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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 칼럼] 나사렛 예수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계명

사진: pixabay

<역사적 예수 연구 시리즈>

구약성경의 두 기둥인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요약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모세의 율법이 각종 규례를 제시하면서 의도하는 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율법 그 자체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신성하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이 명하는 것을 지킬 수밖에 없다. 선지자들의 예언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정착한 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제의(祭儀)가 점차 형식적이 되면서 그들 가운데 율법이 해이(解弛)해지고 율법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 제의종교와 율법 종교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해석자로서 선지자(예언자)들이 출현하였다. 나사렛 예수는 모세가 전해준 율법과 선지자들이 전해준 율법의 해석인 예언의 내용을 사랑의 법으로 요약하였다.

I. 구약 율법의 요약 :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예수는 구약 율법을 두가지 계명으로 요약하면서 구약 율법의 윤리적 성격을 강조하신다. 신명기와 레위기는 사랑의 계명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신명기는 하나님 사랑을, 레위기는 이웃 사랑을 가르치고 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19:18).

예수는 레위기의 계명을 “황금율”(the Golden Rule)로 요약하였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이 황금률은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 쌍둥이 계명에 대한 해석이다. 예수는 말씀하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황금율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도 그러하기 때문에 황금율은 사랑 계명의 보다 실천적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께서 사랑의 계명을 율법과 선지자의 요약이라고 말씀하시는 바 같이 예수의 가르침은 구약성경의 두 가지 축인 율법과 예언의 전통에서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의 가르침을 놓치게 된다. 역사적으로 구약성경을 처음으로 거부한 자는 2세기의 마르시온(Marcion)이었고, 근세에 와서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 하르낙(Adolf von Harnack)이었다. 그는 마르시온의 유언을 집행하여 기독교를 구약의 멍애로부터 해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예수 복음을 이해함에 있어서 양극단을 비켜나가면도 역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예수의 복음 말씀을 근본주의자들처럼 영적으로만 해석하고 일체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맥락과 단절시키는 것이나, 반대로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의 정치사회적 맥락에서만 해석하는 것도 구약성경의 풍부한 배경을 놓치는 것이 된다. 예수의 복음은 율법과 예언서의 맥락에서만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구약성경의 약속은 신약성경의 성취 안에서 실현되고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로 구현되기 때문이다.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으로서 예수의 사랑 계명은 구약의 율법을 요약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는 윤리적으로 새로운 명제를 선포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는 이미 구약에서 제시된 윤리적 요구들을 새 형식으로 재정립하고 있다. 예수는 이 두 계명이 모세 율법의 핵심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면서 율법의 정신을 사랑이라는 계명으로 요약하고 있다. 복음서 저자 누가는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질문하는 율법사에게 예수께서 대답한 것을 기록(눅 10:25-28)하고 있다. 예수는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고 묻는다.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대답한다. 예수는 그에게 말씀하신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 10:29). 그 율법사는 다시 질문한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는 사마리아인 비유(눅 10:30-37)를 말씀하시면서 “이웃이란 자비를 베푼 자”(눅 10;37), 즉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라고 가르치신다.

II. 두 가지 가장 큰 계명의 정신: 제사보다 인애를 원하신다

나사렛 예수가 예루살렘을 마지막으로 방문하실 때 어느 율법사가 예수께 나아와 묻는다. 율법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이에 예수는 대답하신다: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29-31). 서기관은 예수의 대답에 대하여 열광적으로 동의하면서 말한다: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막 12:32-33). 예수는 그가 지혜롭게 대답함을 보시고 그를 칭찬하신다: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막 12:34). 제사법보다 더 귀중한 계명은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계명이다. 모든 종교적 제사에는 주 하나님에 대해 섬기는 정신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의 계명을 핵심으로 실천함에 있어서 예수께서 가르치신 제사는 이방종교의 제사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구약에서도 사랑과 인자를 제사보다 하나님께서 더 귀중하게 보신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번제보다 순종을 원하신다. 예언자 호세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말씀하신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예언자 미가는 하나님은 거대한 짐승의 희생 번제물이나 맏아들 제사보다 인자와 하나님 뜻의 준행을 원하신다고 선포한다: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7-8).

