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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사라진 중간고리,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사진: camilo jimenez on unsplash

 우리의 친구 관계는 우리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사회적 선을 위한 강력한 힘이다 

2020년 대통령 선거 다음날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뉴스를 확인하고(당선자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었다) 자전거 사이클링 팀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유지하며 라이딩을 했다. 한 바퀴 돌고나서 팀원 한 명과 도넛 가게 앞에서 앉아 있었다. 물론 2미터 거리를 유지한 상태였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보다 더 다를 수 없는 관계였다. 우리는 나이대도 달랐고, 종교에 대한 관점도 달랐고, 다른 후보자에게 투표했다. (우리는 거기에 대해 이야기하기까지 했었다!)

우리는 뜨거운 커피와 멋진 도넛을 들고 앉아서 팀 켈러의 교회 개척에 대한 인용문의 여파에 대해 말했다. “음, 나는 이제 우리만 빼고 여기 모든 사람들이 미쳤다고 생각하는 데 솔직히 말해서 그렇다면 당신에 대해서도 무엇이라 더 이상은 확신을 할 수가 없어.” 우리는 선거 이야기를 하며 웃었고, 주 집계가 어떻게 나올지 예측을 내놓았고, 우리나라가 이렇게 분열된 정도에서 어떻게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국가적 위기를 그날 아침에 다 해결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아마도 우리는 해결했을 수도 있다. 최소한 우리는 올바른 결정의 한 걸음을 내딛었다. 

또 다른 팬데믹

코로나 이전에 우리는 이미 미국에서 외로움의 전염병에 직면해 있었다. 내가 2018년에 말했듯이, 사회적 고립은 미국인의 삶을 빚어내는 함수로 기능하게 되었고, 외로움은 우리의 정신 건강과 신체 건강, 지역사회 생활에 깊고 비극적인 영향을 남겼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모두가 언제 끝날지도 모른 채 집에 갇혀서 격리를 했어야 했던 시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작년에 팬데믹을 치료하기 위해 했던 것들은 그저 또 다른 질병을 심화시켰을 뿐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의 해결책인 사회적 고립과 거리두기는 미국 공중보건국장이 이름붙인 “외로움의 전염병”을 악화시켰을 뿐이었다. 

코로나가 일으킨 주된 비극은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미국에서만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가 75만 명을 넘었다. 팬데믹은 유색인종과 저소득층, 노인들에게 더 큰 피해를 입혔다. 그리고 코로나19와 관련하여 장기 의료 요인들은 아직 다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며 어떤 의미에서는 앞으로도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한줌의 희망으로 말해 보자면 포스트 코로나가 아니고 코로나-후기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거대하고 어느 정도 측정 가능한 비극 한가운데 우리의 관계와 우정,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은 계산할 수도 없다. 팬데믹이 초래한 개인적, 관계적, 영적 피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할까? 

내가 주장하는 바는 이것이다: 미국인들의 이미 약해진, 특히 친구관계에서, 중간고리(middle-ring) 관계들은 2020년 3월 이후로 크게 감소하였으며, 그것들은 대부분 영상을 보는 시간이나 끼리끼리 모이는 친구관계(faction friendships)로 대체되어 교회에서나 사회 전반에서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이러한 경향을 역행하기 위해서 교회들과 신자들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를 본 뜬 제자도의 새로운 리듬을 창조하여 우정을 회복하고 공동체의 쇄신을 촉진해야 한다. 

팬데믹이 바꾸어 놓은 일상

먼저, 코로나가 우리의 시간 사용을 변화시킨 주요 방식을 살펴보자. 뉴욕타임스의 연구에 따르면 2020년 5월부터 12월까지 8개월 동안 사회적 고립으로 인한 극적인 시간 사용의 변화가 (놀랄 것도 없이) 나타났다(팬데믹이 심각했던 3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는 데이터가 수집되지 않았다). 

