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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선 칼럼] 네가 낫고자 하느냐 : 『44번 버스』와 『이끼』에 대한 해석

▲ 영화 "버스44" 포스터. 사진 : changsuk1220 블로그 캡처

你要痊愈麽?: 关于『車四十四号』和『藓』的解释 约翰福音 5章5-8节

(요 5:5, 개역)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요 5:6, 개역)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7, 개역)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요 5: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44번 버스 이야기

최근 『44번 버스』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여러 인사들이 인용하여 말하고 또 기독교의 지도자들도 설교나 강의에서 말을 하기에 나는 이것이 어떤 것인가? 하고 살펴보게 되었다. 내가 살펴본 바로는 『44번 버스』에 대한 이야기는 2001년에 중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고 또 홍콩에서 『車四十四号』 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래서 나는 중국인터넷 사이트인 바이두에 들어가서 대강의 내용도 보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2001년 중국 실화로 바탕으로 한 영화

한적한 시골길에 여성이 운전하는 버스에 강도 두 명이 올라탔다. 그들은 승객들의 돈과 재물을 털고 여성운전사를 끌어내려 강간하고자 했다. 승객들은 모두 이 상황을 외면했다. 오직 한 청년만이 성폭행까지 하려는 강도들에게 저항하다가 오히려 그들의 칼에 찔렸다. 더 이상 저항이 없자 강도들은 여성 운전사를 끌어내려 성폭행을 하고 달아났다.

버스로 돌아온 여성 운전사는 칼에 찔린 청년을 내리게 한 뒤 그의 짐을 창밖으로 던진 후에 그대로 차를 몰고 떠났다. 자신을 돕다가 칼에 찔린 청년에 대한 그녀의 행동은 이상하리만치 매정했다. 일반적으로 본다면 강도에게 저항했던 그 청년은 사람들에게 칭송받아야 했고 여성운전사에게도 보다 따뜻하게 대해졌어야 했다. 그런데 여성운전사는 오히려 그 청년을 차에서 내리게 한 후 그대로 떠나버렸다. 청년은 그녀의 행동을 의아해 하면서 도로를 걷다가 지나가던 차를 얻어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 청년은 가던 길에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그것은 자신이 앞서 타고 있던 44번 버스가 절벽 아래로 추락하여 모두 사망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여성 운전사는 위기에서 자신을 돕던 청년만이 살 가치가 있고 나머지 승객들은 모두 살 가치가 없는 인간들이라고 판단하고 청년을 버스에서 내리게 한 후 절벽으로 차를 몰아 모든 승객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었다.

승객을 위한 변명

『44번 버스』는 정말 비극이다. 그런데 한국의 지도자들이 이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들은 여성 운전사가 두 강도에 의해 성폭행을 당할 때에 청년 이외에는 아무도 돕지 않았던 승객들의 방관자적인 태도와 무관심과 무정(無情)에 대해 비판한다. 그리고 우리의 사회는 그러지 않아야 한다고 교훈한다.

물론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 주변의 사람들이 돕지 않고 무정한 것은 비판받을 수 있다. 그런데 버스 안의 상황은 다른 면으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그것은 왜냐하면 시골길의 버스 안에는 장년의 남성들도 있었겠으나 여성과 노인이나 어린이가 있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나 노인이나 어린이는 강도에게 저항할만한 힘을 갖고 있지 않다. 또한 장년의 남성들이라고 해도 대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그 상황에서 흉기를 든 강도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용기를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만일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강도에게 저항한 청년처럼 그 상황에서 함께 힘을 모아 강도들에게 대항했다면 두 강도를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전쟁과 같은 상황인데 만일 버스 안의 승객들이 두 강도에 의해 일단 사기가 제압당한 것이라면 그 누구도 선뜻 나설 수 없었을 것이다.

여성운전사의 행동

오히려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여성운전사의 행동이다. 그녀는 자신을 도와준 청년을 제외하고 나머지 승객들이 살 가치가 없는 인간들이라고 판단하고 절벽으로 차를 몰아 모두 비참하게 죽였다. 물론 승객들이 여성운전사에 대해 아마도 비아냥거리고 야멸찬 태도를 취했을 것이다. 실제 상황에서 여성운전사가 버스를 절벽으로 몰아넣을 만큼 얄미운 승객들의 말과 행동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성운전사가 보았을 때에 그 승객들은 인간이 아니라고 판단할 만큼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승객들을 절벽으로 몰아넣어 죽인 여성운전사의 행동은 사람들이 이해할만한 것인가? 앞서 말했지만 버스 안에는 여성이나 노인이나 어린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강도가 침입했을 때에 제대로 저항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여성 운전사가 승객들이 도와주지 않아서 성폭행을 당했다고 그들을 모두 끌고 가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법률적으로는 오히려 살인에 해당하는 죄인 것이다.

