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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팔복(3): 온유한 자

Antonio Ciseri의 'Ecce Homo (Behold the Man!)' 사진: wikimedia.org 캡처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면 ‘유한 사람’, ‘마음이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그런 의미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온유하다’는 말은 단순히 ‘마음이 여리고 부드러운 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온유함에는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연약함’, ‘여린 마음’ 등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강인함’, ‘굳은 의지’가 들어 있다.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자신이 가진 것을 절제하고 통제하는 힘이다. 온유의 대명사를 구약과 신약에서 각각 한 사람씩 살펴봄으로써 온유한 자가 어떤 성품을 가졌는지 생각해 보자. 바로 그러한 자에게 모든 복의 근원이신 예수님께서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한 자, 모세(민 12)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라는 평가를 받았다(민 12:3). 이러한 평가는 특별한 사건을 통해 선포되었는데,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여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을 받았던 일이었다(민 12:1). 모세의 형과 누나는 이 일로 모세를 업신여겼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라고 말하며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행했던 중보자의 역할을 별거 아닌 것처럼, 특별히 자신들이 충분히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모세는 충분히 자신이 받은 특별한 부르심을 내세울 수 있었다. ‘당신들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직접 본 적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당신들을 직접 택하고 부르셨는가? 내가 입술이 둔하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아론 당신은 대언자로 서지도 못할 자가 아닌가? 미리암 당신이 예언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일도 하나님께서 내 지팡이를 통해 홍해를 가르셨기 때문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당신들과도 말씀하셨다고? 나를 통하지 않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가?’

모세는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을 선동하여 두 사람을 내쫓을 수도 있었다. 강력한 리더가 반역자를 제거하는 것처럼 두 사람을 처벌할 수 있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리나 권위를 가지고 두 사람을 눌러버리고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가지고 있는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구름 기둥 가운데로 강림하셔서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셨다(민 12:5). 하나님께서 모세의 억울함을 대변하시고 그를 높이셨다.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민 12:8).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셨다.

모세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여리고 유약해서? 아니다. 성경은 그가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온유함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자기를 의탁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권위나 권리를 절제하고 통제하는 힘이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마 11)

예수님은 신약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그 어떤 인물보다 온유하신 분이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라고 하셨다(마 11:29). 모세는 어떤 면에서 예수님의 온유를 잘 배우고 나타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이 온유의 끝판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권위와 권리가 그 어떤 피조물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이며, 동시에 예수님께서 그 권리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철저히 통제하셨기 때문이다.

찬양받기 합당하신 분께서 욕을 당하셨다. 모든 만물을 심판할 권세를 가진 분께서 불한당 같은 피조물의 불법적인 재판을 통해 갖은 고난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받으셨다.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은 그 모든 상황을 뒤엎고 정의를 실현할 권위와 권리가 있었다. 열두 군단 되는 천사가 그분의 명령이 떨어지면 즉각 순종할 상황이었다(마 26:53). 하지만 예수님은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다(벧전 2:23). 예수님은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입을 열지” 않으셨다(행 8:32).

예수님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을까? 여리고 유약해서? 아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다고 말한다(벧전 2:23).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와 권리를 철저히 통제하시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벧전 2:24).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시려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다. 예수님의 온유함으로 우리는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올 수 있었다.

온유한 자에게 복이 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온유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상황을 맡겨드리고, 당장 내세울 수 있을 것만 같은(그러면 지금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권리와 권위를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절제하고 통제하는 힘이다. 예수님은 이런 온유를 실천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복에 관하여 살펴보기 전에 온유가 얼마나 아름다운 미덕인지 조금만 더 깊이 묵상해 보자. 온유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다른 덕목과 함께한다.

먼저, 겸손 없는 온유는 있을 수 없다. 자신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공의롭게 심판하실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이 누구인지 겸손히 볼 수 있는 사람만이 참된 온유를 실천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번 “온유”와 “겸손”을 함께 제시한다(마 11:29; 엡 4:2; 골 3:12).

또 온유에는 믿음이 함께 한다. 눈에 보이는 억울한 환경이나 고통스러운 현실보다 그것을 통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때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선이 또렷이 보이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를 수 있더라도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이루신 일이 참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나에게도 최고의 유익이 된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의와 경건, 사랑과 인내, 그리고 “믿음”과 “온유”를 따라야 한다(딤전 6:11).

