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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 따라 순종, 이주민의 친구 선교사 되다

이주민과 함께 하는 전철한 선교사 (한국외국인선교회 대표)

전철한 선교사 (한국외국인선교회 대표)

268호 / 나눔&나눔

선교사가 되겠다고 결단하면, 나름 정해진 과정을 통해 훈련을 거쳐 선교사 파송을 받게 된다. 그러나 전철한 선교사의 선교사 준비는 한국의 격동기에 누님 집에서, 군대에서, 배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그리고 지금은 국내에서 이주민 선교 사역으로 섬기고 있다. 국내 체류 외국인이 2020년 기준 200만 명이 넘는 지금,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한국외국인선교회’ 전철한 선교사를 만나 그의 삶과 사역을 들어본다.

– 주님을 어떻게 만나게 되셨나요?

“유치원 때 누님을 따라 처음 교회에 가게 됐어요. 교회에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부흥회 때 은혜를 많이 받으면서 신학교에 가게 됐어요. 1학년을 마치고 방학 기간에 결혼한 누님 집에 가게 됐어요. 시아버지가 산중파라고 하는 십자가의 도를 강조하는 분이셨어요. 그분이 로마서 1장으로 말씀을 전하시는데, 그때 제 마음속에 근본적인 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이 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됐죠. 그 전에는 교회도 열심히 다니는 나를 위해 예수님이 왜 돌아가셨는지 이해가 안됐었죠. 신앙의 전환점이 그때 이뤄졌어요.”

신학교 1학년 때 십자가의 도를 깨닫다

– 그 이후 생활에 변화가 있었나요?

“그곳에서 1년 반 정도 머물면서 성경을 공부했어요. 그런데 신학교를 그만 다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성경은 많이 알지만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한 제 자신 때문이었어요. 당시에는 문선명이나 박태선 같은 사람들이 한국 교계에 심각하게 악영향을 끼칠 때였어요. 내가 말씀대로 순종하지도 못하는데 성경을 더 많이 알면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무명한 사람으로 시골에서 고아와 과부를 섬기면서 평생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노동하면서 고아들과 공동생활을 했어요. 그리고 틈만 나면 성경을 봤어요. 지금 돌이켜 보면 제 신앙의 기초를 거기서 주님이 세워주신 것 같아요. 그러나 이후에 군대 영장이 나와서 군에 입대하게 됐어요.”

– 군대에서도 주님이 어떻게 이끄셨는지 궁금하네요.

“훈련을 마치고 카투사(KATUSA, 미 육군에 증강된 한국군)로 배치를 받게 됐어요. 그때는 카투사가 뭔지도 몰랐어요. 주일에는 교회에 가서 반주도 했더니, 군종사병이 신상명세를 물었어요. 신학교를 1년 다녔다고 얘기했더니 군종사병으로 근무를 하게 됐어요. 그렇게 미군부대 포 사령부에 있으면서 예배를 섬기게 됐어요. 10개월이 지났을 때, 미군이 철수를 하게 되면서 한국인 카투사들은 한국 부대로 넘어가야 될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마침 미 8군 합창단 멤버가 되면서 한국에 있는 미군부대를 다니며 위문 공연을 했기 때문에 카투사에 남아 있었어요. 그때 미국 군인들과 생활을 하면서 영어와 외국 문화를 배울 수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선교사 훈련을 시켜주신 거죠. 만 2년 정도 용산에서 있었어요.”

제공: 전철한 선교사

– 그렇게 하나님이 어학 공부와 공동체 훈련을 시켜주셨군요.

“친구들 중에 가스펠송 그룹이 있었어요. 이들과 주말이면 약수동에 있는 미국 군인들을 위한 선교단체에 가서 친구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어요. 그러던 중에 한 미국 선교사님을 알게 되었어요. 제대할 쯤 되었을 때, 선교사님이 제대하고 뭐할 거냐고 묻더군요. 학교에 복학할 거라고 이야기했더니 센터에서 숙식을 제공해주겠다고 오라고 하셨어요. 2년 동안 그곳에서 인턴십 같은 시간을 보냈어요. 어떻게 선교하는지도 보게 되고, 주말에는 자연스럽게 선교 훈련을 하게 된 것 같아요.”

