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13장을 보면 열두 정탐꾼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보고합니다. 그 장면 말씀을 보면 소스라치게 놀라게 됩니다. 열두 정탐꾼들은 리더들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40일간 정탐하고 돌아와 보고한 뒤 고기를 먹었다면 메추라기를 먹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직접 공급하신 고기입니다. 메추라기가 없었다면 차선책으로 만나도 먹었을 것입니다. 만나도 하나님께서 직접 공급하신 것입니다. 보고하는 때가 낮이었다면 구름기둥, 밤이었다면 불기둥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있는 그들은 가나안 땅에 대한 보고를 객관적으로 합니다. 우리가 볼 때 악한 보고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 보고를 지극히 현실적이고 정상적이라고 여기고 또 지혜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임재 가운데 있었지만 현실을 말합니다. “포도송이가 엄청나게 크더라, 기름진 땅이 있더라, 그런데 우리보다 뛰어난 사람들 거인들이 살더라, 그들의 문명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 초라하더라, 그래서 그들을 이길 수 없다!”
지극히 현실적으로 현실을 보고한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공급받고 주님의 임재를 보지만 우리 마음은 현실, 이 세상의 영향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제자훈련을 하고 십자가를 보고 부활을 경험해도 관심사는 세상에 있습니다. 이 땅에 있습니다. 문제와 상황을 보고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더라! 그래서 너희들 마음은 나에게 있어야 한단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 마음을 나에게 주렴. 십자가를 말하지만 그 십자가가 영광스러운 십자가가 되려면 마음이 지금 주님께 가 있느냐 하는 것을 확인해야 됩니다. 우격다짐으로 믿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밀어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비전선교단에 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새벽이슬 같은 청년 500명 600명이 모였습니다. 모인 사람의 1/4은 간사입니다. 간사는 미전도종족을 찾아가는 선교사가 되기 위해 훈련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7년간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이 훈련 과정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 친구들이 모인 것입니다. 얼마나 뜨겁고, 얼마나 전심을 드리고 있고, 얼마나 열심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삶은 삶입니다. 현실의 삶에서 영향을 받는 사도행전의 제자들처럼, 민수기 열 명의 정탐꾼처럼, 그들에게도 현실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말하며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목사가 그들에게 필요했습니다.
마음을 살피지 않으면, 마음이 어디 가 있는지 보지 못하면, 주님의 임재 가운데 있더라도 현실에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실존입니다. 기도했습니다. “주님! 그 실존 깨닫게 해주시고 그 현실 깨뜨려 주세요!” 주님의 승천이 임박한 순간에도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때냐고 묻는 어처구니없는 질문! 이 어려운 시국에서도 그런 일은 벌어지고 있습니다. 좌우 이념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이 실제로 우리 주인인지 경험하기를 축복합니다. 인본주의와 신본주의, 진화론과 창조론만 남아있습니다. 좌와 우가 아닙니다. 좌와 우, 모두 인본주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좌와 우로부터 떠나가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마음은 왜 주님께 못 가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시편 95편은 찬송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르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양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런데 므리바와 맛사에서처럼 마음이 완악해질 수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 삶의 터전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터전은 주님입니다. 삶의 현장은 주님입니다. 주님이 나의 삶의 터전인 것을 증거하는 곳이 이 땅입니다. 므리바와 맛사에서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완악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행했는데 결과가 물이 없었습니다. 순종했는데 물이 없습니다. 풍요롭지 않았습니다.
순종했는데 마실 물이 없어서 다툼이 생깁니다. 현실에서 부족함이 생기니까 다툼이 일어납니다. 모세와 다툽니다. 목사와 다투고 믿음의 사람들이 서로 다툽니다. 죽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지만 현실에서 문제가 닥칠 때는 피터지게 싸우고 갈라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경험했습니다. 10가지 재앙도 경험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생하게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문제가 생기니까 바뀝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했음에도 현실에서 마실 물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출애굽은 구원입니다. 그 백성들은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그럼 우리도 월급 두 달 정도 못 받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주님을 배반하고 칼도 들 수 있는 존재입니다. 믿음이 다냐고, 믿음이 그거냐면서 얼마든지 대적할 수 있습니다. 시편 95편과 히브리서 3장의 말씀이 그런 말씀입니다.
