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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 칼럼] 죄인을 용서(容恕)하시는 예수(II)

▲ 탕자의 귀향 (렘브란트). 사진: 위키백과 캡처

<역사적 예수 논구 시리즈>

IV. 죄를 사(赦)하시는 구속자, 예수

1. 용서하시는 하나님

1) 우리 죄를 사(赦)하심

하나님은 우리 죄를 사(赦)하시는 용서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탕자와 같은 우리 인간들을 용서하신다. 예수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집 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로써 설명하신다. 아버지는 대문을 열어놓고 오늘날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아들은 돼지지기로서 배고프고 고달픈 밑바닥의 생활 속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7). 탕자는 비로소 자기의 아버지와 고향을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생각나게 한 것은 그의 굶주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제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아버지께 죄지었음을 고백하고자 한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눅 15:18). 그리고 탕자는 이제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품꾼으로 아버지에게 돌아가려고 한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눅 15:19).

탕자는 이제 아버지께 돌아간다. 아버지는 큰 연민을 가지고 아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인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 아들은 이제 겸허한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잘못을 고백한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21). 아버지는 아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이유를 말한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2-24). 아버지는 탕자 아들이 돌아온 그것만으로 아들의 허물을 묻지 않고 아들을 영접하고 그에게 잃었던 아들 지위를 회복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다.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다음같이 증언하고 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2) 죄 용서의 조건은 참회

죄 용서의 조건은 참회, 즉 회개이다. 예수께서는 요한이 잡힌 후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다(막 1:14). 복음의 메시지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이었다. 복음에서 죄 용서란 값을 치루지 않는 은혜의 용서이긴 하나 무차별적 용서가 아니라 죄를 회개할 때 용서받는 것이다. 오늘날 보편구원론자들, 바르트나 몰트만을 비롯한 현대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말하면서 인간의 참회를 조건으로 보지 않는다.[1] 이러한 보편구원론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 대한 신앙, 즉 이신칭의 교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무 풍성하기 때문에 믿느냐 안믿느나 하는 인간편의 신앙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전혀 역사적 예수의 복음이 아니다. 예수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교훈하신 탕자의 비유에서도 이러한 회개는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집 나간 아들이 아버지의 용서를 받은 조건은 철저한 죄의 고백이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예수의 비유는 탕자가 단지 배 고파서 허기를 면하기 위해 돌아왔고 그러한 그를 아버지가 용납했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돌아온 아들은 단지 집에 돌아 온 것이 아니라 철저한 회개와 겸허한 모습으로 돌아 온 것이다. 그는 아버지께 고백한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21). 비유는 단지 탕자의 돌아옴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탕자의 뉘우침이 동반된 돌아옴을 가르친다.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가르치는 것이다. 아버지는 탕자의 겸허와 뉘우침을 보고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아들을 받아들인 것이다.

회개와 뉘우침 없는 용서는 정의가 없는 사랑이요, 그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공의 가운데서 펼쳐졌다. 공의 없는 사랑은  죄인들의 사랑이요. 인간들의 편파적 사랑이요, 하나님의 사랑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정의로운 사랑이다.

2. 죄 용서 결과: 관계회복

1)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죄로부터의 돌이킴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다. 탕자는 가산을 허비한 후에 있을 곳에 없어서 돼지지기로 들어가 쥐엄열매로 연명을 한다. 그럴 때 탕자는 역경 속에서 아버지를 기억한다. 죄는 인간을 암흑 속으로 몰아 넣는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21).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문책하지 않고 회개하고 돌아온 아들을 기꺼이 용서해주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신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32). 예수는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에 비유하신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눅 15:4).  

2)  창조질서의 회복

죄로부터 돌이킴은 하나님께로 돌아감이다. 하나님께로 돌아감은 창조주께서 본연으로 의도하신 창조질서의 회복을 함의한다.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감으로써 인간에게 관리하라고 위임한 창조물과 창조질서의 회복이 가능하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됨으로써 창조물도 썩어짐에 종노릇하게 되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피조물의 허무(虛無, nothingness)에 굴복한 상태를 언급하고 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롬 8:20). 인간의 원죄로 인하여 창조의 질서도 썩어짐의 종노릇하게 되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불순종한 아담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창 3:17). 인간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았다. 바울은 창조물의 탄식을 다음 같이 증언하고 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22). 