– 당시에는 그런 하나님의 섭리를 다 알 수 없었겠지만 주님의 인도하심이 놀랍네요.

“학교를 졸업할 때 미국 친구들이 축하파티를 열어줬어요. 센터에서 간증도 하고 영어로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섬기겠다.’고 나눴죠.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어떤 분이 쪽복음을 제게 보여주시면서 인천에 있는 외항선교회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사역자가 필요하다고 하셨어요. 외국 선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관이더군요. 당시에는 선교라는 말도 생소하고, 선교가 뭔지도 몰랐어요. 그분이 여러 번 오셔서 인천에 놀러오라고 하셔서 한번 가봐야겠다는 마음에 찾아갔어요. 배를 타는 것도 항만 출입증, 승선 허가증 같은 서류가 필요했어요. 서류를 준비해서 배에 올랐는데 너무 좋았어요. 배에는 20~30명의 선원이 있었고, 유럽, 스리랑카, 인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곳에서 간증하고 설교하면 여러 나라 사람들이 같이 듣는 거예요. ‘이런 기회가 있구나.’ 그렇게 1975년 3월 중순부터 어느덧 선교단체에서 일을 하게 됐어요.”

눈을 떠보니 선교사의 삶을 살다

– 자연스럽게 선교사의 삶이 시작된 거군요.

“영어 쪽복음과 기드온협회에서 나오는 한영 성경을 들고 다니면서 나누고 전도했어요. 배 안에서의 커피타임은 아침 10시 반, 오후 3시 반 정도 되는데, 그 시간을 이용해 전도를 해요. 선장의 허락을 받고 선원들 생일파티도 해줘요. 선물도 준비하고 30~40분 찬송하고, 간증하고, 설교하면서 복음을 전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엉터리였어요. 그곳에는 무슬림, 힌두교, 불교도 있었는데, 사영리가 그들에게 이해가 안 되는 복음인 거죠. 당시 표현으로 ‘무데뽀’였어요. 그들의 반응이 어떻든 내가 전하는 것으로만 만족했어요. 그래도 그런 순종을 통해 조금씩 선교에 접근하게 된 거죠.”

– 선교 훈련을 실전에서 하나씩 배워나가신 거네요.

“그렇게 생활하던 중 1975년에 한국에 로고스 배가 들어왔을 때, 통역과 번역, 안내하는 일을 제가 맡게 됐어요. 27세였던 그때 제가 로고스 팀을 섬기면서 선교에 대한 제 눈을 뜨게 된 것 같아요. 24~25개국 사람들이 배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과 교회 방문, 학교, 교도소 방문, 거리 전도, 교회 지도자 컨퍼런스 등의 프로그램을 함께 진행하면서 선교가 뭔지 보게 된 것이죠. 그때 한국 사람 3명이 로고스 배에 탔는데 제게는 아직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어요. 저는 그로부터 3년 뒤인 78년에 한국에 로고스호가 또 들어오면서 그때 배에 타게 됐어요.”

– 드디어 배를 타셨네요.

“여러 권유를 받고 영국에서 열리는 오엠 컨퍼런스에 참석하고 60여 명의 팀과 함께 유럽 대륙을 횡단해 이란에서 배를 탔어요. 보통 선교사라고 하면 말씀을 전하는 것만 생각하는데, 배에 타면 8시간은 막노동을 해요. 배는 사실 녹과의 전쟁이더군요. 그래서 페인트칠 하고 청소하고 엔진실에서 땀 흘리고 일하고 나면 ‘내가 왜 이 배를 탔나?’하는 생각도 들죠. 그렇게 노동하고 땀을 흘리는 게 선교사 훈련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어요. 10개월 정도 배를 타고 필리핀 민다나오에서 내렸어요. 이후 85년도에 다시 둘로스호를 타고 2년간 사역을 했어요.”

– 네, 그럼 배에서 계속 사역을 하신 건가요?

