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이아침 칼럼] 새 이름으로 불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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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이사야 62:1~5)

하나님께서는 새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을 삶의 자리에서 반드시 드러내시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갖고 계십니다.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무엇을 드러내며 살고 있을까요? 무엇을 드러내려고 힘쓰고 애쓸까요? 이유가 보인다면 돌이켜야 합니다. 그래서 새 이름으로 불려야 합니다. 새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새 이름으로 불림을 받고 살아갈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목사지만 고민거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만 듣고 사는 것이 가능할까? 하나님의 음성만을 듣기를 소원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이런 질문이 저를 괴롭힙니다. 이런 질문이 저를 시원하게 하지 못하고, 아프게 만들고, 다른 것을 깊이 고민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핑계를 대면 안 된다,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삶에서 두 주인은 있을 수 없고, 주인은 오직 하나라고 하십니다. “과연 나는 주인이 정확한가? 하나님이 정말 나의 주인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인가?” 하나님만을 구하며 살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사는 것만이 답이라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얻기를 축복합니다.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사 62:1)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드러나 있습니다.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하시겠다는 강력한 의지입니다. 잠잠하지 않고 쉬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사 62:2)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이방 나라들에도 나타난다고 합니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영광이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이 흘러간다는 말씀입니다.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사 62:3)

아름다운 관은 최고봉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것입니다. 새 이름으로 불리는 인생은 최고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 최고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부심, 강력한 의지, 애타는 마음! 새 이름으로 불리는 그들이 최고의 창조물이라는 자부심!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실 때, ‘나의 최고의 창조물!’이라고 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사 62:4~5)

다시는 버림받지도 않고 황무지라 부르지도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헵시바는 ‘나는 너를 기뻐해’라는 ‘나는 너랑 결혼한 사이야’라는 뜻입니다. 새 이름으로 불리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창조물로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이름으로 불리는 자를 보시고 ‘나는 너 때문에 기뻐’ 라고 하십니다.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사 62:1)

시온을 ‘위하여’ 빛이 ‘나타나도록’ 하시고, 예루살렘을 ‘위하여’ 구원이 횃불처럼 ‘나타나도록’ 하십니다. 반드시 나타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마음이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저는 믿음에도 여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여 주여!’ 하고 부르짖으며 믿음을 표시 내고 다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표시를 내지 않아도 향기가 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하나님의 마음이 선명해졌습니다. 기생 라합을 통해 믿음은 표시 내는 것이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봤습니다. 믿음은 표시가 나는 것을 넘어서 표시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삶의 현장에서 당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를 통해 당신의 뜻이 삶의 현장에서 흘러가기를 원하십니다.

시온의 의가 빛처럼 나타나기를 원하시고,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처럼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시온의 의’와 ‘예루살렘의 구원’은 같은 말입니다. 시온의 의가 빛처럼 나타나기를 원하시는데, 이 빛은 히브리어로 ‘오르’입니다. 빛은 확장성이 있고 중심으로부터 뻗어 나가는 속성이 있습니다. 빛은 안으로 움츠리지 않고 밖으로 뻗어 나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온의 의를 빛처럼 확장시키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시온과 예루살렘에 애착을 갖고 계시는 까닭은 시온에서 우리를 만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만나시려고 하나님께서 임하십니다. 시온에서 만납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하나님을 간절히 부릅니다. 만나기 위해 부르는 것입니다. 문제 해결을 향한 우리의 종교적 열심을 통해 만나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주시는 장소는 따로 있습니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시 18:6)

하나님께서 우리 소리를 들으시는 곳은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어디에서나 들으시는데 어떻게 성전에서만 듣느냐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 말도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은 성전뿐입니다. 우리가 어디서나 종교적 행위를 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곳은 성전뿐입니다.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출 29:42~43)

하나님께서는 아무 곳에서나 우리를 만나주지 않으십니다. 성전에는 번제단이 있습니다. 번제단은 제물을 잡아 죽이는 곳입니다. 희생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인 지성소에 들어가려면 먼저 번제단을 통과해야 합니다. 제물을 잡는 곳을 지나가야 합니다. 신약 시대에 번제단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이 하나님을 실제로 만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해 죽고 산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 십자가, 하나님과 만남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을 만난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빛처럼, 중심으로부터 뻗어나가게 하는 일을 반드시 나타내 보이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입니다.

