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보는 이슬람(20)
공산주의 이후 두 이념의 갈등
이전 세기까지 가장 커다란 경계의 대상이던 공산주의가 무너짐에 따라 그 뒤에 남게 된 거대한 두 이념의 갈등이 더욱 본격화되었다. 바로 비자본주의의 이슬람과 자본주의의 기독교가 그것이다. 지금 두 이념이 중동에서 만나서 충돌을 반복하면서 점차 전 세계로 그 여파가 확산하고 있다.
지금 이슬람 세계는 이슬람법이 지배하는 이슬람 공동체를 재건하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다. 이슬람은 매우 독특한 정치와 사상으로 서구적 가치 체제와 제도에 도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분명하게 해 준 두 사건이 1979년 이란 호메이니에 의한 이슬람 혁명과 1991년 중동 걸프 전쟁이었다.
당시 이슬람 혁명을 통해 등장한 이란의 호메이니는 당시의 초강대국 미국과 소련을 동시에 인정하지 않았으며,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을 통해 서구 세력에 맞선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전 세계에서 폭발적인 이슬람 종교 부흥을 이끌기도 하였다. 한편, 서구 열강에 도전하여 이슬람의 존재를 과시해준 이라크 지도자 사담 후세인도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영웅으로 떠올랐으며, 그 결과 전 세계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의 확장과 강화라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슬람법은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지 않는 원칙을 고수한다. 이슬람의 궁극적 목표는 움마 즉, 이슬람 공동체를 이 땅에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행위는 사회적이고도 정치적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 이슬람의 교리와 가르침은 이슬람 사상을 넘어 사회적 사상이며 규범이고 공동체(혹은 국가) 안에서 실정법이 될 것을 지향한다. 따라서, 최근 중동의 이슬람에 의한 급진적 저항운동은 일시적이고 갑작스러운 표출의 테러라기보다는 근대 이슬람의 정치사상 발전 및 이슬람 운동과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슬람의 변화
이슬람 안에서의 내부적 변화는 지금까지 두 양상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나 아프가니스탄의 ‘알아프가니’ 같은 보수적 범이슬람주의와 무슬림 형제단이나 알카에다 같은 급진적 원리주의자에 의한 변화이다. 다른 하나는, 터키공화국의 건립자 아타튀르크를 통해 나타난 세속주의 이슬람이나 이집트의 무하마드 알리 등과 같은 이슬람의 근대주의자들에 의한 변화이다.
1990년 이후 이슬람 세계가 당면한 공동의 문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이슬람 세계의 통일문제이고, 둘째는 이슬람법과 국가주의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시온주의를 표방하는 이스라엘과의 갈등 문제이다.
그러므로, 최근 이슬람의 급진적 성향은 서구 문명의 팽창과 패권주의에 대응하는 한 전략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개혁을 통해 서구 세력에 상대적 우위를 확보하려던 이슬람은 그 결실을 볼 수 없게 되자, 그 방향을 ‘급진’으로 전환하게 되었으며, 무슬림들의 봉기와 지하드(Jihad)의 확대로 이어져 나갔다.
이슬람에서 얘기하는 원래의 지하드는 보이지 않는 인간의 내면적 투쟁을 의미하기에 무슬림들 자신도 현재의 폭력적 지하드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에게 항상 보이지 않는 지하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난 역사 속에서 실제로 비무슬림들로부터 압박받던 다수의 무슬림이 존재했으며, 이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무슬림들의 항거는 지금 중동을 비롯한 전 지구촌을 무질서와 새로운 갈등과 분쟁으로 몰아가고 있다.
수니와 시아의 탄생
7세기 초 중동에서 시작된 이슬람교가 약 600여 년의 이슬람 제국(A.D. 632~1258) 시대를 거치는 동안, 이슬람의 거대 양대 종파인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에서 나타난 상호 갈등과 충돌은 오늘날, 이 둘 사이를 영원한 결별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현재, 이슬람교 안에서 종파별 인구 비율을 살펴보면, 세계 무슬림 총인구의 85~90%를 차지하는 수니파와 10~15%를 차지하는 시아파로 나뉜다. 이 비율과 함께 아래 그림1)에서도 보이듯이, 시아파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수니라는 거대한 바다에 둘러싸인 하나의 섬으로 표현할 수 있다.
