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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이아침 칼럼] 아침에 일어날 때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 사진: Unsplash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1:34~36)

깨어 있어야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선명하게 분별합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나의 열심과 나의 의가 드러납니다. 나의 의를 통해 성취감을 느끼고 나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기뻐하게 됩니다. 그래서 위험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이 계신다는 것은 곧 말일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둔해져서 예수님이 오시는 날이 영광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덫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눅 21:34)

첫째, ‘스스로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주의를 기울인다, 신경을 쓴다, 마음을 둔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어디에 우리의 마음을 두고 싶은지 알아야 합니다.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진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모르면 마음이 둔해집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마음의 향방을 알아차리는 안목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이야기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아침에 일어날 때 무슨 생각을 먼저 하십니까? 아침에 일어날 때 어떤 생각을 먼저 하십니까? 급한 일, 해야 할 일을 먼저 생각하십니까? 마음에서 욕구하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진심으로 당부드립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주님이 생각나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냥 되지는 않습니다. 의도적이고 의식적으로 스스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생각에 머무르고 있는지를 가려내야 합니다.

더 어렵고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며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생각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며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 또한 그냥 되지는 않습니다. “주님! 내 마음에 다른 것이 깃드는 것 견딜 수 없어요!” 하는 몸부림이 없다면 쉽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저는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싶은데 주님이 마음에 잘 담겨지지 않아요, 제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 주님과 절절하게 대면하는 시간이 없다면 주님을 생각하는 것,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되지 않습니다. 주님 앞에서 주님과 부대끼는 시간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진다는 말씀은 우리 마음이 어딘가에 쓰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을 빼앗아가는 그것, 마음을 쓰이게 하는 그것, 마음을 두게 하는 그것을 보는 것은 지혜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을 생각하는 사람은, 삶의 현장이나 쉼의 현장에서도 주님을 생각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배당에서도 다른 생각을 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도 세상의 것을 생각합니다.

진짜 크리스천은 반대입니다. 삶의 현장에서도 딴 생각을 합니다. 주님이 생각나지 않으면 ‘주님 바라봐야지. 이 녀석아’ 하면서 속 사람을 책망하기도 하고 다시 격려하기도 하면서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런 마음이 있는 사람이 해질녘에도 감사하고, 잠자기 전에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며 돌이키고 감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주님, 어디에 계십니까? 주님이 제 마음에 계셔야 하는데 온갖 것들이 제 마음에 자리잡고 있어요! 어떤 대의명분도 제 마음에 들어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기뻐합니다!” 하면서 자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세상의 다른 꿈을 꾸면 놀라 일어나 다시 주님께 기도하며 자는 그런 경험을 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보면 스스로 점검하게 되고 알아가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아, 주님께서 이끌어가신다는 것이 이것이었구나! 주님께서 나를 점령하신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주님과 24시간 동행한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구나! 존재를 바꾸어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꾸신다는 것이 이런 것이었구나! 주님과 함께하는 것은 정말 실제하는 것이었구나!” 그래서 주님을 더욱 소원하게 됩니다. 이렇게 깨어 있으려면 조심해야 합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마음이 둔해져 덫에 걸려 넘어집니다.

주님 앞에서 살려고 노력하면 반듯해지는 것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 선명하지 않고, 주님의 약속이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선명하지 않은 것 같으니 스스로 다그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매사에 노력해야 하니까 불편해졌습니다. 노력하고 힘써야 하니까 많이 지치기도 했습니다. 내가 한 만큼 주변에서 따라와 주지 않을 때는 더욱 불편했습니다. 이제는 너무나 선명합니다. 불편한 것이 나온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불편함에서 출발한 평가는 반드시 공동체도 해치고 자신도 해칩니다. 불편함에서 시작된 설교라면 설교자도 해칩니다. 옳고 그름으로 인한 불편함은 우리의 가정을 해칩니다.

20년 전쯤의 일입니다. 고등학교에서 반장을 하던 여학생이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뺨을 맞고 분해서 참을 수 없다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는데 자신이 맞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때 조금 황당하게 들릴 수 있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00야, 억울하니? 너는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 것 같니? 선생님이구나. 그런데 잘못은 선생님이 했는데 왜 마음은 네가 더 상할까? 이상하구나” 여러분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도 중보하는 사역자들에게 종종 이야기합니다. 중보자들이 누구를 위해 기도하고 권면할 때, 그 이야기가 먹히지 않으면 불편해진다고 합니다. 희한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는데 먹히지 않는데도 자신이 불편해진다니 조금 이상한 것 아닐까요? 거기에는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큰 것이 보입니다. 불편할 때는 입을 닫고 주님 앞에 머무르는 것, 그것은 지혜입니다. 제가 그것을 몰라서 오랫동안 속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속이 불편할 때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지금 저를 바꾸시려고 하시는 거죠? 저에게 지금 말씀하실 것이 있는 거죠?” 이제 압니다. 하나님의 뜻이 제 안에 깃들 때만 마음이 둔해지지 않습니다. 제가 본 하나님의 마음은 제 마음을 점령하고, 그때 더불어 함께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마음을 흘려보내게 됩니다.

