 없던 얘기로 하겠으니 직장도 당장 그만두고 이곳에서 지내다가 군대 가고, 결혼도 하라는 엄명이 내려졌다.

정말 깜깜한 순간이었다. 나는 순간 기도하기 시작했다. 나의 기도는 한마디로 탄식이었다. “주님, 어떡해야 합니까? 도와주세요!” 이후로 나를 계속하여 따라다니며 감시하는 형들 때문에, 직장 동료에게 내 상황을 알리지도 못한 채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갔다. 그 한 달 동안 가족과 같이 지내면서 나는 정말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표시를 내 삶의 변화로 보여주라고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이후로 나는 가족 앞에서 예전보다 더욱 친절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나에 대한 가족의 경고 조치에도 전혀 화내거나 대들지 않고 참으면서 이 상황을 놓고 기도만 했다. 또한, 시간이 날 때마다, 부모님께 한국에 가기로 약속되어 있어서 가야 한다고 계속 설득하면서 기다렸는데 놀라운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나를 불러놓고 한국에 가기로 이미 약속했다니 다녀오라고 허락을 하시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좀 우스운 얘기지만, 돌아올 때 삼성 비디오카메라 하나 사 오라고 돈까지 주시는 것이었다. 할렐루야!

어느덧 다시 시간이 흘러서 약 3주간의 한국교회 방문을 끝내고 다시 고향에 돌아와 있다. 부모님도 내가 사 온 삼성 비디오카메라에 만족하셨고, 더군다나 다른 곳으로 피하지 않고, 약속한 대로 곧장 고향 가족 곁으로 돌아온 나를 어느 정도 인정하시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물론 부모님이 내 기독교 신앙을 인정했다는 얘기가 결코 아니지만, 틀림없이 나를 이렇게 붙잡아 두면 시간이 저절로 해결해 주어서 다시 예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것으로 생각하신 것 같았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3주는 내 신앙을 더 굳건하게 다져 주었고, 주님은 이제 이 신앙의 불모지인 이 땅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확실히 보여주셨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나는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러 군대에 들어간다. 아마도 유일한 그리스도인 군인으로 지내게 될 것이다. 약간의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난 한국교회 방문 때 보았던 부흥된 한국교회 뒤에 있던 초창기 순교의 피와 내 또래의 수많은 청년이 우리나라와 우리 교회를 위해 울면서까지 기도하는 모습을 잊지 않는 한,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입대를 앞두고 제이가 내게 준 성경 말씀이 하나 생각난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복음기도신문]  

김종일 |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 졸업, 전, 중동선교회(MET) 본부장, 현, 터키어권선교회 대표. 국내 이슬람권 선교사 네트워크(M-NET KOREA) 회장, 저널 ‘전방개척선교(KJFM)’ 편집인, 아신대학교(ACTS) 중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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