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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젊은 지구_지구의 나이가 수천 년인 이유

사진: pixabay

지구는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성경의 서문을 가장 자연스럽게 읽을 때 우리는 젊은 지구를 받아들이게 된다

요약: 아무리 오랜 지구 견해가 기독교 정통의 범위 내에 있다고 하더라도, 성경은 하나님께서 수백만 또는 수십억 년이 아니라 수천 년 이내에, 그러니까 비교적 최근에 지구를 창조하셨다고 믿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분명한 이유를 제시한다. 창세기 1장은 문자적인 노동의 관점에서 창조를 묘사하고, 신약은 초기 인류 역사를 “태초”와 연관시키며,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에는 간격이 없으며, 인류는 성경에서 창조의 절정(the head of creation)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성경은 반복해서 동물의 죽음과 고통을 타락과 연결한다. 이러한 주장 중 그 어느 것도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모든 근거가 모여서 젊은 창조(young creation)라는 주장을 더 설득력 있도록 만드는 사례를 제공한다.

지구는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우리는 웨인 그루뎀 교수와 제이슨 드루치 교수에게 각자 오랜 지구와 젊은 지구 관점에 대한 논거를 제시한 다음 서로 응답하도록 요청했다.
· 젊은 지구_지구의 나이가 수천 년인 이유_제이슨 드루치
· 오랜 지구_지구가 수십억 년 되었다는 증거_웨인 그루뎀
· 젊은 지구 주장에 대한 응답_웨인 그루뎀
· 오랜 지구 주장에 대한 응답_제이슨 드루치

지구의 나이라는 논의에 걸린 문제는 다름 아니라 과연 우리가 과학적 데이터를 바르게(faithful) 해석할 수 있을 정도로 제대로 된(faithful) 성경 본문 주석을 하고 있는가 여부이다. 태초에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없었고, 성경은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기에 시간과 공간의 문제에 답하는 데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 따라서 그 어떤 주제라도 관계없이 성경의 가르침은 창조된 영역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평가하는 지침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는, 거기에 걸맞은 무게를 가져야만 한다.

분명히 하자.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역할,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 그리고 첫 부모로서의 아담과 하와의 역사성은 기독교 신앙에서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다. 더욱이, 어떤 형태가 되었든지 진화론적 창조론(즉, 유신론적 진화론)은 성경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많은 것이 걸려 있는 건 사실이지만 지구의 나이가 반드시 그리스도인을 분열시킬 정도로 중심 교리는 아니다. 보수적 그리스도인은 (유아세례 문제 또는 다양한 천년설과 유사하게) 젊은 지구 창조론과 오랜 지구 창조론 모두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내가 젊은 지구 창조론자인 이유는 거기에 관한 압도적인 성경의 데이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입장을 반대하는 모두를 단숨에 굴복시키는 마법과 같은 성경적 또는 과학적 논증은 내게 없다. 따라서 오랜 지구 창조론자는 내가 제시하는 각각의 주장에 대해서 얼마든지 정당하고 사려 깊은 답변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제시하는 주장은 통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그럼에도 과연 내가 지금 제시하는 주장 하나하나를 과연 틀렸다고 말할 수 있을지 나는 의문을 가진다.

첫째 주간의 인류

논증 1: 창세기 1:1-2:3은 인류의 창조를 창조의 첫 주 안에 배치한다. 성경의 서문을 가장 자연스럽게 읽을 때 우리는 젊은 지구를 받아들이게 된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5, 8, 13, 19, 23, 31)라는 후렴구에 쓰이는 히브리어 ‘욤’(날을 의미한다)의 사용, 빛과 어둠 및 낮과 밤에 대한 언급, 그리고 강력한 일주일이라는 구조는 비록 나흘째까지 태양이 창조되지 않았더라도(창 1:14-19), 일관되게 이 계시의 전달자가 하루를 달력상 24시간에 해당하는 날로 묘사하고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여기에서 인류는 하나님의 첫 번째 주간의 엿새째 날에 창조된 것으로 묘사된다. 날-시대 이론(day-age theory, 하나님이 무에서부터 무한한 기간에 걸쳐서 연대기적으로 모든 물리적인 것을 창조했다는 주장)은 이런 문맥에 맞지 않는 것 같다. 게다가 갭 이론(gap theory, 창세기 1:1과 1:2 사이에 매우 긴 간격이 있다는 주장)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창조에 대한 이후의 묵상(예: 시편 104편)은 결코 “날”에 대해 언급하지 않지만, 여호와께서 창조 주간의 패턴(출 20:11) 위에 이스라엘의 6+1이라는 삶의 형태를 세웠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이 이미 오래전부터 창조 주간이 6+1의 패턴으로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출 16:23-29 참조; 창 7:4, 10; 8:10, 12과 비교하라), 결코 그것을 비유적이거나 유비적인 이야기가 아닌 실제 사건으로 보았음을 보여준다. 특히, 안식일을 지키라는 이스라엘의 부르심은 결코 유비적으로 읽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원래 일하셨던 경험에 근거한다(출 20:10-11).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태초에