저는 여백이 있는 삶이 멋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주인되어 나타난 겉멋이었습니다. 신앙마저도 어떤 여백을 멋으로 여겼던 것은 철저한 무지였습니다. 믿음의 영역에서도 그런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드러내시고자 합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들, 예수님께 마음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시기에 잠잠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는 잠잠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믿음을 표시 내는 인생이 맞습니다. 그런데 표시 내지 않는 것을 미덕이라 여겼으니 하나님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산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드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삶에서 반드시 표시 납니다. 아파트에서, 교회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표시 납니다. 그런데 부끄럽습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드러내고 싶은 소원만은 진실 입니다.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사 62:2)

2절도 같은 뜻입니다. 이방 나라가 네 공의를, 뭇 왕이 네 영광을 볼 것이라 하십니다.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어질 것이라 하십니다. ‘의’는 하나님 보시기에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마음에 드는 것을 우리의 삶에서 드러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의를 드러내시겠다고 하시면, “하나님, 제가 그런 인생 되고 싶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그것 말고 제가 원하는 것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지금 돈이 많이 부족한데 그것 먼저 채워주시면 안 될까요?” 하고 말합니다.

‘뭇 왕’은 힘이고 영향력입니다. 주류세력에 속한 권력자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영광’은 하나님께서 하신 흔적입니다. ‘영광’은 새 이름으로 일컬음 받은 사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은 사람은 삶의 방식이 바뀐 사람입니다. 삶의 방향이 바뀐 사람입니다. 기쁨의 근거가 달라진 사람입니다. 가치관과 기준이 바뀐 사람입니다.

카톡 메시지 보낼 때 이모티콘을 참 잘 사용하는 것 같아서, 그 방법을 성도들에게 물었더니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되는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노력을 멈췄습니다. 요새 글그림을 배워 사진을 성도들에게 보냅니다. 사진이나 그림에서 글이 떠오르면 묵상을 그냥 적습니다. 익어진 삶의 방식이기에 자연스럽습니다. 삶의 자리에서도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려면 먼저 우리 삶의 방식이 하나님과 익숙해져야 됩니다.

말씀과 구호가 적힌 교회 옷이 있습니다. 표시 내고 다니는 것은 원래 저의 성향과는 맞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유명한 브랜드의 옷을 입고 다니며 존재 가치를 뽐내려는 경향이 보였습니다. 모범을 보이자는 취지로, 교회 옷을 만들어 입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현실이 됐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분이 우리 교회에 등록하셨는데, 교회 옷을 극성스럽게도 집 바깥에서도 입고 다니는 것을 보고 신기해서 어느 교회인지 추적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삶이 바뀌고, 삶의 양식이 바뀌고, 죽음에 대한 해석도 바뀝니다. 사탄은 우리의 육신이 죽으면 모두 끝이라고 속이고, 몸이 죽는 것이 죽음이라고 세뇌시켰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죽음은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일상에서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면 마음이 무겁고 짓눌리고 어렵고 상쾌하지 않게 됩니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것은 삶의 방식이 바뀐 것입니다. 바라보는 눈, 듣는 귀, 입에서 나오는 말, 마음에 채워진 것이 달라진 것입니다. 달라졌기에 행동도 바뀌는 것입니다.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사 62:3)