수니와 시아의 어휘적 의미
수니는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가르침인 ‘순나(Sunnah)를 따르는 자’라는 뜻이 있다. 그러나, 이슬람의 중심 세력에서 정치적으로 이탈된 시아 무슬림들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더 옳을 것이다.
한편, 시아파는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 이후 존재했던 총 4대까지의 정통 칼리프 시기 가운데 제4대 칼리프인 ‘알리’를 따르는 자(Shi’at’ Ali)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 특히, 무함마드의 직계 혈통으로 사촌이면서 동시에 무함마드의 딸, 파트마와 결혼한 사위였던 ‘알리’만의 후계자 승계에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부분이 수니파의 주장과 가장 어긋난다.
두 종파의 가장 뚜렷한 차이점
그러므로, 두 종파의 가장 뚜렷한 차이점은 교의적 차이를 포함해서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직계 혈통 칼리프인 ‘알리’와 그 후손만을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있다.
시아파 무슬림들에 의하면, 칼리프 제도 자체가 잘못된 후계자 계승이다. 즉, 당연하게 무함마드에서 알리에게로 직접 계승돼야 했다. 왜냐하면, 무함마드의 후계자는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선택된 신성한 빛을 받은 후계자여야 하는데, 그가 바로 ‘알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시아파 무슬림들은 선출이나 세습에 의한 후계자 계승인 수니파의 칼리프 제도를 부인하면서, 직계 혈통인 알리의 후손들로 이어지는 새로운 ‘이맘’제를 창안하였다.
물론, 두 종파 모두 단일 신 알라를 향한 믿음만은 같으며 변함이 없다. 왜냐하면, 이슬람을 믿고 따르는 모든 무슬림에게 핵심 교리 중 하나가 바로 단일 신 알라에 대한 믿음인데, 이는 꾸란에 근거하기 때문이다(꾸란 2:163). 그러므로, 이슬람교 안에서 수니파와 시아파의 구분은 이슬람 신학이 아니라 정치적 견해 차이로 보는 것이 지금의 양 종파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수니파와 시아파 갈등의 뿌리
요약하면, 이슬람의 역사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계속되어온 두 종파 사이에서의 상호 갈등과 충돌 그리고, 무조건적 적대 감정의 깊은 뿌리는 역사의 사실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하면, 시아파의 창시자 제4대 정통 칼리프 알리를 시작으로 당시 시아파의 모든 후계자가 정적이었던 수니파 무슬림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특히, 칼리프 알리의 둘째 아들 후세인과 그의 모든 가족이 지금의 이라크 땅인 ‘카르발라’에서 당시 수니파 무슬림들에 의해 살해된 사건(A.D. 680)으로부터 시아파가 정식으로 시작되며, 두 종파가 다시는 합쳐질 수 없는 결정적 사건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시아파 모든 무슬림은 이 역사적 비극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1,40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잊지 않고 해마다 이 사건을 추모하며, 그날의 슬픔을 되새기며 복수할 것을 다짐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슬람 안에서 시아파 무슬림들과 수니파 무슬림들과의 불편한 관계이며, 이 역사적 비극에 대한 해결책이 적절하게 제시되지 않는 한, 이슬람의 두 거대 종파의 화합과 평화는 불가능할 것이다. (계속) [복음기도신문]
김종일 |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 졸업, 전, 중동선교회(MET) 본부장, 현, 터키어권선교회 대표. 국내 이슬람권 선교사 네트워크(M-NET KOREA) 회장, 저널 ‘전방개척선교(KJFM)’ 편집인, 아신대학교(ACTS) 중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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