논증 2: 신약은 창세기 2-4장의 역사를 세상의 시작과 밀접하게 연관시킨다. 오랜 지구 모델은 인류의 창조가 수백만 년 또는 수십억 년 동안 진행되었기에 “태초”라는 특정 순간으로부터는 분리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창세기 1:1의 “태초”는 성경이 그 이후 묘사하는 모든 시간보다 훨씬 더 긴 기간 동안 펼쳐져 있을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전자는 창세기 1:1의 “태초”와 1:26-28의 인류의 창조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이고, 후자는 “태초”라는 용어를 이상하게 사용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니까 이미 9이닝이 시작한 야구 경기를 보면서 여전히 경기가 막 “시작”했다고 말하는 꼴이 된다.

신약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결혼제도를 창조의 시작과 밀접하게 연결하시는 것을 본다(막 10:6; cf. 마 19:4, 8; 창 2:21-25 참조). 하와를 속이는 사탄의 살인에 가까운 행위(단지 사탄의 성향뿐만이 아니라)가 창조의 시작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예수님은 선언하셨다(요 8:44). 예수님은 사탄의 살인적이고 죄에 넘치는 행동을 여자의 후손이 뱀 그리고 그의 후손과 마찰을 일으키게 될 것이라는 약속과 연결하셨다(요일 3:8; 참조, 창 3:1-6, 15). 또한 예수님은 인간이 겪은 첫 번째 환난이 창조의 시작 시점에 있는 것으로 보셨다(아마도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을 언급하신 것 같다)(막 13:19; 마 24:21; 창 4:8 참조). 그게 다가 아니다. 예수님은 아벨의 순교를 세상이 만들어지던 시점 근처에 두셨다(눅 11:49-50; 참조 마 23:35; 창 4:8 참조).

히브리서 기자는 또한 “세상의 기초”를 여섯째 날의 결론으로 간주하고, 인류의 반역 (그래서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심)을 이 시기 바로 옆에 두었다. 그리고 이 기초를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해 실현된 “시대의 끝”과 대조했다(히 4:3-4; 9:25-26).

직선 족보

논증 3: 창세기 5장과 11장에 나오는 직선(linear) 족보는 최근의 인류를 가리킨다. 성경 속 족보 중 일부는 분명히 선택적이지만(예: 마 1:1; 1:2-17), 창세기 5장과 11장에 있는 족보는 너무 구체적이어서 선택적 읽기를 거부한다. 따라서 이 족보는 읽는 이로 하여금 인류가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음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

창세기 5장과 11장에 있는 직선 족보는 나이와 관련한 세부 사항 때문에 특히 성경 전체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갖는다(예: 창 5:3-11 참조). 비록 “아들”이 때때로 손자나 증손자를 의미한다고 할지라도(그런 묘사는 종종 성경에 있다), 시대의 특수성은 긴 시간 차이 또는 간격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더욱이, 겉보기에 “아버지-아들/손자/증손자”로 보이는 많은 관계가 다른 본문에서 실제로 그런 관계임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아담과 셋(창 4:25), 노아와 함, 셈, 그리고 야벳(6: 10), 또한 아브라함과 데라(11:31)가 그렇다.

이 족보에 특정한 시대가 담겨있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창세기가 가진 메시아적 그리고 선교학적 목적 때문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아담에서 노아까지, 셈에서 데라까지, 그리고 아브라함에서 이스라엘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에 걸쳐 소망의 가계를 보존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조금은 무리한 시도를 한 것 같다. 각각 지정된 연도는 모두 다 앞으로 오실 후손을 약속하는 창세기 3:15에 담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런 분명한 목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대를 생략하는 것은 명백하게 저자의 집필 목적에 어긋나는 것이다.

