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이아침 칼럼] 믿음은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 사진: Torsten Dederichs on Unsplash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누가복음 8:22~25)

예전에 이 누가복음 말씀으로 ‘예수님을 모신 배는 결코 파선하지 않는다’는 주제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지만 저는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말씀의 어느 지점에서 은혜를 받는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보통 ‘파선하지 않는다’는 부분에 방점을 두고 기뻐합니다. ‘내 인생은 좌절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아!’ 이렇게 생각하며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방점을 둬야 할 부분은 그 앞에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모신 배’에 방점을 둬야 합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 교회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 같아서 교회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부했습니다. 믿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전문가’라고 말할 때, 그 믿음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곤란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믿음의 개념이 깨어질 것입니다. 믿음은 결코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믿음은 결코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믿음은 특별합니다. 믿음은 아주 예외적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믿음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모신 믿음이 있는가! 믿음은 내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는 영광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마음에 예수님을 모셨는지 확인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모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스스로 묻고 확인하고 점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과 일주일만 함께 살아도 견디기 힘들 것입니다. 여러분의 카톡, 여러분의 휴대폰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대로 드러낼 수 있을까요? 내가 예수님을 모신 배가 되어도 괜찮은 것인지 묻고, 예수님을 모셔야겠다는 인생이 될 때, 예수님을 모신 배가 파선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눅 8:22)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했는데 거대한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풍랑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과 예수님의 반응이 다릅니다. 예수님과 함께해도 감당할 수 없는 폭풍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어찌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통해 믿음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도 그 어려움을 맞이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거기에 임마누엘이 있고,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정금처럼 순결하게 하고, 흔들리지 않는 삶으로 피워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폭풍우가 일어난 곳은 갈릴리 호수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남과 북의 길이가 22~23km쯤 된다고 합니다. 동쪽에서 서쪽까지의 길이는 14km쯤입니다. 수심은 23~46m 정도입니다. 갈릴리 북쪽에 있는 헬몬산은 백두산보다 높은 해발 2813m입니다. 헬몬산의 차가운 기운이 갈릴리 사막과 만나는 오후가 되면 커다란 폭풍우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폭풍우는 일어납니다. 힘든 일은 일어납니다.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눅 8:23~24)

주님께서는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주무셨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워서 주님을 깨웠습니다. 죽을 것 같은 공포와 두려움이 밀려올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고 부르짖습니다. 손색없는 믿음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극한의 어려움 속에서도 돈을 구하거나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는 믿음의 표본 아닙니까? 우리가 그동안 추구했던 믿음의 빛깔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며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과는 다른 믿음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너무하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어려움이 임했을 때 흔들리는 사람의 감정을 너무 무시하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생기고, 전전긍긍하는 것이 부모 마음 아닙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우리도 “주님, 어느 때까지 제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까? 일어나십시오! 주여, 주여!” 하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우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꾸짖으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은 결코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상식적이지도 않습니다. 이런 두려운 환경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아주 특별한 것이고 예외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의 뒷부분 고물에서 주무셨습니다. 풍랑이 이는 상황과 상관없었기에 그러실 수 있었습니다. 말은 쉽습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그 상황과 상관이 없었습니다! 문제와 상관없는 것이 믿음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고 문제를 부인하느라 바쁜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믿음은 문제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말은 쉽지만 이 믿음이 우리 존재에 익어져야 합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잠 23:26)

마음이 주님께 가 있어야 주님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문제에 가 있으면 문제가 해결되어야 기쁩니다. 마음이 주님께 가 있는지, 문제에 가 있는지 하나님의 마음으로 헤아려 봐야 합니다. 주님은 마음을 다해 생명을 다해 정성을 다해 모든 에너지를 다 써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제가 늦게 신학 공부를 했는데 사역할 때 솔직히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아내와 딸도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주님의 일이라면 한 번도 주저하지 않고 올인했습니다. 신학교 들어가자마자 중등부 전도사를 맡았는데 노력한 만큼 효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력한 만큼 효과가 나오면 나중에 타락합니다. 수련회 갈 때 준비도 많이 했습니다. 희한하게도 수련회 갈 때가 되면 비가 내립니다. 그럼 제가 ‘엘리야의 기도를 할 때다, 믿음을 경험할 때다’ 하면서 기도합니다. 기도하면 또 비가 오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눈빛은 경이롭게 바뀌고, 제 간은 얼마나 부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지 못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못했습니다. 수련회에서 물놀이 하는데 햇볕이 너무 강하면, 손을 내밀고 기도합니다. 그럼 또 구름이 와서 시원해집니다. 그 충격과 신비로움은 오래 갑니다. 많은 분들이 능력을 구합니다. 예전에 부흥 전단지 보면 ‘능력의 종! 일산 땅에 임하다’ 뭐 이런 내용도 심심치 않게 있었습니다. 타락의 시작입니다. 제가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는지, 사탄에게 얼마나 속고 살았는지 모릅니다.

왜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까? 능력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능력의 ‘통로’입니다. 사역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것으로 눈빛이 빛나면 안 돼요, 이렇게 기도했더니 이렇게 이루어졌다고 자랑하는 마음 경계해야 해, 우리는 비가 와도 괜찮고 비가 오지 않아도 괜찮은 거야, 주님 때문에 마음이 괜찮은 것이 믿음이니까.” 그런 믿음을 구해야 합니다. 계획했던 것이 어그러져도 주님과 관계는 전혀 문제가 없어서 괜찮은 것이 믿음입니다.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주님 앞에 나온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왜 나왔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온 믿음이라면, 문제가 해결된다 해도 다른 문제가 생기면 다시 흔들리고 아파하고 낙망하고 무너집니다. 문제는 계속 바뀔 뿐입니다. 흔들리는 인생은 계속 흔들리는 인생이 됩니다.