왕관이 하나님의 손에 들렸습니다. 왕관을 머리에 썼다는 것은 최고봉이라는 것입니다.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과 영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머리에 왕관을 씌워준다고 말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 것입니다. 좌지우지할 수 있는 탁월한 영향력, 탁월한 위치 같은 것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왕관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호와의 손에 있습니다. 아름다운 왕관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있는 왕관이 내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권능, 힘, 탁월한 능력’을 뜻합니다. 구약에 보면 전쟁이 있을 때 보통 ‘여호와의 손이 함께함으로’라는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이겼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힘을 발휘하는 최고봉인 왕관을 내가 썼고, 내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최고의 창조물이라는 뜻입니다. 새 이름으로 불린 사람은 시온을 통과한 사람,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실제로 연합한 사람입니다. 새 이름으로 불린 사람은 삶의 양식이 바뀌어 하나님 마음에 드는 의가 드러나는 통로가 됩니다. 비현실적이라는 말을 들어도 예수님이 제1현실 된 사람, 놋뱀을 바라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 그 사람이 최고의 창조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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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제1 현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구가 쓰인 티셔츠. 사진: 복음기도신문.

“저 사람은 달라, 뭐가 달라도 달라! 저 사람이 있는 곳에 나도 있고 싶어, 그 사람이 속한 공동체를 보고 싶어!” 믿음의 사람이라면 그런 이야기는 듣고 살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 손에 들린 왕관이요, 새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의 소원이 진짜 있다면 하나님께서 기어이 바꾸어가실 것입니다. 안 되는 것에 너무 주목하지 말고, 이끌어가실 분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은 회개가 전제됩니다.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사 62:4~5)

헵시바는 ‘네가 나의 기쁨’이라는 뜻이고 쁄라는 ‘나는 너와 결혼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최고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해 결혼했다는 뜻입니다. 다시는 버린 바 되지도 않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이기에 그렇게 하신다는 말씀일까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죽었다는 그 사실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마음에 다른 것이 깃드는 것을 더이상 허용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냥 결심이 아닙니다.

다른 교회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얼마나 좋았을까요?” 맞습니다. 정말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만 알면 안 됩니다. 탕자는 아버지께 ‘돌아왔기 때문에’ 품에 안긴 것입니다. 아버지께 돌아온 것이 회개입니다. “아버지께 가면 나는 자식 대접을 못 받을 거야, 나는 죽어도 싸, 나는 죽일 놈이야, 아버지의 품꾼으로 살 수 있다면 그것도 과분하지.” 하는 마음으로 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 아버지의 진짜 마음을 알게 됩니다. 돌이킴이 없으면 아버지께 돈을 받아서 다시 한번 사업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차이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나 같은 죽일 놈을! 품꾼으로도 충분한 나를 우리 아버지가 이렇게 품어주시다니!” 그때 은혜가 경험됩니다. 죄가 문제가 아닙니다. 회개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회개하지 못하는 마음이 쌓이면 정말 어려워집니다. 회개는 십자가에서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달려가 주님의 품을 경험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에필로그

우리는 새 이름으로 일컬음 받기 전에는 세상에서 결핍을 채우려고 삽니다. 직장에서 필요를 채우고, 사람에게서 부족함을 채우고, 환경에서 존재의 결핍을 채우려고 합니다. 새 이름으로 일컬음 받고 난 뒤에는 지금 있는 그곳에서 빛으로 확장됩니다. 직장에 다니거나 사업을 하면 무엇을 이루고 이익을 남겨야 하는데 그 가치가 바뀝니다. 놀라운 일이고 혁명 같은 일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 맞습니다. 희생이 무엇인지도 얼핏 이해가 됩니다. 존재 자체가 그렇게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빛의 속성이 그렇습니다. 중심에서 뻗어 나갑니다. 생명이 흘러갑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이 흘러갑니다.

움켜쥐려고 하면 걸립니다. 마음으로 무언가를 움켜쥐려고 하면 걸립니다. 좋아도 걸립니다. 흥미가 있어도 걸립니다. 재물이 넘쳐도, 관계가 잘 풀려도 걸리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속성입니다. 사랑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사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돌이키고 자복하는 역사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이 하십니다. 십자가로 가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의 은혜를 알아차리고 누릴 수 있습니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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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저서로 주께서 피워내시는대로(토브원형출판사, 2020), 예, 주님 제가 순종의 전문가입니다(토브원형출판사, 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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