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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우리가 성화할 수 있는 이유(빌 2:12-13)

사진: Samantha Ball on Unsplash

저는 개인적으로 다른 어떤 신학적 주제들 보다도 성화를 이해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물론 이 신비하고 오묘한 진리를 완벽하게 깨달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공부하면서 예전보다 훨씬 더 선명해졌습니다.

그런데 저뿐만 아니라 성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시는 분들이 꽤 많으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얻는다고 선포하는데, 성화를 이루기 위해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성경은 또한 말하기 때문입니다. 얼핏 보면 이 두 명령이 서로 상충되고 모순되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은 구원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바탕이 될 때 해소가 됩니다. 따라서 성화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앞서서 구원의 전체 그림을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구원은 주님이 시작하시고 이를 유지하시며, 끝까지 스스로 마무리하시는 그분의 완성작입니다(빌 1:6).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 끝은 이미 보장된 것이지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는 구원의 시작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효력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이 구원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단계들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의 완성된 퍼즐로 이해하는 거시적인 안목이 필요합니다. 구원의 전체 숲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전체 그림을 구성하는 각 퍼즐의 특징 또한 꿰뚫어 볼 수 있는 미시적인 시각이 필요합니다. 숲을 구성하는 각각의 나무들의 특징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각 단계들은 전체 구속사적 그림을 완성하는 각각의 구성요소이며 이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구원의 첫 번째 단계는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겪게 되는 칭의와 거듭남의 구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많은 경우가 이 첫 번째 단계를 지칭합니다. 칭의는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최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더 이상 죄 없다고 선포해주시는 것을 지칭합니다. 이는 외부적으로 우리의 신분이 죄인에서 의인으로 온전히 변화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칭의의 사건과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우리가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를 우리는 중생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3:5에서 예수께서 언급하신 것처럼, 이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어떠한 발전이나 성장의 개념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새 창조의 개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을 때 외부적으로는 죄인에서 의인으로 선포가 되고, 내부적으로는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어 주님의 진리에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첫 번째 단계의 구원은 단회적이고 순간적으로 일어납니다. 우리 일생 일대에 단 한 번 일어난다는 뜻이지요. 칭의와 거듭남은 결코 반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 단계를 설명하기 이전에 마지막 구원의 단계를 살펴보길 원합니다. 이는 우리가 잘 아는 영화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칭의와 거듭남을 통해 의인이 되었고 내면이 변화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지만, 이 생에서는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는 죄에서 완전히 자유하게 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됩니다(빌 3:21). 이것이 바로 구원의 마지막 단계인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구원 또한 첫 번째 단계와 마찬가지로 단회적이고 순간적으로 일어납니다. 우리는 죽음의 찰나의 순간에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그리스도와 영원히 조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중점적으로 다룰 성화는 첫 번째와 마지막 사이에 끼어 있는 구원의 두 번째 단계입니다. 이 둘과는 다르게 성화는 점진적이며 발전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성화는 어느 순간에 갑자기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삶의 현장 속에서 매일을 씨름하고 성장시켜 나가야 할 과정인 것이지요. 따라서 성화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순간부터 그리스도를 뵈옵는 마지막 순간까지 오랜 시간 동안 겪어야 할 필연적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성화는 과연 무엇일까요? 성화는 거룩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또한 죄로부터 단절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신분적으로 죄에서 단절되고 내면적으로는 새롭게 거듭나게 된 존재가 일생 동안 점점 더 죄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영화의 완전한 단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성화는 칭의와 거듭남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거룩하게 될 수 없습니다. 이는 성화의 과정이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그분의 주권적이고 초자연적인 영적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성화가 진정한 성화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성령께서 우리 내면을 계속 새롭게 하시어 도덕적으로 고결한 사람이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가 거룩해지는 것은 주님의 초자연적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바울은 빌립보서 2:12-13절을 통해 이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성화의 방법과 그 근거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성화의 방법

우리는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거룩한 존재로서 세상과는 구별되게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는 존재인 것이지요. 우리는 세상의 가치를 본받지 않고 주님의 뜻에 따라 살기 위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은 곧 성도라는 이름에 걸맞게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또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기도 합니다. 천국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데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것이야 말로 세상과 구별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십자가에 의해 세상과 단절되었고 지금도 구별된 존재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주님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명령하십니다.

본문 2:12은 이렇게 말하죠.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여기에서 말하는 구원은 우리가 아까 살펴본 두 번째 단계인 성화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구절을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얻는 칭의와 거듭남의 구원으로 생각하면, 큰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마치 우리가 스스로 죄에서 건짐 받을 수 있는 것처럼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성화의 구원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맹점은 우리에게 시작된 구원을 능동적으로 실행하라 명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이루라”는 동사는“어떤 상태가 되도록 원인을 제공하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5:3절에서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 에서 “이룬다” 혹은 “낳는다” 는 의미와 동일합니다. 그러니까, 빌립보서 2:12에서 말하는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뜻은 너희가 거룩하게 되는데 그 원인을 제공하라는 뜻입니다. ‘너희 안에서 시작된 거룩의 역사가 더욱 그리하도록 능동적으로 이를 추구하라’는 의미인 것이지요.