족보에 담긴 나이를 다 더하면 인류의 나이가 약 6000세임을 알 수 있다.

창조의 클라이맥스

논증 4: 첫 창조의 머리로서 아담에게 주어진 큰 역할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이자 창조의 클라이맥스로서 인류의 위치는 모두 다 젊은 지구를 지지한다. 하나님이 수백만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아무런 감독자 없이 피조물을 방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창세기 1:1에서 2:3까지는 첫 번째 모든 창조의 주요 “통치자”를 인류와 연관시킨다. 빛은 낮과 밤을 구분하고 지구의 달력을 설정하지만(창 1:14), 동시에 인간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징표”로도 사용된다(창 15:5, 렘 33:22). 인간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는 사명을 받았다.

인간은 창조의 절정이고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유일한 대리자이다. 그중 일부는 다음과 같은 존재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6). 유독 여섯째 날에만 정관사 “the”가 쓰였다. (“a first day, a second day, a third day … the sixth day”). 본문에서 여섯째 날에는 가장 문학적이고 긴 연설이 들어있다. 여섯째 날이 끝났을 때만 하나님은 창조를 “심히 좋았더라”고 선언하셨다(창 1:31). 여섯째 날에만 하나님은 창조물을 “자기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선언하심과 동시에 인류에게 세상을 감독하게 하셨다. 성경은 첫 사람 아담을 첫 창조물에 대한 언약적 머리로 묘사한다(창 2:15; 롬 5:18-19; 고전 15:45).

또한 동물에 대한 하나님의 감독, 공급, 그리고 보호(시 104:14, 21, 24, 27; 145:14-16; 147:9; 마 6:26; 눅 12:24)는 인류를 통해서 드러난다(창 1:28; 2:15; 시 8:6-8[7-9]).

동물의 고통과 죽음

논증 5: 성경은 일반적으로 동물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고통과 죽음을 타락으로 인해 받은 저주의 일부로 묘사한다. 따라서 인류의 타락 전에도 이미 수백만 년 동안 동물이 죽고 고통을 겪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하나님은 애초에 인간의 죄 때문에 세상을 저주하셨다. 따라서 육지 동물과 새의 죽음과 고통은 인류의 타락으로 인한 것일 가능성이 높으며, 오랜 지구 모델의 요구와는 달리 타락 전에 동물의 고통과 죽음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에덴동산 인류의 반역이 가져다준 결과는 육체적이고 영적인 인간의 죽음이었다(창 2:17; 3:16-19; 롬 5:12). 그러나 동산에서 범한 인류의 죄는 인류뿐 아니라 피조물 전체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님은 동물까지 저주하셨다(창 3:14). 하나님은 땅도 저주하셨다(창 3:17-19). 하나님은 온 세상을 썩어짐 속에서 종노릇하도록 두셨다(롬 8:20-21).

성경은 줄곧 동물의 죽음을 저주와 그리고 동물의 생명을 축복과 연관시킨다. 이 두 가지 현실 다 동물과 새의 죽음과 고통이 타락으로 인해 발생했으며,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첫째, 뱀이 들에 있는 모든 가축과 짐승보다 “더 많이/이상”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은 모든 육지 동물이 실제로 인간의 타락에 의해 직접적이고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음을 의미한다(창 3:14; 참조, 3:1).

둘째, 땅의 저주(창 3:17)는 노아 탄생(5:29)의 배경을 형성하고 홍수라는 심판 저주는 홍수 후에 인간 외 육지 생물을 보존하기 위해 구별되어 방주에 들어간 동물을 제외하고(6:19-20; 7:3), 모든 짐승과 새와 기는 것의 죽음을 포함한다 (7:21-23).

셋째, 이집트에 내린 열 가지 재앙 가운데 여덟 가지 재앙은 동물이 인간에게 해가 되거나 또는 가축의 몰살 등으로 인해 인간의 생존에 동물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출 8-12장).

넷째, 유월절 어린양의 형벌하는 대속의 피만이 사람과 짐승을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 장자의 생명을 보존하였다(출 12:12-13).