미국인이 가족 이외의 사람들과 보내는 평균 시간은 1시간 줄었다. 이는 8개월 동안 사람들이 주변 관계에 보낸 시간이 2019년에 비해 2020년에 244시간이 줄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시간은 대신 어디에 사용이 되었을까? 거기에는 가족 구성원들(특히 어린 자녀와 부모 사이)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낸 부분이 있긴 하지만 시간 사용의 가장 큰 변화는 영상매체로의 대체에 있었다. 팬데믹으로 인해 문자 메시지, 전화 통화, 화상 회의, TV 스트리밍, 컴퓨터 사용 및 비디오 게임이 증가하였다. 직장과 학교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 미국인의 평균 일일 영상 매체 사용 시간은 약 60분 증가하였다. 

이 두 경향을 종합하면 (2020년 3월과 4월 사이에는 최소한 거의 모든 미국인이 격리되었다고 가정하고) 다음을 알 수 있다. 2020년에 평균 미국인은 친구, 교회 성도 및 이웃들과 대면으로 보낼 수 있었던 300시간을 소셜 미디어나 TV, 그리고 인터넷 사용으로 대신 보냈다는 것이다. 

2021년이 이러했다면 2022년은 더욱 그럴 것이라고 확실히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언급하자면, 2017년에도 이미 일어났던 일로서 미국 공중보건국장이 우리의 무시무시한 전염병은 외로움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그러나 대인관계만 영상매체 시간으로 대체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나마 나은 것일 수도 있다. 관계만이 아니라 우리 미국인들이 유지하는 관계의 유형도 급진적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중간고리’ 관계의 위험한 쇠퇴

사회학자 마크 던켈만(Marc Dunkelman)은 2014년 그의 저서 ‘사라지는 이웃’(The Vanishing Neighbor)에서 미국 공동체의 쇠퇴를 중간고리 관계의 상실로 우선적으로 진단했다. 내부고리(inner-ring) 관계는 가장 친밀한 관계 즉 배우자와 자녀, 직계가족, 가장 헌신적인 몇몇 친구를 말한다. 외부고리(outer-ring) 관계는 잘 지낼 수는 있지만 깊은 대화가 거의 또는 전혀 필요하지 않는 이웃과 동료가 포함된다. (즉, 내 외부고리에 있는 어떤 사람이 나에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나에게 실질적인 영향이 없다.) 던켈만의 설명에 의하면 미국이 21세기에 잃어버린 것은 중간고리 관계 즉 우리가 주기적으로 보는 친구들, 교회 소그룹, 직장 소그룹 모임, 또는 매일 만나게 되는 사람들 등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난 수년 동안 동료 교인, 이웃, 직장 동료 간의 관계의 깊이를 잃어버렸고 사이클링 팀이나 농업 협동조합, 볼링 경기 같은 사회적 활동이 혼자서 하는 게임이나 인터넷 활동으로 대체되었다. 

올해 초 칼럼니스트 미셸 골드버그(Michelle Goldberg)는 2020년도에 사람들이 정치적 지도자를 전례 없이 추종했던 충성심에 대해 회고했다. 수천 명의 시민들이 록 밴드 그룹을 따라다니듯이 지지하는 후보자들을 따라다녔다. 그렇게 정치 지도자들을 헌신적으로 따라다녔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이었나? 무엇보다 선재하는 외로움이 정치 지도자를 가장 열렬히 추종하는 자가 되게 했다. 가족이 없거나 가족과 멀리 떨어진 많은 사람들은 정치적 그룹 안에서 자신들을 환영하는 공동체를 찾으려 한다. 이 정치적 그룹들은 새로운 사람들을 자기 그룹으로 끌어들이려는 자금 부족의 교회 개척자들과 둘도 없는 경쟁자가 된다.

