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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 칼럼] 살아있는 숨쉬기

사진: Ben White on Unsplash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1~39)

생명으로 살아내야 살아있는 숨쉬기입니다. 목숨과 생명을 굳이 구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 오셨다고 하셨습니다.(요 10:10) 숨을 쉬고 있는 양에게 생명을 얻게 하려고 하십니다. 살아서 호흡하고 있지만 생명이 없는 양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목숨과 생명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가 있는지 여실히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생명에 가 있지 않으면 목숨에 가 있게 됩니다. 목숨이 흔들리면 존재가 흔들리기에, 우리는 목숨에 목숨을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목숨은 꺼져도 생명은 살아있다고 하시고, 목숨은 끝날 날이 있지만 생명은 영원하다고 하십니다. 마귀는 빼앗고 멸망시키고 죽이기 위해 왔습니다. 양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빼앗아 영원히 멸망할 지옥에 보내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깨닫게 되면 그 생명은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24층 아파트에 살고 있어서, 48세대의 주민들을 만나게 됩니다. 사람들과 마주치면 제가 먼저 “안녕하세요” 하고 상냥하게 인사했습니다. 그런데 속이 불편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엎드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인사하는데 왜 제 마음이 불편하죠?” 사람들의 호감은 살 수 있지만, 진심을 전하지 못하는 형식적인 인사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진심을 전한다면, 생명이신 주님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담이 있었고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다짐했습니다. “그럼, 제가 1층부터 24층까지 주민들을 섬기겠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한 것이 진심으로 인사한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제가 목사입니다.” 저의 정체성을 밝혔습니다. 1, 2년이 지나자 48세대 주민 모두가 제가 목사인 것을 알게 됐습니다. 주민들 가운데 제가 목회하는 교회가 아니라, ‘경영’하는 교회가 궁금해졌다고 하시는 분도 계시고, 우리 교회를 와보고 싶어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주민 한 분을 만나, “선생님! 제가 경영하는 교회 갑시다!” 했더니 그분이 “요즘에요? 이런 시국에요?”라고 대답합니다. 그 말이 제 마음에서 한참을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이 재난의 때에 생명이 흘러갈 수 없는 구조 아래 있구나, 하나님께 최고의 사랑인 예배를 드리자고 말하는 것이 어려운 시대가 되었구나,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믿음이 허약해진 시대가 되었구나’

성경 말씀은 모든 말씀이 보석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은 보석 가운데 다이아몬드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31절에서 39절까지가 다이아몬드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이야기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제임스 패커 목사님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책에는 관계적인 지식과 교리적인 지식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그 책을 요약해서 말하면 첫째, 하나님께서 성경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시고, 성경 말씀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둘째,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고 나와는 어떤 관계가 설정되어야 하는가! 말씀하시는 분은 나의 주인이어야 하고 나의 왕이 되셔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나의 주인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당신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절대 하나님을 알아갈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것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열어주시기 때문에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당신을 열어주십니다. 속성을 보여주십니다. 날마다 ‘새롭게’ 알아도 하나님을 다 알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친히 오셔서 당신을 열어주십니다. 왕 되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셔서 당신을 따라가는 기쁨과 영광스러움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롬 8:31 상)

‘그런즉’, 앞선 30절까지의 내용을 받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 다섯 단계를 하나님께서 작정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지는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시겠다는 은총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지와 은혜에 대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는 말씀은 곧 우리가 무슨 토를 달 수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의지와 은혜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감격하며 ‘예, 아멘입니다!’ 하고 화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1 하)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위하시면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나를 위해도, 회사의 오너가 나를 위해도 나는 달라지고 든든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시면요? 무서울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동료인 멜란히톤은 이론가이자 전략가로 종교 개혁의 이론적 토대를 세우는데 기여했습니다. 루터와 같은 묘지에 안장될 정도로 친했습니다. 멜란히톤이 루터와 끊임없이 나눴던 말씀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2)

하나님께서는 또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3)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간음한 여인은 즉결심판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도 주님께 나오니 삽니다. 주님께서 택하셔서 의롭다고 하시면, 누가 고발해도 소용없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4)

아무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변호하십니다. 예수님 가슴에 붙어 있는 우리 이름표를 보시고 우리를 변호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이름표가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아버지, 이선세는 제가 보증합니다. 저와 함께 살았습니다. 제가 보증합니다.” 예수님 가슴에 붙어 있는 우리 이름표를 보고 주님께서는 의롭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5)

누구도 고발하지 못하고 대적하지 못하고 정죄하지도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럼 우리를 공격할 사람도, 무시할 사람도, 무너뜨릴 사람도 없고, 그런 환경도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온전합니다. 그런데 거기까지만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다음에 나오는 말씀을 보십시오.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이 나옵니다.