복수의 방향은 옳은가?

참혹한 일을 당한 여성 운전사가 복수를 하려고 했다면 두 강도를 향했어야 했다. 여성 운전사는 버스를 몰아 절벽으로 갈 것이 아니라 경찰서로 가서 두 강도에 대해 말하고 버스 승객들 모두를 증인으로 삼고 경찰로 하여금 두 강도를 잡아 법정에 세웠어야 했다. 만일 강도에 대한 이와 같은 법률적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고 그녀의 마음에 분노가 계속된다면 그들을 찾아 죽이는 것이 오히려 더 합당한 복수였을 것이다. 그런데 여성 운전사는 순간의 격한 감정에 의해 죽을만한 죄를 짓지 않은 승객들의 방관자적인 무관심과 무정함을 사형이라고 판결하고 버스를 절벽으로 몰아감으로 그들에게 사형을 집행했다.

『44번 버스』에 대한 가장 중요한 해석은 무정했던 승객들의 태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순간의 격한 감정에 의해 복수의 칼날을 두 강도로 향하지 않고 오히려 승객들을 향했던 여성 운전사의 비극적 행위에 있다.

이끼

한국 지도층의 사람들이 『44번 버스』 이야기를 현재의 사회가 요구하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시민의식의 고취를 위해 승객들의 방관자적인 무관심과 무정에 대해서만 비판을 하는 것은 잘못된 관점이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대개의 사람들은 사실 『44번 버스』의 승객들처럼 살아가기 때문이다.

내가 2010년에 본 영화가 하나있다. 영화 제목은 『이끼』인데 한 마을 사람들이 겉으로 볼 때는 자연스럽게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촌장의 세력을 두려워하며 모두 통제된 상태에 있었다. 영화에서 그 마을 사람들의 상태를 정확하게 지적하는 단어가 ‘이끼’였다. 즉 세상의 물이 어떻게 흐르건, 물살이 강하건 약하건 상관없이 쥐 죽은 듯이 바위에 붙은 이끼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그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었고 그것은 또한 현실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44번 버스』와 『이끼』의 사회학적 해석

『44번 버스』에서 승객들이 두 강도들에게는 저항하지 못하고 여성운전사에 대해 야멸찬 태도를 보이는 것은 중국 사회에서 만들어진 중국인들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1989년에 중국에서는 민주화를 외치던 천안문 혁명이 있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에 의해 경제가 부흥하자 중국인들은 정치에서도 자유민주주의를 요구했다. 북경 대학교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중국의 민주화를 외쳤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공산당은 그들을 탱크로 뭉갰다. 그 이후로 중국에서는 누구도 정치에서의 자유를 말할 수 없었다. 오직 공산당의 자유가 중국 인민의 자유를 대신했다. 그런데 경제의 부흥에 따라 중국 공산당이 타락하고 부패하기 시작했다. 사실 중국 공산당의 모습은 중국인들에게 『44번 버스』에서 절대 권력을 갖고 있던 두 강도와 유사하다. 버스 안의 승객들은 두 강도에게 아무 저항도 하지 못했다. 두 강도는 승객들의 재물을 탈취하고 여성운전사의 성을 유린했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이 해외에 빼돌린 재산은 얼마나 될까? 공산당원들의 재산이란 것이 결국은 중국인민의 재산이니 『44번 버스』에 있던 강도와 다를 바 없다. 또한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이 본 부인 이외에 첩에 해당하는 여성들이 많은 것은 중국인민들이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베이징 고가도로에서 외제차인 페라리가 추락했는데 그 차 안에는 마약을 한 중국 공산당 지도자의 아들과 두 여자가 벌거벗은 채로 마약에 취한채로 죽어 있었다. 『44번 버스』에서 두 강도가 여성운전사의 성(性)을 유린한 것과 같은 모양이다.

『44번 버스』의 승객과 중국 인민

그렇다면 승객들은 어떻게 비유할 수 있을까? 『44번 버스』 사건이 2001년에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실제 상황에서 승객들은 중국 인민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들은 개인의 책임의식에서 나오는 자유민주주의의 사상은 없이 덩샤오핑의 개방정책에 따라 갑자기 확 풀린 시장경제에서 돈 맛을 알면서 그야말로 정신이 돈 상태였다. 차라리 1950년대와 60년대의 중국 시골은 사람이 살아가는 인정이 있었지만 2000년대의 중국이란 사회는 정치사상은 공산당이면서 경제는 자본주의의 핵심인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이 모순된 정치와 경제의 조합 속에서 중국인들의 의식과 사상은 모순과 혼돈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체제의 의식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 『44번 버스』에 있던 승객의 모습인 것이다.