마음이 둔해진다는 말씀이 선악의 분별이 둔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참된 분별이 아닙니다. 마음이 둔해지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열심을 통해 무언가를 하려고 합니다. 열심을 통해 무언가 성취하면 나의 의가 됩니다. 나의 의가 되면 그만큼 영향력이 커지게 됩니다. 그만큼 갑질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둔해지면 열심을 내고 성실하게 계획하고 준비해서 힘을 쓰게 되는데 그 방향이 사회적으로 지향하는 가치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자아를 실현하려고 합니다. 마음이 둔해지면 세상의 가치를 향해 달려갑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계해야 합니다. 분별은 하나님의 뜻을 보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눅 21:36)

둘째,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라고 하셨습니다. 말세와 말일은 조금 다릅니다. 말세는 예수님이 초림할 때부터입니다. 2000년 전부터 말세입니다. 전쟁, 기근, 지진, 재난은 말세의 징조입니다. 아프리카에선 아기들 팔뚝만 한 메뚜기떼가 심상치 않습니다. 메뚜기 수억 마리가 지나가면 땅은 초토화됩니다. 자연재해나 천재지변을 만나면 마음에는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두려움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입니다. 그런데 장차 올 모든 일을 피하라고 하신 말씀은 이런 것을 피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냥 어려움을 피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과 관계 속에서 생명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습니다. 문제를 부인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피한다는 것은 인자 앞에 서라는 말씀입니다. 어려움이 있어도 지옥에 가지 않는 사람이 되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 천국의 시민이라는 확증이 있다면 어려운 문제가 생겨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실제 내 안에 주님이 계시는가에 따라 분별이 열리느냐도 결정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주인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점령하는가! 그것이 관건입니다. 그것만 된다면 어떤 문제가 닥쳐도 문제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문제를 부인하는데 온 힘을 쓰는데, 성경은 나를 부인하는데 온 힘을 쓰라고 합니다. 깨어 있지 못하면 문제를 피하는데 모든 힘을 다 쓰며 살 것입니다.

셋째,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기도를 잘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눅 22:39~42)

주님께서 감람산에서 기도하시며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의학적으로도 애가 타고 애가 타면 모세혈관이 터져서 피가 맺히기도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했습니다. 내 소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소원대로 하게 해달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내 소원이 아버지 소원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하시려고 아버지로부터 사명을 받고 파송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고통을 피하려고 이렇게 기도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맞을까요? 합당하지 않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웃으면서 죽어갔습니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도 내일이면 참수형 당할 상황에서도 저녁에 찬송하고 코를 골며 잠을 잤습니다. 베드로도 바울도 스데반 집사도 그것이 가능했는데 예수님께는 불가능했겠습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렇게 기도하시며 몸부림치셨을까요?

실제 기도하는 시간도, 우리의 열의와 에너지도, 나의 모든 소원도 아버지 소원에 부합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할애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깨어 있다는 말씀은 나의 소원이 주님의 소원과 부합되어 있느냐 하는 뜻입니다. 선한 동기와 열심을 갖고 일하는 것을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 없지만 결코 하나님 앞에서 깨어 있는 인생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원과 내 소원이 부합되어야 깨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은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맞습니까? 맞다면 그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는 내 소원을 죽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원 참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우리 소원을 죽이는 것, 급하고 중요한 계획을 죽이는 것이 기도입니다. 무엇이 없으면 불안하고 죽을 것 같습니까? 그래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내 소원대로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소원대로! 이것이 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것을 임의대로 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는 따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은혜라는 것이 실감났습니다. 마음에 있던 무엇이 해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이 이해됐습니다. 주님에 대한 갈망이 일어나니, 옳고 그름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주님이 계시느냐 안 계시느냐였습니다. 선악과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된 어떤 인격적 장치였습니다. 나의 소원이 아니라 주님의 소원대로 살겠다는 마음을 끊임없이 확인하게 만드는 인격적 장치인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나의 소원을 취한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 토해내는 것이 회개입니다. 나의 소원을 취하려고 종교적 열심을 부리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입니다. 나의 원대로 하기 위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선악과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할 때 그 선함을 도덕적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선악을 분별하는 것을 분별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선악을 분명하게 알면 알수록 마음은 둔해진 상태입니다. 선악을 분별해야 잘 살 것 같고 주님을 제대로 바라볼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가장 위험한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일제 36년을 식민지로 살다 해방됐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선이지만 일본의 입장에서는 악입니다. 선과 악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입니다. 내 자녀가 명문대에 수석 합격하면 선입니다. 그러나 떨어진 사람에게는 선이 아닙니다. 자녀가 좋은 곳에 취직해도 기쁩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전쟁과 기아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도 취직한 자녀로 마음이 기쁜 것은 선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선함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으로 온통 채워진 것입니다. 선함은 하나님이 나를 점령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말씀은 곧 하나님이 나를 점령했다는 뜻입니다. 치유사역 하고 예언사역을 하더라도 분별은 됩니다. 예수님 이야기를 아무리 잘 설교해도 아닌 것은 분별은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다녀왔다고 말하면서 이 세상의 풍요를 이야기하고, 이 세상에 미련을 갖게 하고, 이 세상의 무엇을 통해 위로받기 원한다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일까요?

