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한 기업의 총수가 ‘총체적 변화’를 주장하며 말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꿔라” 그만큼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기업이 생존할 수 없다는 절박한 마음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이 표현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한 시사점이 있다. 인류가 이 땅에 생존하며 결코 변하지 않아야 할 것과 언제든지 시대와 상황에 맞게 달라져야할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 구분점은 무엇일까? 자명하다. 인류가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은 것은 달라질 수가 없다. 아니 그런 기준과 원칙이 달라지면 우리 모두가 오히려 위험한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보수(保守)’는 이처럼 달라질 수 없는 것을 지켜야 진정한 보수인 셈이다. 문제는 어려움을 가져오는 전통과 관례를 별 다른 고민 없이 지키자고 할 때 등장한다. 그 때 반발과 불만이 여기저기서 삐져 나온다. 그저 옛날부터 그랬으니 옛것을 지키자는 행위는 이와 구분해 ‘수구(守舊)’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과 욕망이 확장되면서 변하지 말아야할 기준마저도 허물려는 시도가 등장하고 있다. 적어도 20세기까지 인류는 마누라와 자식, 즉 배우자와 자녀는 영원히 바뀌지 않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가족관계에 대해서도 변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소수자에서 조금씩 커져가면서 목소리가 강해지고,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보수주의의 기준과 가치가 흔들리는 상황에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권력과 미디어를 등에 업고 점점 세력을 확장해가며 이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마디로 먹고 살만해졌기 때문이다. 생존 자체가 절대 명제가 되는 시대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욕망을, 주머니가 넉넉해져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것은 모두 이룰 수 있을 만큼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최근 탐욕을 가진 한 나라의 침공으로 갑작스럽게 위기에 빠진 유럽의 한 나라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욕망이 꿈틀거렸을 이 나라가 갑작스런 전쟁을 맞이하면서 생존을 제외한 부수적으로 여겨지는 모든 욕망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먹고 살만하고 풍족해졌는데 굳이 구차하게 살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내가 원하는대로 마음대로 살면 안되는가? 물론 그래도 된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의 결과가 몰락이라면, 그러한 선택의 결과가 소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다양한 꿈을 꾸고 누리지만, 나의 후손에게 멸망이라는 세계를 안겨주는 일이 합당한가 하는 말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한 사회의 합계출산율은 2.1명은 유지돼야 한다. 합계출산율이란 자녀를 낳을 수 있는 여성이 평생 동안 출산하는 자녀의 숫자를 말한다. 한국사회는 2022년 현재 0.81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꼴찌를 기록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한국사회는 심각한 재앙을 맞는다. 경제활동 인구가 먹여 살려야 할 노령층 인구가 너무나 많아지기 때문이다.
멈춰야 한다. 끝없는 욕망을 멈춰 세워야 한다.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를 현실에 기초한 지면으로 내려오게 해야 한다.
보수의 상대 개념은 진보가 아니다. 보수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은 비(非)보수 또는 반(反)보수이다. 진보(進步)는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키며 나아가는 진보(進保)여야 한다. 향방 없는 진보는 바닷가 절벽에서 집단 자살하는 들쥐인 ‘레밍’이 될 수밖에 없다. 지독한 근시로 앞을 볼 수 없는 레밍이 먹이를 찾아 벼랑 끝에서 다른 쥐떼를 따라가다가 바다에 빠져 죽어버리는 것처럼, 욕망을 제어하지 않으면 자멸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누군가의 주장처럼 우리 인류가 탑승한 이 배는 타이타닉처럼, 세월호처럼 이미 기울어진 상태이다. 돌이킬 수 있는 복원력을 이미 상실한 배에 탑승한 상태이다. 멸망의 길로 접어든 인류에게 남은 것은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 외에는 다른 소망이 없다.
인류는 창조 이후 가장 완벽한 상태의 에덴동산에서 타락했다. 인간의 범죄와 타락은 부족한데서 결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차고 넘치는 충만한 상태에서 이뤄졌다. 모두가 함께 나누고 분배하는 사회주의를 하면, 공산주의를 하면 아름다운 세상이 올 것이라고 마르크시스트가 주장했다. 그러나 실상은 참혹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후, 소수집단의 독재와 권력사유화와 횡포로 지난 20세기에 1억 명 이상의 생명이 허무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무참하게 희생됐다.
창조된 이 땅에서 하나님 없는 진보와 보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보수의 방향성 상실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보수는 하나님의 창조원형으로 회복하는 것. 또 이 일은 이미 멸망한 인생에게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이외의 모든 보수, 보수주의는 허망할 수밖에 없다. <UTT(Understanding The Times)제공> [복음기도신문]
<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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