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1~2)
성경적 관점으로 분별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그 분별을 깊이 소원하게 됩니다.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린다는 뜻도 선명해져야 합니다. 그때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때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몸은 산 제물로 드리고, 마음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시다는 것을 분별했을 때 우리는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받을 만한 산 제물이 되지 못합니다.
분별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선과 악을 아는 지혜가 분별이 아닙니다. 아름다우신 주님을 잘 섬기고, 주님께 영광 올려드리기 위해서 우리가 선과 악을 알아야 할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선과 악이 필요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선과 악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갖고 싶고, 되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을 위해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우리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니 내 힘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분별이 필요했습니다. 선과 악을 분별하는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던 까닭은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과 악이 분별될 때 화가 납니다. 나는 맞고 상대는 틀렸다는 것, 그것은 지독한 자아가 일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분별은 선악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분별은 이것입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는가!’ 내 안에 예수님이 가득한지 보는 것이 분별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가득하면 주님께서 나를 이끌어가십니다. 주님이 나를 가꾸어가신다는 믿음의 선순환이 일어나게 됩니다. 어떤 문제로 염려와 계획과 책임감이 가득한가, 아니면 주님이 가득한가! 그것을 보는 것이 분별입니다. 설교에 대한 마음이 가득한가, 아니면 예수님이 가득한가! 설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마음이 가득한가, 아니면 예수님이 가득한가! 설교의 결과가 어떨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가득한가, 아니면 실제 예수님이 가득한가! 분별은 이것입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가득한가! 그것이 분별의 시작이고 완성입니다.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실제로 경험하게 되는 은혜입니다.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에 가득하면, ‘우리 하나님의 뜻은 선하셔!’ 하는 마음이 가득해집니다. 마음이 그렇게 가득해지면 더욱 하나님의 선을 추구하게 됩니다.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기뻐!’ 그것이 실감이 나기 시작하면 탄성이 나오는데 그것이 곧 찬양입니다.
선(善)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예수님이 가득하면 먼저 하나님의 시선이 의식됩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이 의식됩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의 시선에 내 시선을 고정하는 일에 힘을 씁니다. 먼저 주님의 낯꽃을 살피게 됩니다. 주님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으로 사는 것입니다.
선은 상대적입니다. 일제로부터 우리나라가 해방되었으니 우리가 볼 때는 선이지만, 패망한 일본의 입장에서는 악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과 육체는 때로 고통스럽고 낙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영은 기뻐할 수 있습니다. 분별이 되면, 우리 마음에 예수님이 가득하면 영은 기쁩니다. 영이 기뻐야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 땅의 삶은 수고로움이 있습니다. 에덴을 벗어나면 땀 흘리며 노력해야 합니다. 삶은 고통스럽고 고달픕니다. 그러나 육과 혼이 괴롭고 고달파도 영이 기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영이 기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의 정체성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쁨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기뻐하지 않는 곳에서는 하나님도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육신의 아픔과 슬픔을 해결하기 위해 탄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기뻐할 수 있도록 주님 앞에 머물러야 합니다.
‘온전’이라는 말을 원어로 보면 ‘결국’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온전하신 뜻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결국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이 마침내 이루어지면 다른 주변의 것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게 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시고 이 세대를 분별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분별되지 않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뜻이 채워져야 분별됩니다. 분별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선하셔! 하나님의 뜻은 기뻐!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져!” 마음이 새롭게 되려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고 적극적으로 추구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어떻게든 스펙을 쌓고 기득권이 있고 힘이 있는 그룹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먼저 인정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나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따라가지 않으면 두렵고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그 고백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때 새롭게 변화되어야 할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말씀해주신 것이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창조하신 이유를 말씀해주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저에게 마음을 주신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내 마음에 거하시려고 마음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마음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려고! 그래서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크기입니다. 다른 어떤 것을 담아도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주님은 우리 마음에서 떠나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힘으로 살려고 합니다. 끊임없이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채워도 마음은 만족이 안 됩니다.