“아니요. 둘로스 사역을 거의 마칠 무렵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마음에 외항선교회와 상의 끝에 남아공에서 공부를 하고 그곳에서 10년간 사역을 하게 됐어요. 이미 그때는 결혼을 한 상태였고, 저희는 평생 그곳에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러나 월드컨선이라는 단체에서 북한에 영양실조가 된 아이들이 몇 백만 명이 된다면서 이들을 돕는 한국 데스크의 역할로 우리 가족을 초청했어요. 미국에 들어가 3년 정도 북한 사역을 했어요. 미국 각 지역을 다니면서 북한의 사정을 알리고 모금한 이후, 수백만 불어치를 북한에 보냈어요. 그리고 북한에 물품들이 누구에게 전달됐는지 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아무 답을 받지 못했어요. 그렇게 되니 사역을 더 이상 할 수 없어서 2000년도에 한국으로 들어오게 됐어요.”

▲ 로고스호 사진(위)과 1985년 선교사 파송예배(아래 왼쪽), 영국에서 게스트하우스 주인과 함께(아래 오른쪽).
제공: 전철한 선교사

북한 사역을 거쳐 이주민 사역으로

– 참 다양한 사역들을 경험하셨네요. 한국에 오셔서는 어떤 일들을 하셨나요?

“한국이 많이 변했더군요. 85년도만 해도 우리나라에 있는 외국인은 미군이나 선원 정도였는데, 버스나 전철을 이용하는 외국인이 많아서 깜짝 놀랐어요. 알아봤더니 외국인 노동자, 유학생, 다문화 가정 등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이주민이 30만 명 정도 된다더군요. 이 사실을 안 뒤에 9개월 동안 고민했어요. 이들의 필요가 보였고 이들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그러나 외항선교회에서 사무총장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정된 터를 떠난다는 게 쉽지는 않았어요. 당장 월급도 없이 어떤 보장 된 것도 없었지만, 주님의 부르심이 확실했기 때문에 결정하게 됐어요. 그렇게 외항선교회를 사임하고 2001년 7월 1일 외국인선교회 사역을 시작했어요.”

– 외국인선교회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한국외국인선교회’는 영어로 Friends of All Nations(FAN)이에요. 이름에 선교라는 말을 넣을 수는 없었어요. 그들을 개종시키려고 접촉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어요. 그들의 친구가 되겠다는 마음이었죠. 인천 남동공단에 3000개 업소가 있다고 했어요. 한 공장에 외국인이 3명씩만 있어도 9000명은 되지 않겠나 생각이 들었어요. 이주민들과 어떻게 접촉할 수 있을까 알아보는 중에 한 장로님이 운영하시는 공장에 방글라데시인 6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장로님도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 부담이 있던 차에 우리를 만나게 되셨어요. 공장 한쪽에 컨테이너 박스를 놓고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게 됐어요.”

– 이주민들이 있는 현장으로 들어가신 거군요. 아무 대책에 없었던 게 하나님의 한 수처럼 느껴지네요.

“처음에는 외국인들 만나기가 어려웠어요. 모두 공장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거리에서 사람을 만날 수 없었어요. 이들과 어떻게 접촉할지가 관건이었죠. 7월에 사역을 시작했는데 8~9월까지 한 사람도 접촉이 없었어요. 그때, 외국인 이주민들은 명절 때 3일간 쉬기 때문에 그때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하라고 조언을 듣게 됐어요. 마침 월드컵 열기가 뜨거웠을 때여서 축구시합을 열기로 했어요. 그런데 추석 때 축구시합을 하려면 한국 사람들은 도와줄 수가 없었죠. 그때 한 교회의 도움으로 축구시합을 하게 됐어요. 교회에서 50명이 오시고, 외국인 근로자들 150명이 왔어요. 그때 축구도 하고 식사도 하면서 “우리는 당신들의 친구다. 어려울 때는 언제든 찾아 달라. 도와주겠다.”고 광고를 했어요. 저는 이후로 전화가 많이 올 줄 알았는데, 1~2주 동안 한 통도 오지 않았어요.”