환난은 갑자기 닥치는 재난입니다. 곤고는 서서히 닥치지만 막을 수 없는 어려움입니다. 박해는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것까지 포함됩니다. 적신은 알몸으로 완전히 망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기근과 위험과 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대적할 자가 없는데 이런 힘든 일이 생긴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는 말씀 때문에 이 말씀을 좋아합니다. 모든 것을 다 주시고, 대적할 자도 없다고 해서 보석 같은 말씀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과 같은 상황에 놓인다는 것입니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6)

‘종일’은 특정한 시간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완전히 죽임당하게 됐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과 같은 상황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환경으로부터 보호받는 개념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목숨과 생명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숨이 끊어지면 다 끝나는 줄 알고 목숨에 목숨을 걸지만, 주님께서는 목숨이 끝나도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모든 것을 주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그 무엇도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목숨이 끊어져도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고 싶었는데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계속 복음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두란노서원에서 2년 6개월 동안 복음만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크게 깨달았습니다. ‘아! 복음은 계속 이야기할 수 있고 선포할 수 있는 것이구나!’ 그때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개척한지 11년이 넘었지만 교회에 복음이 한 번도 마른 적이 없습니다. 복음은 마르지 않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죽이신 목적이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주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광풍처럼 몰아친다고 해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질 수 없습니다. 환난 같은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주님께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환난 같은 것이 몰아쳐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살았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영화와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은 그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밖에는 저주만 있다는 것입니다. 방주 안에 있을 때만 구원입니다. 방주 밖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잔만 넘실댑니다. 방주 안에 있을 때만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예수 밖에 있으면 저주이기에 어떻게든 예수 안에 있는 그 사랑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넘어져도, 죄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마음을 빼앗길 때도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나는 예수 안에 있어야 살아!”

지금 어떤 사역을 하고 있든, 어떤 마음이든, 어떤 상황이든 예수 안에 있어야 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 안에 있으려면 예수님과 연합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만 연합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무엇이 죽는 것입니까? 내가 세상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세상이 나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 아무 의미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신다는 것은 유한한 세계를 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새로운 차원의 하나님 나라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7)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깁니다. 하나님의 예지, 예정, 소명, 칭의, 영화! 우리가 그것에 대해 무슨 토를 달 수 있겠습니까?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죽고 사는 존재적인 개념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습니다.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온다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천사나 권세자들이나! 이것은 영적인 것을 말합니다. 공중의 권세를 잡은 사탄이 권세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아무리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나도, 영적으로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일어나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시간을 말합니다. 에너지를 투입해서 어떤 성과를 내야 하는 안타까운 시간 속에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높음이나 깊음에서도! 능력의 차원을 말하기도 하지만 공포스러운 상황을 말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높은 곳과 깊은 곳에서 공포를 느끼곤 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죽고 산 믿음이 실제로 확인되어야 합니다. 그때 생명이 움직이고 흘러갑니다. 그 생명이 있어야 저도 아파트에서 폼 잡지 않고, 인사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됩니다. 환난과 곤고의 상황에 기죽지 말고,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영광을 경험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에필로그

우리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났고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이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다시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도록 하십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십자가가 경험되지 않으면 더욱 두려울 것입니다. 더 준비하고 더 계획할 것입니다. 세상은 준비를 잘하면 똑똑하고 현명하다고 말합니다. 또 준비할 수 있어야 능력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루만 살라고 합니다.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복음이 아니면 안 됩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해 죽는 길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능력있고 똑똑했던 사도 바울도 갖추고 있던 것을 모두 배설물로 여기고 말합니다. 아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실제 되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무엇인지, 주님과 연합하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오직 주님 안에서만 삽니다! 그 주님의 은혜, 그 주님의 긍휼을 믿습니다! 토 달 수 없고 변명할 수 없고 불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의지와 은혜! 나를 미리 아시고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 감사와 감격으로 내가 누립니다!” [복음기도신문]

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저서로 주께서 피워내시는대로(토브원형출판사, 2020), 예, 주님 제가 순종의 전문가입니다(토브원형출판사, 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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