『이끼』의 촌장

그렇다고 자본주의 사회가 공산주의 사회보다 더 좋은 사회라고 내세울 것이 별로 없다. 삶의 고단한 무게는 공산주의 사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한국 영화 『이끼』에 나오는 촌장은 누구를 상징하는 것일까? 머리에 그냥 떠오르는 사람은 땅콩회항사건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녀의 어머니도 갑질로 아주 악명 높은 사람들이라고 들었다. 또 따른 재벌그룹 회장은 자식이 룸살롱 종업원에게 맞았다고 자식의 복수를 위하여 그 종업원을 불러다가 조폭처럼 몽둥이로 팼다. 이런 사람들이 『이끼』에 나오는 촌장과 같은 사람들이다. 당시 비행기에서 내렸던 한 승무원은 그 후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며 암에 걸리고 건강을 거의 망쳤다고 한다.

『44번 버스』의 승객과 『이끼』의 촌사람을 위한 변명

내가 볼 때 『44번 버스』의 승객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적합한 비평이 아니다. 사실 중국 공산당 국가의 『44번 버스』 승객들이나 자본주의 한국의 『이끼』에 나오는 촌락의 사람들이나 다 거기서 거기다. 그들에게 흉기를 든 강도 앞에 왜 용감히 나서지 않았는가? 하고 비난한다면 나는 오히려 그 비난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서 강도 만난 유대인을 도와줄 수는 있어도 흉기를 들고 설치는 강도를 제압하는 것이 마땅한 행동이라고 말하는 사회 지도층의 글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그나저나 2022년에 물가가 너무 올라서 강도 만난 유대인을 만난다고 해도 도와주기가 곤란하다. 치료비와 여관비를 계산하면 최소 백만 원 이상이 나올 것 같은데 그것이 서민들에게는 버거운 일이다. 남을 돕는 것도 돈이 없으면 정말 곤란하다. 정치인 김대중은 말하기를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죽은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양심이 죽지는 않았지만 바위에 착 달라붙어 행동하지 않는 ‘이끼’이다. 사람이 숨 좀 쉬게 너무 다그치거나 몰아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독교 해석이 세대에 대한 비유

『44번 버스』와 『이끼』 같은 실제 사건과 작품이 나오는 시대를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조금 다른 각도로 해석이 될 수는 있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누가복음 7장 31절과 32절의 말씀이다.

(눅 7:31, 개역)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눅 7:32, 개역)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예수님은 이 세대의 사람들을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해도 울지 않는 세대라고 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세상의 현상에 대해 공감이 없고 반응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끼』의 대사처럼 세상의 물이 어떻게 흐르건, 물살이 강하건 약하건 상관없이 쥐 죽은 듯이 바위에 붙은 이끼처럼 세상을 살아간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은 춤을 추기도 하고 통곡을 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닐까?

38년 된 병자

예수님의 말씀 한 군데를 더 보자.

(요 5:5, 개역)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요 5:6, 개역)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7, 개역)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요 5: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우리의 상태는 38년 된 병자와 같다고 생각한다. 삶은 나아지는 것이 없고 세상은 더욱 사악해지는 것 같고 사람들은 각박해져 간다. 그야말로 창세기 6장의 대홍수의 멸망으로 치달아가는 인간 세상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셨다. 그런데 병자의 대답이 이상하다. “예, 낫고자 합니다.”가 아니라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어떻게 해석하는가? 따라 긍정으로도 볼 수 있고 또 부정으로도 볼 수 있다. 부정으로 보자면 38년 된 병자는 병을 치유하고 싶어도 치유할 수 없는 현실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긍정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질문에 여하튼 이 38년 된 병자는 반응했다는 것이다. 사실 38년 동안 병을 치유할 수 없는 상태로 있었다면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귀찮아서 어떤 대답조차 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38년 된 병자는 어떤 대답이든 예수님의 질문에 반응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의 대답을 긍정으로 보셨다. 그러므로 그의 병을 고쳐주셨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이 나에게 물으셨다. 예수님이 당신에게 물으셨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나와 당신의 대답은 무엇인가? 세상의 대답은 무엇인가? 우리는 『44번 버스』와 『이끼』에 등장하는 사람처럼 살 것인가?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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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선 선교사 | GMS(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선교회) 소속으로 중국에서 사역 중 추방된 이후 인터넷을 활용한 중국 선교를 계속 감당하고 있으며 세계선교신학원에서 신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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