– 축구도 효과가 없었군요.

“그런데 몇 주 후에 태국 사람에게 전화가 왔어요. 월급을 받아달라고 했죠. 3개월치 월급을 못 받았다는 거예요. 공장에 찾아가서 사장님께 인사하고 월급을 지급하도록 잘 부탁을 드렸어요. 물론 사장님은 어려워하셨는데, 우리도 수십 번 찾아가면서 결국 월급을 받게 됐어요. 월급을 받게 된 이 사람이 자기 친구들에게 여기 가면 월급 받아준다고 이야기를 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배에 오게 됐어요. 태국인들은 한국말과 영어를 잘 못하기 때문에 태국어 예배가 생겼어요. 6개월 정도 되니 그곳에 사람들이 가득 찼어요. 더 넓은 장소가 필요하게 됐죠.”

– 이주민들이 도움을 얻을 곳을 많이 기다렸을 것 같은데, 새로운 장소는 잘 구해졌나요?

“마침 공장이 2층으로 증축한다면서 우리가 150평을 쓰고, 공장이 50평을 쓰기로 됐죠. 예배실, 쉼터, 진료실, 식당 등을 만들고, 5개 언어권 예배 공동체가 생겼어요. 영어, 러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펀자브어. 그렇게 매주 150명 정도가 모여 예배를 드렸어요. 지역 교회와도 연합했는데, 찬양팀도 오고, 식사 봉사, 태권도 팀, 의료진도 오셔서 봉사를 해주셨어요. 그런데 5년 후 공장 주인이 바뀌게 되면서 지금의 사무실로 이사를 하게 됐어요.”

이주민의 월급을 받아주면서 시작된 사역

▲ 한 외국인 형제에게 세례식을 집례하고 있다. 제공: 전철한 선교사

– 들어오는 입구에 컨테이너가 있던데 그곳에서 각 언어별 예배를 드리시는군요. 그런데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가 있나요?

“이 사역은 한 장소에서 많은 숫자로 진행할 수 없어요. 언어권이 다양해서요. 그래서 이런 센터들이 모든 공간마다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이야기해 왔어요. 감사하게도 인천, 시화공단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40개 지부가 생겼어요. 이 일을 위해 미국에 있는 교회가 4만 불 헌금을 해주시기도 했어요. 국내 교회들의 헌신도 대단하고요.”

– 교회들의 연합과 섬김이 정말 대단하군요. 40개 지부도 상황이 어떤지 궁금해요.

“각 지부들의 상황은 다양합니다. 중도 입국한 청소년들을 섬기는 곳도 있어요. 한국 남성과 재혼해서 입국하는 여성들이 자녀를 데리고 와요. 그런데 10대 아이들이 오면 일반 학교에는 가지 못해요.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적응이 어려워요. 이들을 위한 대안학교가 청주, 인천, 부천, 광주 등에 5군데 있어요. 정부에서 지원을 받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해요. 폐교를 개조해서 사용하고, 강사비도 간신히 주는 정도지만, 학교는 훌륭하게 잘 운영되고 있어요. 이 아이들뿐 아니라 다문화가정 아이들도 어려운 처지에요. 그래서 방과 후 교실을 운영해서 복음을 전하고, 아이들을 통해 어머니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일들이 진행되고 있어요.”

– 사역이 다양하게 진행되네요.

“지금은 가정교회 지도자 훈련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어요. 가정교회 지도자 훈련을 받고 3년간 목회를 하면 자연스럽게 또 다른 교회를 재생할 수 있거든요. 제자훈련 프로그램이죠. 이것이 이주민 사역에는 필수적이에요. 이를 위한 교재도 있는데 40개 언어로 돼 있어요. 이렇게 사역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물 흐르듯이 해주신 것 같아요.”

– 이주민 사역에 교회와의 연합이 이렇게 밀접하게 돼 있는 줄 몰랐네요.