한 성도에게 다급하게 연락이 왔습니다. 집안에 한 분이 아프신 데 병원에서도 위험하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여쭤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을 그대로 받아들인 분량까지는 아직 되지 않은 것 같아서 제가 ‘무슨 기도를 하고 싶은지’ 다시 여쭤봤습니다. ‘생명’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물었습니다.

“생명이 위태로울 때 구원받기 원한다고 기도하는 바로 그때, 형제의 마음에는 기쁨이 생기나요, 근심이 쌓이나요?”

“근심인 것 같아요.”

“근심이 있고 염려가 가득할 때는 주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마음을 휘감고 있는 문제가 먼저 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세요. 내 마음이 예수님께 붙어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세요”

그 성도가 실제로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 그분이 회복되셨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원리를 잊지 않으셔야 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주님 앞에 나오는 열심과 간절함이 믿음은 아닙니다. 그 문제와 상관없이 내 마음에 주님이 계시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믿음의 전문가입니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받았던 작가 한강이 쓴 《조용한 날 들》이라는 시에는 돌멩이에게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래 때가 묻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아직 다 둥글어지지 않은 돌 좋겠다 너는, 생명이 없어서 존 번연도 새와 물고기를 부러워했습니다. 회개하지 않아도 되니까. 죄를 모르니까. 그래서 지옥에 가지 않아도 되니까. 존 번연이 존재론적 회개가 없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서 얼마나 큰 회개가 있었습니까? 그런데 동물은 회개하지 않아도 되니까 좋겠다고 말합니다. 우리 죄성이 그만큼 만만치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죄성이 있는 한, 광풍이 아니라 작은 문제만 만나도 견딜 수 없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비가 오나 안 오나, 날이 맑으나 흐리나 마음이 주님께 가 있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거기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주님을 기뻐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때 주님이 역사하십니다.

주님께서 때마다 저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이 있습니다. ‘잠잠해라, 고요해라, 나를 바라보거라.’ 마음이 고요해야 한다는 말씀의 뜻을 이제 알아듣습니다. 주님을 잠잠이 바라보는 고요한 상태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그때 주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설교를 듣고 많이 깨닫습니다. 하지만 깨달음이 잘 내면화되지는 않습니다. 마음이 깊어지지 않고 고요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골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단독자로 만나는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요해질 수 있는 길은 주님과 마주할 수 있는 골방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말씀과 기도는 생명입니다. 마음은 깊어지고 고요해지고 잠잠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골방으로 가야 합니다. 주님과 단독자로 있어야 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 마음에서 문제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문제 때문에 울고 왔다가, 문제가 그대로 있는데도, 나갈 때는 씩 웃고 나갈 수 있게 됩니다. 문제가 나를 어떻게 해보지 못하는 그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문제를 풀어가는 실마리를 주시는 하나님!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시는 하나님! 문제를 재해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 문제를 풀어가도록 합력해 선을 이루어가시는 오묘한 하나님의 경륜! 믿음은 깨달음으로 되지 않습니다. 골방으로 가서 경험하셔야 합니다. 골방이 식탁이든, 창고이든, 교회 삼시기도의 자리이든, 자기 전에 침대 밑에서 흐느끼는 시간이든, 아침에 일어나 주님 바라보는 짧은 시간이든, 한낮 정오의 시간이든, 어떠한 시간에도 주님께 달려가셔야 합니다. 문제가 문제 되지 않고, 주님과 함께 있지 못하는 것을 문제라 여기는 믿음 구하셔야 합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는 믿음의 전문가가 되기를 구하셔야 합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을 소원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는 나를 부인하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문제를 부인하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수많은 것들과 우리가 행하는 수많은 열심을 보면 그 답은 나옵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믿음의 전문가는 나를 부인합니다. 문제와 결합되어 있는 나를 부인하고 주님과 연합하기를 소원합니다.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마음은 문제와 결합돼 있었습니다. 입술로는 주님을 찾았지만 마음은 주님과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광풍 가운데에도 아버지와 연합되어 있어서 문제가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누가 와서 어떤 말씀을 해도, 그 메시지가 무엇을 말하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문제를 부인하게 하는가, 아니면 나를 부인하게 하는가! 문제 해결 중심의 신앙은 반드시 타락하고 망합니다.

에필로그

마음이 주님 앞에 가 있는 것이 믿음의 실력입니다. 문제가 닥치거나 예상될 때, 그 문제로 마음이 시끄럽고 요동친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마음 쓰는 것이 아닙니다. 선하든 그른 것이든, 그 문제가 마음에 붙어 있지 않도록 믿음을 써야 합니다. 사람마다 약한 부분이 다르고 요동치게 하는 문제도 다릅니다. 그러나 실제로 주님께 문제를 올려드려 보십시오.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살 것 같은 마음이 들 때,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는 주님의 음성 듣고 꼭 해 보십시오. 큰 문제든 작은 문제든, 건강의 문제든 경제적 문제든, 그 문제가 나를 사로잡으려고 할 때 마음에 주님 계셔야 한다고 기도해 보십시오. 문제는 남아 있어도 방긋 웃으며, 노력하지 않아도 샘 솟는 기쁨으로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새 힘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복음기도신문]

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저서로 주께서 피워내시는대로(토브원형출판사, 2020), 예, 주님 제가 순종의 전문가입니다(토브원형출판사, 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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