잠언 저자는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은 기쁘게 여기신다고 가르친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 21:3). 다윗은 참회 시편에서 하나님은 제사보다 겸손하고 회개하는 심령을 원하신다고 고백한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0:16-17). 예수께서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실천이 모든 제사보다 낫다고 대답하는 율법사의 대답(막 12:33)이 옳다고 칭찬하신다.

III. 고귀한 법인 사랑의 법

사랑의 법은 고귀한 법이다. 이 지고(至高)의 법을 범하는 것은 죄다. 빛나는 선행, 깊은 경건, 긴 기도, 금식 등 모든 종교적 행위에 만일 사랑의 정신이 결핍되어 있다면 이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그러므로 사랑의 법이란 절대적 율법이다. 모든 선행이나 자기 희생 위에 있는 행위의 원리란 사랑이다.

진정한 종교를 드러내는 궁극적 시금석은 바로 사랑이다. 예수는 비판의 부메랑(Boomerang)에 대하여 말한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사랑도 마찬가지로 사랑을 실천한 사람에게 되돌아 온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13세기 프랜시스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음으로 그는 걸인 등 모든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었다. 그는 만물을 다 사랑하였다. 20세기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여 자기 아들 둘을 죽인 청년을 용서해서 사형장에 끌려가는 그를 살려주기를 탄원하고 자기 양아들로 삼았다. 그는 나환자의 고름을 빨기까지 저들을 사랑하고 진정으로 돌보아 주었다. 그리고 공산군이 여수 지역에 들어 왔을 때 교인들을 피신시키고 자신은 남아서 교회를 지키다가 공산당에 의하여 처형됨으로 순교하였다.

IV.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

예수는 사랑의 새 계명을 주신다. 그것은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예수의 사랑의 계명을 다음 같이 전해준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1-12). 그리고 예수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 만큼 더 큰 사랑이 없다고 가르치신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친구와 이웃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것은 위대한 사랑이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산상설교에서 예수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모세의 법을 수정하신다. 모세의 법에 의하면 원수에 대하여는 평안함과 형통함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네 평생에 그들의 평안함과 형통함을 영원히 구하지 말지니라”(신 23:5-6). 구약의 선지자 스가랴는 하나님의 호위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원수, 헬라 족속에 대한 피 뿌린 잔인한 보복에 관하여 다음 같이 예언하고 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맷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취한 것 같이 할 것인즉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 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슥 9:15).

그러나 예수는 선인과 악인을 포함한 모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가르치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4-45).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기 때문에 선인과 악인에게 해와 달과 비를 주시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모든 인간에 대하여 인자(仁慈)를 실천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편파적이어서는 안 된다. 편파적 사랑이란 자기 편, 자기 가족, 자기 민족만을 사랑하는 차별적 사랑이다. 예수는 편파적 사랑이란 이방인들의 사랑이라고 말하신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 5:46-4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야 한다: 예수는 다음같이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V. 십자가에서 대속적 죽으심의 사랑

예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대속적 죽으심의 구체적인 사건으로 나타났다. 예수가 달리시고 죽으신 십자가야말로 그 분의 사랑을 증거하는 가장 유일한 역사적 사건이 된다. 예수께서는 최후에 십자가 상에서 자기를 못박은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신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예수는 사랑을 설교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을 그의 삶의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예수의 본성(本性)이 바로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이 박애와 사랑이 기독교를 다른 종교에 대하여 수월(秀越)하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 사도 요한은 예수의 사랑을 다음같이 요약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나사렛 예수께서 보여주신 것은 단지 사랑의 이야기나 수사(修辭)가 아니라 사랑의 실재, 현존, 실체이다. 그것은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본체의 영광을 버리시고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요한은 요한복음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사도 바울은 빌립보 신자들에 보낸 서신에서 당시 초대교회 신자들 가운데 널리 애송(愛誦)되었던 그리스도 찬가(Christus Hymnus)를 다음 같이 인용하고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이 그리스도 찬가는 나사렛 예수가 실재로 살았고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에 관하여 오늘날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널리 불려지는 복음송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이 체험한 은혜를 시(詩)로 지은 것이다. 그처럼 초대교회 그리스도 찬가는 당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널리 보급된 나사렛 예수의 겸허와 십자가의 대속으로 나타난 그의 사랑에 대한 신자들의 신앙 체험의 표현이었다. <계속>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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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 | 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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