그리스도의 오심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구속만이 아니라 창조물의 구속을 위함이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구속(救贖)됨으로써 그 구속의 효능은 창조물에게도 미치는 것이다. 인간이 창조세계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세계의 청지기인 인간의 구속을 통해서 이 구속의 효능이 인간의 관리 하에 있는 창조물에게 미친다. 이것은 그리스도 대속(代贖) 공로의 풍성함이다. 바울은 피조물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의 구속을 바라본다고 증언한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21). 하나님이 의도하신 창조 본연의 질서는 상호 조화됨, 공존 공영, 이타적인 것이다. 생태계의 본연의 질서는 서로 연결된 그물망이요, 조화요 서로 나눔이다. 인간의 죄는 이를 깨뜨림이다. 그리스도는 잃은 것을 회복하고 잃은 자를 찾기 위하여 오셨다. 예수는 또한 자신의 메시아적 사역을 왜곡된 사회적 질서의 회복으로 선포하신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3) 공동체와의 관계 회복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사회 공동체와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도록 한다.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는 자신이 세상에 오신 것을 상실된 자의 찾음이라고 선포하신다. 삭개오는 사회적으로는 비난받는 세관원이었으나 착한 삶을 추구하고자 했다. 예수는 세리장 삭개오의 집을 지나시다가 오늘 내가 이 집에서 유하여야겠다고 말씀하셨다. 삭개오의 마음을 예수께서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는 삭개오가 키가 작아 뽕나무 위에 올라가는 것을 보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고 말씀하신다. 삭개오는 나무에서 급히 내려와 예수를 영접한다. 사람들이 예수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서로 놀라워한다: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눅 19:7). 삭개오는 자신의 과거를 회개하고 새 삶을 살기로 여러 사람들 앞에서 서약한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신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9-10). 그리스도를 만난 삭개오는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했으며, 속인 것이나 수탈한 것에 대하여 4배나 변상하겠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면서 삭개오는 사회적 소외에서 스스로 해방되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는 이웃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도록 한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창조 공동체와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도록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창조물의 영장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그의 동료 창조물인 자연 생태계와의 바른 관계 회복으로 나아간다. 자연은 더 이상 인간 생존을 위한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위임한 정원이요, 자연 생태계 안에 있는 동식물과 자원과 공생함으로써 생존유지가능하게 한다. 인간은 생태 윤리를 각성하고 멸종 위기에 있는 생태계의 모든 동식물에 관하여 이들의 생태적 생존을 위한 공감을 일깨우고 생태 윤리를 실천하게 된다.  

4) 인간성의 회복

예수는 잃은 양 비유에서  말씀하신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8:14).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찾아오시어 그에게 사회적으로 잃어버린 신뢰성을 회복하도록 하였다: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 예수는 말씀하신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삭개오는 세리였으나 진실과 진리를 갈구했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이 임한다는 예수의 복음의 말씀에 그의 진실을 추구하는 마음은 움직였다. 그는 자기와의 갈등과 소외에서 나와서 복음을 받아들인다. 자기 소유 집착에서 나와서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자한다.

죄로부터의 돌이킴은 인간성의 회복을 의미한다. 인간성의 회복이란 인간에게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성 회복이란 하나님의 형상(쩰렘  צלם, 에이콘 εικων, 모르페 μορφη, 젤렘은 신체적인 모습이라기 보다는 이성, 감성과 자유의지 같은 인간의 본질적 자질)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양(데무트 דמּות, 호모이오시스 ὁμοίωσις , 데무트는 인간의 영적 자질, 예컨데 원의(原義), 거룩, 영적 지식) 모두를 회복하는 것이다.[2] 예수는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면서 그들이 죄에서 돌이키게 하고 그들이 잃어버린 인간성, 말하자면, 이성, 감성, 의지자유를 지닌 인간의 본질과 원의를 지닌 영적 자질을 포함한 전인성(全人性)을 회복하도록 하신다.

V. 칭의(稱義)신앙; 사죄(赦罪) 은총의 감격 속에서 사는 삶

죄를 사하시고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공적(功績)이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은총이 주도적이다. 참회의 행위를 포함한 사죄 은총의 체험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예수를 만난 후 자신의 과거를 회개하고 새 삶을 살기로 한 삭개오의 서약,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으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다는 결단은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난 데서 자발적으로 나온다. 새 삶, 성화란 죄인 삭개오가 예수를 인격적으로 영접한 데서 나오는 이신칭의의 결과다.

누가가 기록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행위, 예수의 발에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붓고 눈물로 적시고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은 것은 죄 용서를 받은 자의 참된 모습을 보여준다. 바리새인은 이 여인의 행동에 대하여 정죄할 뿐 아니라 예수에 대하여도 판단을 하였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눅 7:39). 그러나 예수는 그 여인의 행위가 죄의 용서에 대한 감격에서 나온 것임을 아시고 말씀하신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예수는 진정한 신자의 삶은 날마다 죄 사함 받은 은혜의 감격 속에 사는 삶인 것을 가르치신다.