목마르고 힘들 때, 구원하셨습니다. 장자의 죽음도 넘어가게 하시고, 바로 군대를 홍해에서 수장시키셨습니다. 그럼 목마르지 않게 물을 좀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정말 어렵게 어렵게 주시지 않습니까? 왜 그러실까요? 그냥 시원하게 주셔서, “와! 우리 주님 살아계시네. 할렐루야!” 하게 되면 서로 윈윈 하는 것이 아닐까요? 왜 그토록 우리를 목마르고 목마르게 하실까요? 우리를 보면, 어쩌면 그렇게 목마른 사람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그런 목마름이 생겨나는 이유는 단 하나뿐입니다. 우리의 완악함과 완고함을 해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우리가 그 완고함 때문에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완악함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육체가 있으니 육체를 통해 보고 듣습니다. 마이크가 있다면, 이 마이크를 마음과 생각으로 인정합니다. 마이크가 만일 금으로 되었다면, 마음이 혹하게 될 것입니다. 3억 원 정도 가치를 갖는 마이크라면, 눈으로 그것을 보고 마음에 달라붙게 됩니다. 마이크를 함부로 아무 곳에 두지 않을 것입니다. 금고에 넣어도 안심하지 못할 것입니다. 30억 원 정도 가치라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육체를 통해 우리 마음에 들어온 그것이 우리를 이끌고 가는 것이 완악함입니다. 성경적인 해석입니다. 마음에 달라붙어서 우리에게 실제로 영향을 끼치는 그 완악함이 있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줄 수 없고, 하나님의 길을 즐거워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목마르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큰 통찰이 열립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이런 목마름을 경험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 완악함도 거두어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정해야 합니다. 목마름이 있을 때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어찌 이런 어려움을 주십니까.’ 하고 벌벌 떠는 인생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처음부터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주님! 이 완악함을 고쳐주시옵소서! 내 마음은 주님의 것입니다. 염려야, 근심아! 원망아! 내 마음은 그것으로 채울 수 없다! 내 마음에는 예수님만 계셔야 한다!”
너의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하나님의 길을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12장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하십니다. 마음이 새롭게 변화되어 주님께 가 있으면 하나님의 뜻은 항상 선하시다고,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쁘고 온전하시다고 노래하게 됩니다. “예, 아멘! 주 예수여!” 우리 마음이 주님께 가 있어서, 마음을 새롭게 되었을 때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어려운 시국을 허용하시기도 하십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계셔!” 얼토당토하지 않은 뻔한 정책이 보여도 믿음이 있다면, “주님의 뜻은 기쁘셔!”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 하고 오히려 주님을 주목할 것입니다.
본 회퍼는 히틀러를 죽이려고 가담했다가 사형 됩니다. 그리고 독일이 항복합니다. 본회퍼가 히틀러를 죽이지 못하도록, 그것을 허용하지 않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것이 여러분에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히틀러를 먼저 죽게 하지 않았을까요? 답은 너무 쉽습니다. 그럼 우리가 앞으로도, 히틀러를 죽이는 일이 가장 먼저 되어야 합니까? 매사에 히틀러를 죽이는 일을 해야 할까요? 그것이 주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주신 것입니다. 마음이 주님께 가 있으면 해석이 너무 쉽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다는 말씀이 그때 이해됩니다. 문제에 집착하는 완악함을 보게 합니다. 우리의 뜻이 즐겁고 기쁘고 이루어져야 한다며 주님을 가져다 쓰는 믿음이 아닌 믿음의 악함이 일깨워져야 합니다.
꽃밭에 향기, 봄날의 햇살 같은 하나님의 다스림 안으로 들어가, 진자리든 마른자리든, 기쁜 자리든 아니든 ‘예, 주님이면 됩니다!’ 영어 못하는 사람에게 통역관으로 가라고 하면 갈 수 있는! 밥 하라고 했다가 밥 먹지 말라고 하면 ‘네’ 하고 불편하지 않을 수 있는! 완악함에 끌려가지 않고 주님의 마음을 볼 수 있는, 복음 따라가는 여러분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에필로그]
‘내 아들아’ 하고 부르신 것은 세상에서 주님에게로 부르신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부르신 까닭은 주님과 함께 동행하자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따라가는 삶입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나를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어디까지 따라갈까요? 공생애 기간 중 온갖 기적을 본 것까지요? 십자가까지요? 부활까지요? 아닙니다. 하늘보좌까지 따라가는 것입니다. 함께 올리심을 받아 하늘보좌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몸은 실제로 이 땅에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먼저 따라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늘을 보는 것입니다. 하늘을 경험하고 하늘에 마음이 가 있는 사람이 이 땅에 와서 땅의 것에 미련을 가지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미련 가질 필요 없어” 이 땅에 온 에너지 품고 있는 사람에게 “그럴 이유가 없어!” 그것이 하나님의 길을 우리 눈으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봤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선하고 기쁘고 온전하시고 아름다운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 즐거움을 추구하시고, 무엇을 슬퍼하시고, 무엇으로 울고 계십니까? 주님이 마음에 계신 것을 확인하면 새로워집니다. 진자리나 마른자리나 그 어디나 하나님의 나라라는 의미가 우리 삶에 깃들어 주님의 일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복음기도신문]
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저서로 주께서 피워내시는대로(토브원형출판사, 2020), 예, 주님 제가 순종의 전문가입니다(토브원형출판사, 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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