다섯째, 모세에 의한 (구약) 언약의 축복 아래, 인류는 짐승의 포식으로부터 안전하게 살 것이며(레 26:6), 가축 떼가 번성하고 또 번성할 것이다(신 7:13-14, 28:4, 11). 이와 대조적으로, 저주 아래서 인간은 포식 동물을 두려워하고(레 26:22), 가축 떼가 쇠약해질 것이며(신 28:18), 죽은 인육은 짐승과 새의 음식이 될 것이다(신 28:26). 이러한 현실은 모든 선지자에 의해서 확증되었다(예: 렘 7:20; 12:4, 학 1:9-11, 말 3:9-12; 4:6).

여섯째, 심판의 전쟁이라는 맥락에서 이스라엘을 부른 여호와는 동물을 포함하여 호흡하는 모든 것을 도살하도록 하셨다(신 13:15; 20:16; 삼상 15:3).

일곱째, 전도서의 설교자는 동물의 죽음을 인간의 죽음과 연관시키고(전 3:19-20), 두 죽음의 현실을 타락으로 인한 저주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연결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창 3:19-20 참조). 이런 연결은 동물과 인간의 죽음이 동시에 시작되었음을 강력하게 가리킨다.

오랜 지구 창조론자는 저주로 인해 동물 세계에서 실제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명확히 하려고 애를 쓴다. 왜냐하면 그들도 (수백만 년에 이르는) 오랜 기간 인간의 타락이 없었는데도 동물이 죽고 고통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저주한 그 순간을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지적하고 있고, 일반적으로 동물의 죽음을 저주와 연관시킨다.

육식과 저주의 목적

논증 6: 에덴의 회복으로서 영원한 상태에서 동물의 죽음을 제한하는 것은 모든 지상의 죽음이 타락 이후에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육식은 저주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를 상징하기에, 영원한 상태에서 동물의 죽음을 단지 구속된 인류의 육식이라는 용도로만 제한하는 것은 에덴을 넘어서는 확대라기보다는 에덴의 회복을 보여줌과 동시에 지상에서의 모든 죽음이 다 타락 이후에 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지구는 젊다.

성경은 모든 형태의 죄, 고통, 그리고 죽음을 오로지 타락하고만 명시적으로 연결한다(창 3:14-15; 롬 1:24, 26, 28; 8:18-23).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인간의 반역과 그 결과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인간 반역의 결과 속에는 암과 자동차 사고와 같은 자연적 악과 더불어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도덕적 악을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악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성경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만물을 회복하고(행 3:21), 만물을 하나로 연합하고(엡 1:10), 만물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골 1:17), 사망과 눈물과 고통을 없애며(사 25:8; 계 21:4), 나아가서 모든 저주와 부정한 것을 근절하기 위해서(계 21:27; 22:3) 계획되었다고 가르친다.

영원한 구속의 실재는 (타락 전)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것으로 그리고 첫 아담이 확보하지 못한 것을 완성함으로써, 태초의 에덴 그 너머로 확대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새 창조/재창조는 타락 전의 원래 창조와 유사한 요소를 포함할 것이다(겔 36:35; 사 51:3; 롬 8:20-21; 계 2:7; 22:1-5, 14, 19). 그러나 동시에 새 창조 속에는 구원을 주신 왕 되신 예수를 향한 경외심을 유지하기 위해 선택받은 자들에게 꼭 필요한 반역 이전의 사실 몇 가지를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것 외에는, 과거의 악이나 저주가 주는 잠재적 영향은 전혀 없을 것이다(계 21:27; 22:3). 과거를 생각나게 하는 것의 예로는 죄에 대한 탄식(겔 36:31), 한때 사해 주변 습지에 있던 소금의 존재(47:11; 참조 창 13:10; 19:24-26), 단일 언어가 아닌 변형된 여러 언어(습 3:9; 계 5:9; 7:9; 참조 창 11:6-9), 그리고 시각적으로 희생적이며 정복하는 어린양으로 그리스도를 식별하는 것(계 5:5-6, 12-13, 7:10, 14, 17:14, 19:9, 21:22-23, 22:1, 3) 등이다.

