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번쯤 이러한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주님을 믿는데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는 것일까?’ 그리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 이러한 말도 심심치 않게 들어봤을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전쟁이나 살인, 강간 같은 이런 잔인한 일들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란 존재는 없는게 분명해.’
나와 직접 연관된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간에 우리는 예상치 못한 일들로 인해 당황하기도 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그 원인을 찾아내려 애를 쓰다가도 뚜렷한 답을 못 찾고는 이내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원망을 하기도 한다.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면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놔두셨냐고 말이다.
그렇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경험한다. 이는 불신자뿐만 아니라 주님을 믿는 신실한 백성일지라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뜻 모를 일들의 원인을 찾아내는 데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어떤 일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맞을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은 좀 더 본질적인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섭리와 직접 맞닿아 있다.
주님의 섭리에 대한 정의
“섭리”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미리본다”– Providence (Pro앞서 + Videre본다) – 이다. 하지만, 이는 그저 미리 앞을 내다본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의 개념을 소유한 어떤 주권자가 그의 의도와 뜻 안에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것을 뜻한다. 즉, “주님의 섭리”라는 말은 우연히 생겨난 일을 주께서 미리 아신다는 개념이 아닌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완전한 계획 아래 모든 일을 미리 준비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계획을 실행하시어 궁극적으로는 그 일을 성취하시는 모든 과정을 지칭한다(엡1:11). 곧, 영원 안에 계신 하나님의 주권적 다스림인 것이다.
또한, 주님의 섭리 안에서 발견되는 주님의 계획과 의도는 세상이 말하는 우연의 연속성 또는 그러한 발생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이는 지구와 생물, 인간의 탄생과 마지막 순간, 그리고 한 나라의 흥망성쇠와 같은 일들이 주님의 섭리를 통해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죄인이 구원받아 영화의 순간까지 긴 여정을 무사히 완주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주권적 보호하심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벧전1:5). 즉,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주님의 섭리와 자유 의지
신학적 개념들 중,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 하는 것을 하나 꼽자면 그건 아마도 주님의 섭리와 자유 의지의 관계성일 것이다. 물론, 유한한 우리 인간이 무한하신 주님의 뜻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주께서 계시하신 성경을 통해 우리는 이 오묘한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이는 곧 주께서 허락(주님이 명령하신 것은 아니시지만)하신 “악”과 “인간의 죄”, 그리고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 가니라” (욥1:12). 욥기를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탄과 대면하시는 장면인데,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탄이 욥을 시험하는데 주님의 허락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허락을 자칫 오해하면 주께서 죄를 방조하시는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이는 오히려 사탄 또한 주님의 권세 아래 있는 열등한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곧, 주님의 허락은 죄와 무관하며, 인격적이시며 전능하신 주권자의 일시적 내버려둠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행위에 대한 모든 책임은 사탄 그 자신에게 있음이 분명하다(욥1:9-11). 달리 표현하자면, 악을 선택한 당사자인 사탄에게 그 책임이 전적으로 있는 것이다. 곧, “자유 의지”가 “주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은 맞지만, 자유 의지에서 나온 행동의 책임은 그 행위의 주체자에게 있다. 이는 아담이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먹었지만, 그 행동을 선택한 아담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결국, 자유 의지의 책임은 본인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주님의 섭리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한다. 욥기를 다시 보면, 욥의 믿음을 뒤흔들어 탈락시키려 했던 사탄의 계략은 결국 주님의 선하신 계획 앞에 무릎을 꿇는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시련의 고통 가운데서 믿음을 저버릴 것만 같았던 욥은 되려 더 큰 믿음을 소유한 주님의 사람이 되었다. 주님의 선하신 뜻이 욥의 인생을 신묘막측하게 이끈 것이다. 그분의 섭리 가운데서 말이다.
믿는 자에게만 보이는 주님의 섭리
불신자는 주님의 온전하신 계획을 결코 깨달을 수 없다. 이는 오직 믿음의 눈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왜 그런 것일까? 이는 “주님의 섭리”라는 이 영적 세계는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볼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위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주님은 완벽하신 분이시며 그분의 계획 또한 모두 선하시다는 것을 전적으로 믿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라고 말한다.
그렇다. 세상을 살다 보면 정말 마음이 힘들 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한순간 떠날 수가 있고,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생활이 어려울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예상치 못한 시련과 배신으로 세상살이가 어려워 밖을 나가기가 버거울 수 있다. 믿음 안에 있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약속하셨다. 주께서 이를 통해 결국 “선”을 이루실 것을 말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정하셨으니” (롬8:29). 영원 속에서 계획하신 주님의 뜻은 한치도 흐트러짐 없이 우리를 향해 달려왔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바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해 말이다. 곧, 우리는 주님의 섭리라는 신비한 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점점 닮아가는 존재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인 것이다.
결론
세상의 주권자이시며 우리의 아버지되신 하나님은 결코 실수가 없으시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신뢰하길 소망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매일의 삶 가운데 닮아가길 소망한다. 주님의 섭리 안에서 말이다. [복음기도신문]
번역 강민구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원문: : Ligoneir.org “Providence and Freedom.”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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