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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이아침 칼럼] 당신의 마음은 하나님과 함께 하늘 보좌에 가 있습니까?

Unsplash의 Fuu J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로마서 7:14)

사도 바울이 갈등합니다. 갈등의 목적은 십자가로 달려가기 위해서입니다. 죄에 팔렸다는 말씀은 육신의 감각을 통해 주님 아닌 다른 것을 찾는 것입니다. 마음에는 주님만 계셔야 하는데, 보는 것과 듣는 것과 감각적인 것을 통해 주님 아닌 다른 것이 마음에 달라붙습니다. 이것이 육신에 속했다는 뜻입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에베소서 2:1~6)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해 십자가에서 죽었다면 우리 마음은 하늘에 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하늘에 가 있으면 보이는 것은 하늘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영광으로 마음은 가득 찬 것입니다. 마음이 오직 주님으로만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에베소서 2:1)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고 합니다. 육체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세상 풍조를 따라갑니다. 조심스럽게 여러분에게 물어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함께 하늘 보좌에 가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 풍조를 따라갑니까? 그것을 보게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우리의 종교적 행위나 어떤 마음가짐이나 주장하는 바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를 따라가면 세상 풍조를 따라가게 되고 공중 잡은 권세를 따라가게 됩니다. 공중 잡은 권세는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공중에 떠 있는 마음을 사탄이 붙잡아서, 그 마음이 땅의 것을 욕구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영향에 있다는 것은 마음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보면 압니다. “지금 예배드리고 있어요, 기도하고 있어요” 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마음이 세상 풍조를 따라가는 마음인지 보셔야 합니다. 세상 가치, ‘이것은 있어야 해’ 하는 마음은 없는지 명확하게 보게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에베소서 2:3)

우리는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합니다. 죄는 육체를 따라갑니다. 육체에 속해 있습니다. 세상 풍조를 따라갑니다. 그것이 죄에 팔린 인생입니다. 죄에 팔리면 우매해집니다. 주님께 속한 것 같고, 주님을 갈망하는 것 같은데, 마음은 또 다른 법, 이 세상을 지향하고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해서 얼마나 감사한 줄 모릅니다. 위로가 되지 않으십니까? 어떤 상태가 진전되지 않은 것에 대해 염려하고 괴로워하고 죄의식에 빠진 분들 많은데 거기엔 하나님의 오묘하고 놀라운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제 마음에도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부정할 수 없습니다. 생각 가운데 주님을 사랑하고 기뻐합니다.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은요? 항상 주님만 생각할까요?

생각 가운데 주님이 계셔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은 주님을 갈망합니다. 부정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주가 되지 않고 세상을 갈망하는 마음이 주가 된다면, 실제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 것인지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시는 생각으로 먼저 결정됩니다. “이것 있으면 행복해, 그런데 하나님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주님 계셔야 해!” 생각으로 결정된 것입니다. 그 생각은 명료하고 분명합니다. 주님의 사람이라는 표시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실제로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1차적으로 주님 계셔야 합니다, 주님을 갈망합니다! 이것이 생각으로 어떻게 정해졌을까요? 말씀 때문입니다. 말씀이 말씀 되어야만 그것이 새겨집니다. 말씀이 새겨지지 않으면 세상을 욕구하게 됩니다. 말씀이 복음으로 역사하지 않으면 생각조차도 세상 것으로 채워져야 기쁨이라고 여기며 메말라 갑니다. 복음이 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왜 그 세상 것이 기뻐? 주님 계시는데! 그러면서도 마음은 조금 그렇겠지만 1차적으로,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1차적으로 생각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이 선명해져야 한다고, 주님을 갈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말씀 앞에 있어야 하고, 말씀을 채워야 하고, 말씀을 나눠야 하고, 말씀이 흘러가야 하고, 말씀이신 주님과 친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은 그렇게 잘 안 됩니다. 그래서 죄의식을 느끼고 ‘에이.’ 하면서 교회를 나가기도 합니다. 20여 년 목회하면서 보는 것은 성도들끼리 싸우다가도 결국 마지막에는 목사님을 탓합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죄는 세상과 육신에 속해 있습니다.