주님이 마음에서 떠나가니 우리는 마음에 다른 것을 채워야 합니다. 마음에 무엇인가를 채우는 도구는 몸입니다.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을 통해 마음을 채우려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 몸의 다양한 경험과 지적인 습득을 통해 마음을 채울 만한 근거들을 만납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안 계시기에 마음을 채워야만 산다는 욕구가 있습니다. 욕구를 채우는 통로는 몸입니다. 그래서 몸이 아프거나 무시당하면 견디지를 못합니다. 내 몸에 상처를 주면 기어이 갚아주려고 합니다. 잊으면 안 됩니다. 마음은 분별되어야 삽니다. 마음은 주님으로 채워져야만 만족함이 있고, 마음은 새롭게 변화될 때만 분별이 됩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히 2:15)
우리는 죄에 매여 있습니다. 왜 죽음을 두려워할까요? 죽으면 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여길까요? 몸이 죽으면 안 되는 이유는 우리 몸을 통해 우리가 만족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마 10:28)
제물은 죽어야 하는데 산 제물이라고 했습니다. 산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몸을 쓰신다는 뜻입니다. 마음에 예수님으로 채워져 있는 것을 모르면 하나님께서 구별해서 쓰신다는 개념도 관념이 됩니다. 마음은 오직 예수님으로만 채울 수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쓰임받는다는 의미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계획을 세웁니다.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준비도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니까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 계획을 이루어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을 쓰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잘못된 패턴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을 그렇게 쓰려고 할까요? 우리의 꿈을 하나님께 이루어달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주십니까?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잘못됐는지 가늠도 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내 꿈이 있고, 내가 계획하고, 내가 준비하고, 주님을 부릅니다! 종교적 행위로 주님을 부릅니다! 이것은 내가 주님을 쓰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의 의미에 소름 끼쳐야 정상입니다. 주님으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지 않으면, 내가 주님을 쓰는 이 믿음의 패턴을 열심인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속고 살고 있습니다.
교회 건축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교회 건축하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실 것이라며, 성도들이 헌신할 수 있도록 열심히 동기 부여합니다. 목표도 세우고 ‘주님 이루시옵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목사가 하나님을 쓰는 것입니다. 마음이 새롭게 됨으로 분별됩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채워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은 선하고 기뻐하시고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씀은 실감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독하게 ‘내’가 노력하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실제 삶을 잠시만 돌아보십시오. 선악이 뚜렷하게 보일수록 마음은 화가 나지 않습니까? 나는 선하고, 너는 악하다! 이것이 뚜렷하게 구별될수록 마음이 어려워지지 않습니까? 그것을 억지로 참고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니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믿음이 없는 상태인데도 선한 것을 추구하려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병이 나고 힘이 빠지는 것이 당연했을 것입니다.
종교적 행위에서 돌아서고 돌이켜야 합니다. 예전 어머니들은 자녀들을 위해 ‘우리 자녀가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게 하시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자식을 크게 사용해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목회자의 어머니라면 ‘우리 아들이 성도 만 명이 넘는 목회를 하게 하시옵소서’ 하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크게 사용해달라는 말에 담겨 있는 속마음을 들켜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쓰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그것을 고치시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광야 같은 세상에 있는 것입니다. 분별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쓰십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채워졌을 때 하나님의 뜻이 밝히 보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사용하십니다.