따라서 이를 보았을 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화는 우리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죄를 멀리하고 그분을 더욱 가까이 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거룩의 역사에 동참시켜주신 주님의 은혜는 우리를 수동적인 신앙인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되려 주님은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로서 자신의 자녀가 더욱 고귀한 성품을 소유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의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거룩을 추구하는데 말입니다. 이는 인격적인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를 로보트와 같이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의지와 생각이 박탈된 존재로 지으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칭의와 거듭남은 우리가 결코 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분 홀로 하셨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 또한 그분이 완성하셨죠. 그런데 미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성화의 순간 만큼은 같이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시간을 통해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안에서 그분의 임재를 더 뜨겁게 느끼기를 원하세요. 그분과 더욱 깊은 교제와 연합을 맺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성화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본문은 성화를 이루기 위한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두렵고 떨림으로 주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거룩하신 주님 앞에 우리의 합당한 반응은 그분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의 그 크신 위엄과 존귀와 능력 앞에 감히 얼굴을 들 수 없는 경외를 말합니다. 지존자를 향한 숭고한 경배의 자세이죠. 주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태도를 원하십니다. 신명기 10:12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우리는 그분께 합당한 공경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항상 그분께 대한 순종과 함께 합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가 순종함을 통해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12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바는 이러한 뜻입니다. “지금껏 너희가 순종해왔던 것처럼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런데 내가 있을 때 보다도 내가 없을 때 훨씬 더 순종하는 가운데 하라.” 빌립보 성도들은 구원의 순간부터 지금까지 순종의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뜻에 넙죽 엎드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바울 자신이 없을 때에 더욱 순종함으로 그들의 성화를 이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쓰인 순종을 나타내는 복종이라는 단어는 ‘후파쿠오’라는 헬라어 입니다. 후파는 ‘아래에’라는 뜻이고, ‘아쿠오’는 무언가를 듣다는 뜻입니다. 곧, “어떤 들은 것 아래에 자신을 의지적으로 위치시키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그저 듣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들은 메시지에 대해 순종하는 자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가 복음을 ‘후파쿠오’ 했다는 것은 그 복음 메시지에 철저히 나 자신이 굴복했다는 뜻인 것이지요. 사도행전 16장에서 루디아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그러했던 것처럼, 또한 간수와 그 가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를 통해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백성이라면 순종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천국행 티켓을 얻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되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 되시어 삶을 통치하시는 왕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는 진정 거룩해 질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화되는 것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존 맥아더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순종은 성화에 필수적입니다. 순종 없이는 성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굴복하여 새 사람이 된 것처럼, 우리는 철저히 그분의 말씀 앞에 나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우리는 진정 그리스도인 다워질 것 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 묵상을 절대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뜻이 계시된 성경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더욱 깊이 알기 위해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치 귀한 보물을 찾듯이 그분의 꿀 같은 말씀을 얻으려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발견한 진리 앞에 내 생각을 굴복시키겠다고 다짐하기를 바랍니다. 이는 결코 수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능동적으로 순종하기로 결심할 때 주님은 진정 여러분을 거룩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2. 성화의 근거

하지만 성화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매우 어렵고 고통스러운 과정이죠. 내면에서 계속해서 꿈틀거리는 죄를 제어하기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합니다. 죄를 짓기란 매우 쉽고 빠르지만, 이를 회개하여 거룩으로 나아가기란 엄청난 시간과 노력, 그리고 수많은 에너지를 요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구원 받은 백성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치열한 영적 전투 안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내면으로부터 말이지요. 곧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려는 속사람과 이를 거스르려는 죄의 영향력이 항상 충돌하는 영적 현실을 매일 대면합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는 어쩌면 곤고한 사람일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처한 형편이나 처지가 참 딱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소망을 품고 기쁨의 찬양을 불러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어 능력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왕의 왕께서 친히 우리 삶의 원동력이 되어 주십니다. 주님은 성화의 진정한 동기가 되십니다. 본문 2:13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본문에서 “행한다”는 동사를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는 무언가를 작동시키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불어넣는 행위를 뜻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화할 수 있는 그 근거는 명확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어 그분의 무한하신 힘을 제공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우리를 거듭나게 해주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초자연적인 힘의 역사로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이 초자연적 역사가 우리 내면 안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분은 자기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어 그렇게 행하도록 인도하십니다. 13절 중반부터 이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 뜻은 주님 자신의 영광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마음을 주시어 그것을 행하도록 이끄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선한 목적을 위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이는 어떠한 강요나 압박을 가하셔서 우리로 행하도록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되려 주님은 자비하시고 인자하신 그 성품으로 우리의 마음을 신묘막측하게 바꾸어 주십니다. 이는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현실입니다.

곧, 우리가 하는 모든 선한 행위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후서 8:16-17이 이를 잘 설명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디도가 자발적으로 했지만, 그를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셨습니다. 그의 마음을 촉발시키시어 선한 일을 하도록 이끄셨던 것이지요. 곧 주님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일하심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역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선한 생각과 그러한 소원을 절대 품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죠. 그런 우리가 형제 자매의 필요를 위해 내 것을 기꺼이 포기한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핍박에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려 한다면 이는 주께서 우리 속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만약 교만했던 내가 영적 공동체의 덕을 위해 겸손한 사람이 되기로 작정했다면, 그것이야 말로 주께서 자신의 기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 안에서 행하고 계시다는 뜻인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모든 수고와 노력을 다해 성화를 이루도록 전진해야 합니다. 주님의 일하심을 더욱 뜨겁게 경험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능동적인 순종의 자세를 취할 때 그분의 역사를 진정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능력은 결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능동적 순종 없이는 결코 그 목적을 성취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주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의 노력을 통해 성화를 이뤄 나가십니다.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능동적으로 행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주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끝으로 여러분께 이 말씀을 드리고 글을 마치려 합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여러분. 영화의 순간까지 순종의 아름다운 발자취를 능동적으로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그 안에서 주님의 임재를 뜨겁게 경험하기를 소망합니다. [복음기도신문]

강민구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내 손안의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복음기도신문.> 제보 및 문의: gnpnews@gnm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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