주님께서 왜 마음의 욕구를 그렇게 허용하시는 것일까요? 왜 사도 바울도 그것을 경험해야 했을까요? 저는 믿음의 사람은 이것을 경험한다고 신학적으로 동의합니다. 실제로 경험하고 있기도 합니다. 머리로는 명료하지만 이런 갈등이 없으면 죄를 그냥 짓습니다. 마음으로 갈등하는 사람은 죄를 마구 짓지도 못합니다. 이도 저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도 저도 아닌 것이 얼마나 은혜인지 모릅니다. 한꺼번에 죄를 짓지 않습니다. 예전만큼 죄가 재미도 없습니다. 예전 습성을 찾으려고 해도 재미가 없습니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예전으로 돌아가려고 해도 그 기분이 안 생깁니다. 그런데 이도 저도 아닌 그것이 은혜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런 사람이 옛날처럼 죄를 막 즐기는 곳에 갑니까? 못 갑니다. 정말 주님을 만난 사람이 내면에서 갈등할 때 ‘에잇.’ 하면서 옛날로 돌아간다고 해서 그 옛날 감정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다. 예전에 죄를 짓던 그 상태가 안 됩니다. 그래서 이도 저도 아닙니다. 어중간하다는 것은 그래서 은혜입니다. 십자가로 가기 때문입니다. 복음 만나니까 그 사람이 어중간해졌어, 사회적으로 똑똑했는데 왜 생명공학 공부하고 아프리카 선교를 가는 거지? 예전 방식으로 돌아가도 재미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재미가 완전히 확 떨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괴롭고 힘들어합니다. 어중간합니다. 우리는 압니다. 괴롭고 힘들 때는 십자가로 달려가 예수님과 함께 연합해야만 산다는 것을 압니다. 이도 저도 아닌 것이 죽게 되고 주님의 생명과 기쁨과 마음과 뜻으로 사는 것을 압니다. 육체를 떠나 주님과 실제 연합하는 실제 모습이 있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이도 저도 아니라서 시집도 장가도 못 가고 취직도 아무 곳이나 못 갑니다. 사도 바울이 곤고한 인생이라고 말했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복입니다. 주님과 연합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젠 예전 방식으로 돈을 못 벌고 예전 방식으로 직장생활도 못합니다. 예전 방식으로는 즐거워질 수가 없습니다. 예전의 성취 욕구들이 달라졌습니다.