하나님께서 선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천국을 정말 맛보았다면 이 땅에 와서 미련 갖게 할 수 없습니다. 천국을 보고 와서도 이 땅에서 풍요와 위로를 구할 수는 없습니다. 하늘나라를 봤다면 이 땅에 미련을 두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정상입니다. “그러지 마! 이 땅에서 위로받으려고 하지 마! 이 땅에 미련을 둘 필요 하나도 없어!” 도시락 싸들고 찾아다니며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까?

자아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한 죽음이 실제되지 못하면 절대 경험할 수 없습니다. 절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가짜 믿음으로 평생 속고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나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주님 때문에 주님이 함께하신다고 착각하며 살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주님 앞에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이 말씀은 우리가 생각할 때 옳고 그른 개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가 대학에 합격할 때 기쁜 것처럼, 주님께서 내 안에 계셔서 기쁜 마음도 실제입니다. 선하다는 것은 그래서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주님이 가득 채워진 것입니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시 100:2)

섬긴다는 말은 노예로부터 온 말입니다. 기쁘게 여호와를 섬긴다는 말씀은 내가 기쁘게 여호와의 노예가 된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기쁘게 섬긴다는 것은 내가 기쁘게 주님의 종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신앙에 격차가 큰 것 같습니다. 그 말씀의 뜻을 알기 전까지 믿음은 고역일 것입니다. 정말 어려운 길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게 섬긴다는 말씀을 이해하고 경험하지 못했다면 정말 어려운 길을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원을 이루어달라고 하시는데 많이 이루어지시는지요? 혹시 다른 곳에서 물을 떠놓고 해도 이루어질 확률은 아닙니까? 실제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쁘게 노래하며! 자발적으로!’ 노예라는 의식이 없다면 그분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따라갈 수 있도록 깨어 기도하고 분별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과 생각이 먼저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때 십자가 사건만큼 큰 복으로 다가오는 것이 없게 됩니다. 주님께 모든 정성을 쓰겠다는 마음이 샘솟게 됩니다. 문제는 마음에 주님이 채워져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전엔 성도들이 무언가 잘못할 때 제가 힘들어했는데 이것도 변했습니다. 제 안에 주님이 계시는가! 제가 주님의 것인가! 그것을 먼저 묻고 주님의 마음을 듣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다고 생각되신다면 감사하시고, 깨어 있지 않았다고 생각되신다면 온 마음으로 주님과 대면하는 시간 갖기를 충심으로 권면합니다.

에필로그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도덕적 개념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채워졌느냐 하는 개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계시면 기쁩니다. 그래서 기쁘지 않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내 안에 오시면, 우리가 갖고 있는 기쁨이 무색해질 정도로 큰 기쁨이 생깁니다. 그분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우리의 기쁨을 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추구하는 기쁨이 의미가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천국을 본 사람이 이 땅에 미련 갖는 것이 우스운 것과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아버지를 찾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가 추구했던 기쁨은 별 의미가 없게 됩니다. 욕망도 의미가 없게 됩니다. 먹었던 선악과를 토해내는, 돌이키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헛된 것에 속지 말고, 불뚝거리는 마음으로 열심히 선한 것을 추구하지도 말고, 주님의 마음을 구하고 주님께서 만져주시는 손길 구하며 주님 앞에 있는 시간 갖기를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한 번도 타락한 적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순결합니다. 그 몸에 참여하고자 하는 우리가 타락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왕 되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참예되는 영광이 있기를 소원하는 진정성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땅에서 거뜬히 살아내야 한단다. 그러려면 깨어 있어야 한단다.”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마음으로 받고 새기는 거룩한 백성 가운데, 말씀이 실제되는 은혜가 가득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복음기도신문]

lee ac

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저서로 주께서 피워내시는대로(토브원형출판사, 2020), 예, 주님 제가 순종의 전문가입니다(토브원형출판사, 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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