마지막으로 온유는 사랑의 벗이다. 모세가 미리암과 아론을 참은 것은 그 두 사람을 사랑해서다. 나중에 두 사람이 병에서 회복되기를 모세는 간구한다(쌤통이라고 놀리지 않고 말이다, 민 12:13). 예수님이 욕과 고난을 참으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목자 없이 방황하며 길을 잃은 양과 같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온유는 이처럼 타인에 대한 이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이 수반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온유하며”라고 말했다(고전 13:4, 참고: 엡 4:2; 골 3:12; 딤전 6:11).

자, 그렇다면 겸손과 믿음과 사랑으로 무장된 온유를 가진 자에게 예수님은 어떤 복을 약속하셨을까?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온유한 자에게 약속하신 복이다. 일차원적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이 조금 엉뚱하게도 부동산을 복으로 약속하신 것처럼 보인다. 시편에는 이와 유사한 말씀이 있다.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 하리로다(시 37:11)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말씀을 이해하는 핵심은 문맥에 있다. 예수님은 현재 이 땅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에 관하여 가르치고 계신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는 온유한 사람이다(온유가 예수님 제자에게서 발견되는 성품, 특징이 되어야 한다).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은 미래의 약속을 하고 계신다. 그들은 천국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곳에서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누가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은 온유한 자에게 약속하신 땅의 개념을 “열 므나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셨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비유였다(눅 19:11).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왔는데 그사이에 종 열 명에게 은화 열 므나를 주면서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고 명령했다(13절). 열 명의 종 가운데는 귀인이 왕이 되는 걸 원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결국 귀인이 돌아온 후에 그 앞에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27절). 하지만 몇몇 종들은 충성스럽게 왕을 기다렸는데, 주인은 그들에게 각각 ‘열 고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고 말하였다(17, 19절).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충성스럽게 일한 종들에게 왕은 ‘땅을 차지하라’고 말씀했다. 땅을 차지하는 복을 베푼 것이다.

두 가지 교훈: 앞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라, 예수를 바라보라

첫째, 어떤 사람은 성경의 ‘보상’ 개념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그러면 오직 천국 땅을 차지하기 위해 온유를 실천해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을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뒤틀린 방식으로 보상 개념을 오해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누군가를 기쁘게 하려는 순수한 동기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그 섬김과 봉사를 진실로 기뻐한 그 사람이 그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에게 뭔가를 베풀 때 마치 대가를 바라고 선을 행한 속물 같은 느낌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순수한 기쁨이 더 풍성해짐을 느낄 수 있다.

온유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마땅히 그분의 온유함을 배우고 실천한다. 그리스도의 온유하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온유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천국의 땅을 차지하도록 복을 베푸신다. 복은 우리로 하여금 거짓된 온유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온유하기 힘들 때 바라볼 축복으로서 그 역할을 한다. 예수님께서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처럼(히 12:2), 하나님의 나라에서 왕이신 예수님에게 하사 받은 땅을 예수님을 위해 함께 다스리도록 하신 복은 현재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라봐야 할 ‘앞에 있는 기쁨’이 된다. 이 복이 우리로 하여금 현재 우리가 지고 있는 십자가를 참고 당하고 있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게 만든다.

둘째, 온유는 우리 힘으로 온전히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죄인이 자기 힘으로 온유를 이루어 낸다면 천국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아니다.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법은 오직 겸손히 자신을 낮추시고 온유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죄인을 대신하여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뿐이다. 그러면 믿고 나서, 즉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나서는 우리 힘으로 온유를 실천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신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봐야 한다(히 12:2). 온유하기 힘들 때마다, 나의 권리와 권위를 내세우고 싶을 때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명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한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 얼마나 위대하고 높은 분이신가? 어떤 귄위와 권리를 가지신 분인가? 그런 그분이 우리 앞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다. 그 위대한 겸손과 온유를 보고 배워라. 그것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이들이 온유를 이 땅에 실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예수님의 제자는 마땅히 온유한 자가 되어야 한다. 그들이 왕으로 모신 이가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분이시다. 그들이 뒤따르고 있는 예수님이 남긴 발걸음마다 온유와 겸손이 찍혀 있다. 주님 먼저 가신 이 길은 좁고 협착하며 죄인의 본성을 거스르는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 앞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며 끝까지 이 온유의 길을 걷자. 그 길 끝에 하나님 나라가 있으며 그곳에서 가장 겸손하신 왕 예수께서 우리에게 줄 상을 가지고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계 22:12). [복음기도신문]

조정의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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