십계명 가운데 1계명부터 3계명까지 내용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1계명부터 3계명까지 지켜지면 4계명부터 10계명까지도 지켜집니다. 그런데 1, 2, 3계명을 빼고 4계명부터 지키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기를 써서 그렇게 지키려고 열심을 부립니다. 왜 그럴까요? 안 하면 혼날까 봐, 망할까 봐, 패가망신할까 봐 그렇습니다. 속을 들키지 않으니까 더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이도 저도 아닌 상태를 경험한 사람은 십자가를 통과해 주님과 십자가에서 연합해 주님을 더욱 알아갑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4계명부터 10계명까지 잘 지키게 합니다.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율법은 의롭게도 못하고, 하나님께 이르도록 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죽고 나면 내 마음에 한 법이 생깁니다. 율법이 죽고 나면 마음에 이런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 저 주님 마음에 들고 싶어요. 주님 마음에 드는 일 하고 싶어요.” 그것이 사랑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좋은 것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때 사랑이 일하고 사랑이 역사하고 사랑이 함께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갈등하고 복잡한 마음이 생길 때에도, 생각은 명료하여 주님은 버릴 수 없고, 마음의 욕구로 힘들어 하는 시간을 보낼 때에도 그때가 바로 은혜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로 달려가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만져주시면 마음으로 춤을 추십시오. 힘들고 어려웠습니까? 이제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못 가십니까? 이제 십자가로 달려가십시오!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무덤으로 가장 먼저 달려간 세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였습니다. 세 여인은 향품을 준비한 뒤 안식일 다음날 아침 일찍 예수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향품을 준비한 것을 보면 주님을 많이 사랑했지만 주님의 부활은 믿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주목하는 사람은 그냥 부활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 죽음과 연합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반란 집단의 수괴를 따르는 추종자이기에 죽임당할 수 있는 분위기입니다. 그럼에도 세 여인은 주님의 십자가 죽음이 마음에 가득해서, 예수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무덤에는 로마 병사가 지키고 있음에도 달려갑니다. 그 마음에 예수님의 죽음, 십자가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서 십자가로만 달려갑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이슈는 십자가이어야 합니다. 경제도 아닙니다. 죽음도 아닙니다. 얽히고설킨 삶의 문제도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세 여인이 고민합니다. “무덤 앞 돌은 누가 옮겨줄꼬!” 그러면서도 무덤으로 가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예수님 무덤은 니고데모가 준비한 돌로 된 좋은 무덤입니다. 세 여인은 돌로 된 문을 굴려서 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단 갑니다. 얼마나 십자가 죽음에 주목되어 있었으면 그랬겠습니까! 자매들의 마음은 온통 다 거기에 가 있었습니다. 고민하면서도 갑니다.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갑니다. 십자가로 갑니다. ‘돌을 누가 치워주지’ 하면서 무덤으로 갔더니, 돌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부활을 모르고 가도 함께 부활의 아침을 맞이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인생이로다!” 아닙니다. 이도 저도 아닌 은혜가 실제 은혜입니다. 부활의 영광 가운데 하늘 보좌로 가 세상을 넉넉하게 바라볼 수 있는 하나님의 눈이 열립니다. 주님의 마음이, 주님의 심장의 고동 소리가 우리 심장에 메아리치게 됩니다.

에필로그

십자가로 달려가는 것은, 주님과 연합해 죽는 나를 보는 것입니다. 주님과 연합하면 주님의 생명이 들어옵니다. 주님의 생명이 들어온다는 것은 그 가시면류관을 우리도 쓰는 것입니다.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가치가 바뀌는 것입니다. 세상 풍조를 따라갔던 우리의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연합할 때만 가능합니다. 손에 못이 박혔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 우리의 씀씀이가 바뀐 것입니다.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발걸음, 우리의 이상, 우리의 포부가 바뀌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등에 채찍 맞음으로 나음을 입는다는 것은, 존재 자체가 나음을 받는 것입니다. 턱수염이 뽑히신 것은 수치입니다. 부족하고 어려우면 아프고 힘들고 부끄럽고 창피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면 충분합니다. “주님 때문에 기뻐! 주님의 생명이면 충분해!” 십자가에서 연합할 때만 그 힘을 공급받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로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연합했을 때 실제 우리가 어떻게 바뀌는지 보게 됩니다. 율법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기뻐하고 주님 보시기에 좋은 것을 하고 싶어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 있게 됩니다. 진자리 마른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엇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건강이 중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내 안에서 주님이 하시는구나! 와, 주님 맞구나! 주님이 하셨다는 것이 이런 의미였구나!” 그것을 실제로 보셔야 합니다.

한두 사람이 먼저 보고 또 함께 결합하여 또 보고, 더 연합하여 위로하고 격려하고 견인함으로 그 은혜의 자리로 들어가기를 축복합니다. 그것이 결론을 제대로 내리는 것입니다. “주님, 결국 십자가로 가는 인생 맞군요. 주님이 내 인생 결론 내시고, 나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 맞군요. 마침표를 찍으시는 분은 주님 맞군요. 나는 주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 맞군요!” 결론을 제대로 내려서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함께 누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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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저서로 주께서 피워내시는대로(토브원형출판사, 2020), 예, 주님 제가 순종의 전문가입니다(토브원형출판사, 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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