극단 광야에서 하는 뮤지컬 〈요한계시록〉을 보고 울었습니다. 일곱 번 넘게 본 것 같은데도 처음 보는 것 같은 장면 때문이었습니다. 일곱 교회 중 처음으로 나오는 교회가 에베소 교회입니다. 첫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입니다. 열심은 있지만 마음은 곤고하기에 탓과 원망과 정죄가 많습니다. 뮤지컬에서 파라클레토스(성령)가 에베소 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랑하고 있나요? 그 믿음의 행위가 예수님을 사랑해서 하는 건가요? 처음엔 예수님을 사랑해서 그랬잖아요?” 제 마음에서 벼락이 치고 천둥이 치는 것 같았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이 내 마음에 가득한 것입니다. “사랑하고 있나요? 지금도 그 사랑이 일하고 있나요?” 하는 질문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주님! 제 마음에 옳고 그름은 분명한데 주님의 마음을 분별하지 못했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다른 무엇보다 분별이 열리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가득한 분별입니다. 분별이 가득할 때만 “그래!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거지. 필요한 것, 급한 것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 뜻을 따라가는 거지! 그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견딜 수 없는 존재잖아” 하는 진정성 있는 고백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에서 폴리갑 장로님이 순교할 때의 장면에서는 서머나 지방 병사들이 와서 폴리갑 장로님을 체포합니다. 그런데 폴리갑 장로님이 그 병사들 손을 꼭 잡으며 이야기합니다. 아이고, 이 손이 우리 서머나를 위해 그렇게 애쓰셨네, 밥 한 끼 드시고 가시라고.
북한의 손을 잡고 ‘이 손이 북한을 위해 그토록 애쓴 손이구나!’, 일본의 손을 잡고 ‘이 손이 일본을 위해 그토록 애쓴 손이구나’ 하고 쓰다듬는 것이 가능합니까? 분별하지 못하고 산 것이 회개가 되니까, 폴리갑 장로님의 그 마음과 그 손길이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첫사랑을 회복하고 분별이 되면,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니까 자기를 잡으러 온 병사들의 거친 손을 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 맞으며 죽어가면서도 웃는 까닭과 같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내일이면 참수형을 당하는데 코를 골며 감옥에서 잘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주님이 채워지면 하나님의 뜻이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하시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구속한 주만 보인다는 것이 실제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있는 어떤 공간에 아름다운 찬양이 나오면 노력하지 않아도 그 음악의 분위기에 젖게 됩니다. 사랑스러운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어떤 영적인 분위기를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기준점 이하로 내려오게 되면 노력해도 안 됩니다. 영적인 기준점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런 분위기 가운데 있기를 원한다고 소원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와 나태함 때문에 기준점 아래로 떨어집니다. 그 기준점 위로 올라가려면 말씀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노력하지 않고 올라가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기준점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힘을 받는 것이 은혜입니다. 말씀과 기도입니다. 죄와 나태함을 경계하고, 말씀과 기도는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 듣고 댓글 달아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가 따라가지 않으면 절대 되지 않습니다.
“주님, 주님으로 채워지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보고 새기고 따라갑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 바라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이 실천적 영역이 익어져야 실천적인 믿음의 사람이 되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필로그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말씀이 진리라는 결론을 맺어야 합니다. ‘말씀하셨으면 그렇게 됩니다’ 하고 답하셔야 합니다. 죄는 죄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죄를 죄라고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동성애자를 성소수자라고 부르는 것을 기독교인들은 거부해야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근거와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하루를 살기를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죄인은 다음과 다음과 그다음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합니다. 내가 부족하기에 다음을 알 수 없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성경은 내일은 내일이 염려하라고 합니다. 하루를 살라는 의미를 새기셔야 합니다. 오늘 하루, 주님이 가득한지를 살펴보는 하루를 통해 주님의 하심을 보게 됩니다. 오늘 하루, 주님이 가득했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누구나 오늘 하루는 살 수 있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걱정하게 하고, 오늘 하루 먼저 주님이 가득한가를 확인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실제가 되면, “어떻게 그렇게 살아?” 하는 말이 쏙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 말이 오히려 창피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하루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마 6:30)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 6:34)
분별하는 인생에게 하나님의 뜻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거룩하게 쓰십니다. 하나님의 쓰임을 받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소원하는 거룩한 백성들에게 주님으로 분별되는 은혜, 날마다 누리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복음기도신문]
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저서로 주께서 피워내시는대로(토브원형출판사, 2020), 예, 주님 제가 순종의 전문가입니다(토브원형출판사, 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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