예수의 복음은 의인(義人)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의로운 삶을 사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 예수는 세리와 창녀들의 친구가 되었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었다. 그리하여 예수는 제도종교의 율법을 준수하고 외형적 정결(淨潔)을 중요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외형적 정결의 내면에는 각종 더러움, 음란, 시기, 질투, 탐욕, 원망, 분쟁, 다툼, 명예 등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셨다. 예수는 천국은 마음이 가난하고, 회개하고 애통하는 자의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천국은 깊이 있는 사색을 행하는 현인(賢人)의 소유가 아니라, 자기 욕심을 버리고 어린이들 같이 천진하고 소박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작은 소자(小子)들의 소유라고 가르치셨다. 예수 앞에 나아와 자기의 애착과 탐욕과 명예욕을 내려 놓을 때 예수는 우리에게 새로운 은총의 옷을 입혀주신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의다. 이 복음 안에서 우리는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 자신을 버리고 이웃을 섬기고,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믿음’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피스티스’(πίστις, faith)인데, 이 단어에는 ‘신실(信實)’이라는 뜻도 있다. 결국 믿음은 ‘신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믿음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 ‘신실’로 바꿔 읽으면 훨씬 더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더 중요한 건 ‘피스티스’의 또 다른 뜻이 ‘입증(立證)’이라는 것이다. 내가 믿으면, 입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가 구원받기 위해 입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백성임을 내가 믿는다면 그 믿음이 내 삶으로 입증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3] 믿음은 성화의 삶으로 그 칭의의 은혜를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의 복음에서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의 교리를 발견한 자가 사도 바울이었다. 그 자신은 모세의 율법을 열심히 추구하는 바리새인이었고 복음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믿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자였다. 그가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러 가는 도상에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나사렛 예수를 신비로운 환상 속에서 만난 후(행 9:1-19)에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고 평생 복음을 전하는 데 헌신한 이신칭의의 전도자가 되었다. 그는 구약 성경을 예수 복음의 빛 속에서 깊이 연구한 후에 인간이 율법을 준행해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구약 시편이 말하는 대로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온전한 의에 이르지 못하는 인간의 심각한 전적 부패의 상태를 다음같이 증언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10-18). 바울은 종교와 율법의 기능이란 스스로 수련하며 의롭게 되려는 인간의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롬 3:19)이며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롬 3:20)이라고 증언한다. 바울은 하나님이 인간의 속죄를 위하여 그의 아들을 속죄제물로 주시고 아들의 대속 행위를 믿음으로 인간이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증언해 준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1-24).  

나사렛 예수는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의를 얻기 위하여 ‘유대 종교의 율법을 행하라,’ ‘너가 스스로 경건을 연습하여 의롭게 되라’고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예수는 우리 모습 그대로 그분 앞에 나오라고 말씀하신다. ‘너의 짐을 진 그대로 나와서 그 분 발 아래 너의 무거운 짐을 내려 놓으라’고 말씀하신다. 그 분 앞에 나오는 데는 아무런 조건이 필요 없다. 그냥 그 분 앞에 나가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단지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죄의 사슬에서 해방하시는 그 분의 은총을 시인하고 영접하기만 하면 된다.(계속) [복음기도신문]


[1] 김영한, “오늘날 인본주의 신학사상과 개혁사상,” 「신학지남」, 2013, 여름호/ 통권 제315호, 372-373

[2] 인간성을 하나님 형상(의지의 자유 등 인간의 본질)과 모양(원의 등 영적 자질)으로 함께 보는 관점은 아타나시우스, 힐라리, 암브로스, 어거스틴 등의 견해로서 저자의 입장이다. 루터는 하나님의 형상을 정신, 마음과 영혼으로 불리우는 자연적 재능보다는 영적 자질(원의 등)에서 찾은 데 반해서 칼빈은 자연적 재능과 원의라고 불리우는 영적 자질들도 포함하는 것으로 보았다.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Eerdmans Publishing Co., 1941; 권수경, 이상원 역, 『벌코프의 조직신학』,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0, 412-413).

[3] 이재철, “믿음, 삶으로 ‘입증’될 때 완성… 각자 ‘사명자행전’ 써야,” 이대웅 기자 , 크리스천 투데이, 입력 : 2014.01.3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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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 | 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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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
[김영한 칼럼] 죄인을 용서(容恕)하시는 예수(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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