“이 일은 혼자 할 수 없고 교회와 함께 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교회들에게 각 지역에서 일어나는 이주민 선교 소식을 기도편지에 담아서 격월로 나눴어요. 한국교회는 물적, 인적, 영적 자원이 다 있는데, 교회를 동원해서 교회가 사역하게 해야 한다고 제가 속한 교단에 이야기를 했어요. 교단에 속한 3000개 교회 중에 1/10만 해도 우리 지부가 사역하는 것보다 더 강력하잖아요. 이런 것을 하다 보면 한국교회를 살리는 길이 되지 않겠어요? 어쩌면 이주민들이 온 것은 한국교회를 살리기 위한 마중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원봉사자들을 보면 자원봉사하다가 선교의 비전이 생기게 되는데, 교회도 이주민 선교를 하다 보면 반드시 비전이 생기고 선교적 교회가 될 거예요.”

이주민들이 온 것은 한국교회를 살리기 위한 마중물

– 혹시 그런 사역과 관련해 말씀해주실 내용이 있을까요?

“어떻게 해서라도 많은 교회와 함께 이 사역을 해야 돼요. 교회에 이 사역을 나누고,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이 비전을 가지고 사역을 해야 돼요. 코로나 기간 동안 1만 교회가 없어졌다고 해요. 그러나 남은 교회가 100명씩 전도하면 채울 수 있지 않겠어요? 성도가 50명 이상 되는 교회는 다 이 사역을 할 수 있어요. 이주민들을 훈련시켜서 그들이 본국으로 돌아간다면 이들처럼 좋은 선교사가 없어요. 이들은 돌아가면 자기 가족에게 선교를 하게 되잖아요. 그러나 이곳에서 도움만 받고 나간 사람은 본국에 돌아가서도 어린아이의 신앙으로 머물 수밖에 없어요. 이곳에 있을 때 십자가의 도를 만나고 생활이 변화된 사람이 본국에 가서도 그 나라에 파송돼 있는 선교사들을 도와 교회도 개척할 수가 있어요.”

▲ 사할린 공동체와 함께한 가을 소풍. 제공: 전철한 선교사

– 맞는 말씀이네요. 현재 이주민 선교를 하는 사역자들이 얼마나 되나요?

“한국에서 이주민 선교를 시작한 사람들의 수는 정확히 알 수가 없어요. 그러나 코로나 이후 선교지로 돌아갈 수 없는 선교사들이 많아요. 이 선교사들과 후원교회들이 연합하여 이주민 선교를 하는 수가 상당히 많이 늘어난 것 같아요. 한국에서 이주민 선교의 어려운 환경 가운데 하나는 이주민 선교사들을 교회에서 선교사라고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현실이에요. 그래서 대리운전을 해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도 있어요. 해외 선교사로 나갔다가 한국에 들어와 이 사역을 함께 하시는 분들도 있고, 목회하시면서 이주민 사역을 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이런 현실을 한국교회가 이해한다면 이주민 선교사역에 도움이 될 것 같아요. 한국에서 이주민 선교를 함께 하던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목사들이 유학을 하는 동안 우리와 함께 사역을 하다가 본국으로 가서 신학교를 세운 사람도 있어요. 또 본국에 나가 지부를 세우기도 해요. 지금은 10개 정도의 해외 지부가 있어요.”

– 끝으로 기도제목 나눠주세요.

“이주민들을 만나고 전도하기 위해서는 기숙사가 필요해요. 이들이 공장에 있으면 만날 수가 없거든요. 공동체 생활을 해야 삶으로 전도를 할 수 있어요.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줘야 전도가 되지 전도지로는 전도가 안 되거든요. 전도지로는 변화가 없어요. 기숙사를 위해 작년부터 기도하고 있어요. 기숙사가 속히 허락되도록 기도해주세요. 그리고 언젠가는 후임자가 와서 사역을 이어받아야 해요. 하나님이 준비시켜준 사람이 이어가도록 기도해주세요. 마지막으로는 두 자녀가 있는데 선교사역을 하다가 영적으로 번아웃된 첫째 아들이 회복되고, 비즈니스 선교를 하다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한 둘째 아들도 회복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복음기도신문]

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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