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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베드로의 장모의 눈으로 보는 예수

출처: Silvestri Matteo on Unsplash

우리는 현대인의 삶에서 섬김과 자유가 상반되는 걸 너무나 자주 목격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만나신 사람들은 대부분 익명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신 많은 여성 역시 익명이라는 사실에도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사실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남자들을 고쳐주신 이야기들 가운데서도 이름이 나오는 이야기는 다음 사례들이 전부다: 마가가 유일하게 이름을 밝히는 맹인 바디매오(막 10:46), 요한이 유일하게 이름을 밝히는, 대제사장의 종 말고(요 18:10), 그리고 나사로.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신 여성들도 한 명을 빼고는 모두 그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신원이 드러난 그 여인도 이름이 밝혀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 여인의 신원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그녀가 예수님의 한 제자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 뿐이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 더러운 귀신 들린 남자가 소리쳤다. “나사렛 사람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막 1:24). 예수님이 그 귀신을 꾸짖으신다.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러자 그 악한 귀신이 그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그 남자에게서 떠나간다. 이 사건 때문에 온 갈릴리에 예수님의 명성이 퍼졌다. 마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회당에서 나와서, 곧바로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갔다. 마침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사정을 예수께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다가가셔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그 여자는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막 1:29-31).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신 사람들은 대부분 낯선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예수님은 익히 아시고 계셨을 사람을 고치신다. 상세한 기록은 없다. 그런데 그 여인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다. 예수께서 그 여인을 고치시자마자 그녀는 시중을 든다. 

우리 모두를 위한 모범

마태, 마가, 누가 모두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우리는 그 이유를 잘 모른다. 예수께서 치유를 베푸신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왜 이 여성은 유독 조명을 받는 것일까? 여성이 시중을 들었다는 점을 부각하려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를 복음서 이야기 전체의 틀 안에서 읽는다면, 우리는 이 이야기가 그저 한 여성의 위상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여인, 곧 베드로의 장모를 가리키는 ‘섬긴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디아코네오)는 예수님이 광야의 유혹을 물리치셨을 때 천사들이 예수님의 시중을 들었다고 했을 때도 사용된다(막 1:13마 4:11). 이 동사는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가르침을 받고 있을 때, 시중을 드는 베다니의 마르다를 묘사할 때도 등장한다. 그때 예수님은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했다고 말씀하셨다(눅 10:38-42).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이 동사가 예수님을 묘사할 때도 쓰인다는 점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막 10:43-45). 베드로의 장모가 자기를 고쳐주신 예수님께 보인 반응은 단지 여성들을 위한 모범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모범이다. 예수님의 나라에서 섬김은 여성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의 일이다.

스스로 섬기는 이 여성의 눈을 통해서 우리가 보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가 보는 예수님은 우리를 손수 이끄시어 높이 세우시는 분이다. 우리가 보는 예수님은 우리를 만지시기만 하면 바로 우리의 고통을 들어주시는 분이다. 우리가 그를 섬길 힘을 가지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섬기시는 분이다. 

1662년 성공회 공동기도서는 하나님을 “그의 섬김은 완벽한 자유”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우리는 베드로의 장모에게서 그 본을 본다.

우리는 현대인의 삶에서 섬김과 자유가 상반되는 걸 너무나 자주 목격한다. 그러나 2천 년 전에 베드로의 장모는 현대 심리학자들이 최근에야 발견하게 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 인간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섬길 때 번성한다. 끊임없이 자기실현을 추구하는 “자유”는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 

육체의 치유와 영혼의 치유

마태, 마가, 누가에서, 베드로의 장모와 악마에게 사로잡힌 남자의 치유 사건은 수많은 병자와 귀신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이 예수께로 밀려오는 계기가 되었다. 

날이 저물었을 때에, 마을 사람들이 귀신 들린 사람을 많이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또 병자를 모두 고쳐 주셨다.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는 몸소 우리의 병약함을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

여기서 우리는 영혼과 육체의 치유가 함께 일어나는 것을 본다. 그리고 주께서 어떻게 히브리 성경을 성취하시는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한 마태가 예수님의 행동들을 구약의 예언으로 거슬러 올라가 함께 묶는 것을 본다. 이 문맥에서 인용된 구약의 예언은 이것이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사 53:4-5).

“고통”(griefs)으로 번역된 히브리어에는 “병”이라는 뜻도 들어 있다. 그리고 “슬픔”(sorrows)으로 번역된 히브리어에는 “고통”이라는 뜻도 들어 있다. 여기 이사야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종의 신비를 본다. 그는 하나님 백성의 병과 죄와 고통을 대신 지신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고 육체와 영혼이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실 때, 그는 그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하신다. 

부활의 삶

예수님이 우주적 진리의 위대한 교사로 자주 묘사되지만 온 우주의 위대한 하나님으로는 자주 묘사되지 않듯이, 사람들은 종종 우리의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일을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벌을 받으시는 그의 일과 분리하려고 한다. 그러나 마태는 우리가 이렇게 쐐기를 박는 걸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형벌을 받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하나님의 다가오는 새 창조로,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 그곳으로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여셨다(계 21:4).

우리는 지금 여기서 죄와 병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열쇠 구멍을 통해 완전히 새롭고 다른 세상을, 예수님과 그의 부활의 삶이 죄와 고통을 영원히 없애버리는 곳을 들여다보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주러 오신 것만이 아니다. 예수님의 또한 그의 삶을 우리와 함께 나누러 오셨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다. 그때 그녀는 예수님의 부활의 삶을 조금 맛본다. 그리고 그렇게 맛본 그 부활의 삶으로 그녀는 섬긴다. [복음기도신문]

예수님의 나라에서 섬김은 여성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의 일이다

레베카 맥클러플린(Rebecca McLaughlin) | 런던 Oak Hill Seminary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캠브리지대학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TGC 정기 기고자이며, 대표 저서로 ‘기독교가 직면한 12가지 질문’(Confronting Christianity, 죠이북스 역간)이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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