이처럼 회복, 화해, 그리고 근절의 맥락에서 볼 때, 동물 사이에서 포식 활동이 중단되고 오로지 인간의 육식을 위해서만 동물의 죽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타락한 시대에 동물의 포식 활동은 가축과(삼상 17:34-35; 사 31:4; 암 3:12) 인간을 위협하지 않는 한(시 104:23; 신 7:22; 삿 14:5; 왕하 17:25), 하나님의 계시된 목적의 일부이다(시 104:21; 욥 38:39-41). 인류의 타락과 전 지구에 걸친 저주 이후에야 인간까지도 동물이 자행하는 약탈 행위의 표적이 되었고, 부분적으로 하나님은 동물이 인간을 두려워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사람에게 육식을 허락하셨다(창 9:2-3; 참조 1:30). 이 저주받은 세상에서 육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주권을 행사함으로 하나님을 드러내고 닮고 또 대표하라는 인류의 소명을 확인시킨다(1:26, 28; cf. 시 8:6-8[7-9]). 또한 저주를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을 증언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동산에서 인류를 추방한 초기부터 인간은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을 구별했다(창 7:2-3, 8). 하나님은 인간에게 육식을 허락한 이후, 오로지 정결한 동물만 먹도록 하셨다(레 20:25-26). 성경은 어떤 식으로든 동산의 뱀처럼 보이는 모든 동물을 부정한 것으로 취급한다. 그 이유는 교활하고 약탈적이며 살인적인 본능과(창 3:1-5, 2:17; 참조, 요 8:44, 10: 10), 또는 죽음 및 낭비와 연결된 먼지를 먹는 것이기 때문이다(창 3:14).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에(엡 2:16; 골 2:15; cf. 눅 10:18; 요 12:31; 계 12:9), 이제 모든 음식이 깨끗해졌다(막 7:19; 행 10:10-15, 28; 롬 14:14, 20; 딤전 4:4). 십자가로 인해서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이 저주를 이기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증거가 된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 사역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회복된 새 피조물과 새 언약은 짐승과 새와 기는 동물에까지 미침으로 전 세계가 안전해질 것이다(호 2:18; 사 35:9). 그리고 한때 포식자였던 동물(아마도 적대적인 국가의 상징)이 채식 동물이 되어 어린 양, 어린 왕과 함께 평화롭게 거주하므로 이제 그 어떤 피조물도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다(사 11:6-9; 65:25; 참조 9:6-7). 그 완성의 날에 하나님은 모든 원수의 압제를 엎으시고 모든 인간의 질병과 고통과 사망을 폐하시고 저주를 끝낼 것이다(사 25; 65:17-25; 계 21:3-5, 22:3).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인간은 포식 동물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동물이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그리스도가 타락으로 인해 잘못된 세상을 고친 새로운 세상의 일부이며, 타락 전 상태가 아니라 그보다 더 나아진 상태로 복귀하는가를 식별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완전히 극복하셨다는 지속적인 증거로서, 인간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계속해서 동물을 먹을 것이다(예: 사 25:6, 8, 겔 47:9-10, 마 22:2-4; 눅 22:15-18, 29-30; 계 19:7, 9; 21:1, 4, 10; 참조 눅 24:41-43; 요 21:12-13).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후에야 인간에게 육식을 허락했고, 그것은 저주를 이기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증언한다. 그렇기에 십자가에서 부정한 뱀을 물리침으로 예수님은 승리의 절정에 이르렀다. 영원한 상태에서 동물의 죽음이 단지 구속된 인류의 육식이라는 용도로만 제한되는 것은 동물의 죽음이 타락 이전에는 없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모든 사실은 젊은 지구를 의미한다.

결론: 젊은 지구

성경은 지구가 젊다는 믿음을 뒷받침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다음을 통해서 확인한다. (1) 성경이 창조를 문자 그대로 일하는 주간으로 묘사하는 방식, (2) 신약이 인류의 초기 역사를 태초와 연결하는 방식, (3) 창세기의 직선 족보에 시간적 갭이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 (4) 성경이 일관되게 인류를 지상 피조물의 머리로 묘사하는 방식, (5) 성경이 지속적으로 동물의 죽음과 고통을 저주와 연관시키고, 타락 이전에는 그런 죽음이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 그리고 (6) 영원한 상태에서 인간의 육식이 예수님의 저주 극복 사역을 증언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일반적으로 동물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고통과 죽음을 타락으로 인해 받은 저주의 일부로 묘사한다

제이슨 드루치(Jason DeRouchie) | 제이슨 드루치는 미조리주 켄자스시에 있는 Mid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의 구약과 성경 신학 연구 교수이다. 그는 Hands to the Plow Ministries와 함께 목회자들에게 성경 신학적 훈련을 제공하고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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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 독소조항 담은 제주평화인권헌장 폐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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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칼럼] 복음이 실제 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