‘끼리끼리’ 관계의 부상 

데이비드 프렌치(David French)가 보여주었듯이 미국인들은 실제 세계 즉 중간고리 친구관계를 잃어버렸고 그 공백은 종종 온라인에서 애호성을 기반으로 한 친구관계로 채워졌다. 프렌치가 말한 이 “끼리끼리 친구관계”는 “당신은 우리 편이거나 아니면 우리의 적이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체가 파괴적이거나 거짓 일수 있는” 목적의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그리고 만약 우리나라가 끼리끼리 친구관계로 가득차고 중간고리 관계가 없다면 그것은 큰일이다. 건강한 교회 공동체나 소수의 좋은 친구라도 없다면 우리는 사회적, 정치적 성향에 거의 모든 기반을 둔 우정이라 불리는 그물에 빠져 길을 잃을 수도 있다. 동일한 사회적, 정치적 견해에 기초하지 않은 가족, 친구, 교회의 건강한 네트워크가 없는 이러한 끼리끼리 우정은 개인과 교회와 사회 전체에 해를 끼칠 수 있다. 프렌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전에도 말했듯이, 수백 번이고 더 말할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에 대하여 팩트 체크, 변론, 논쟁을 할 수 없는 주된 이유가 된다. 왜냐면 당신은 음모론 당사자가 있는 그들의 공동체와 이 모든 것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의 우리의 경험에 의해 외로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구분을 할 수 있다. 하나는 수동적 외로움(친구나 공동체가 없음)이고, 다른 하나는 분열적인 외로움(당신의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견해에 완전 동의하지 않는 친구나 공동체는 거부함)이다. 다르게 말해서 소속감에는 어두운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매우 다른 두 사람 사이일지라도 서로 공유하고 서로에게 관대할 수 있는 도넛 가게 유형의 대화를 다시 세울 수 없다면 우리의 함께하는 사회생활이 개선될 것이라는 희망은 거의 없는 셈이다. 

소셜 미디어의 역할

소셜 미디어는 더욱 과도기적이고 변환기적으로 이동하는 문화에서 소통이 증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당신의 친구들이 어디에 살고 있든 소통이 유지된다고 소셜 미디어는 말한다. 그것은 정말 너무 좋은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 프로젝트는 지난 10년 반 동안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어 왔으며, 이제 이러한 사이트들은 선별된 광고와 사회적 분류 즉 우리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연결하게 하는 플랫폼이 되었다. 

올해 초에 팀 켈러는 사회학자 크리스 베일(Chris Bail)의 ‘소셜 미디어 프리즘 깨뜨리기’(Breaking the Social Media Prism)를 서평했다. 이 책에서 베일은 소셜 미디어가 사회적, 정치적 양극화 문제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질문한다. 이에 대해 켈러는 이렇게 요약한다. 

일반적인 대답은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이 우리를 우리 자신 쪽의 뉴스와 의견을 듣게 하는 “에코 방”이나 “버블”에 가두고, 그것은 분열과 극단주의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베일은 다음과 같은 연구를 지적하고 있다. 사람들이 정치적, 문화적으로 반대되는 견해에 매일 노출될 때 (단지 그 견해들의 불쾌하고 신랄한 버전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것은 사람들을 자신의 견해들에 대해 더 강하고 극단적으로 되게 만든다는 것이다. 자신의 의견에 반대되는 의견을 규칙적으로 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의견을 조정하지 않았고 더욱 균형을 잡거나 겸손해지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소셜 미디어는 자신을 잘 다듬는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반대 견해를 자신의 정체성을 공격하는 것으로 보게 된다. 

결과적으로 소셜 미디어는 극단적 견해를 부추기고 온건한 의견을 무시하는 이상적인 플랫폼이 되었다. 소셜 미디어는 우리의 견해를 제시하고, 대안적인 견해를 받고, 시민 담론에 참여하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다. 대신 특정 그룹(다른 그룹에서는 안 되는)에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개인 브랜드를 구축하는 또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켈러의 결론은 아무튼 소셜 미디어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고 긍정적으로 이로운 점도 있기 때문에 소셜 미디어를 완전히 떠나기보다는 그것을 납득할 수 있는 선에서 개혁자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우리는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다. 대부분의 미국인은 운이 좋게도 가장 가까운 관계들은 그대로 유지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의 중간고리 관계, 특히 친구관계는 전례 없는 속도로 해체되거나 사라졌다. 그 공백은 주로 소셜 미디어가 현장 대면 대화를 대신하는 의사소통의 장으로 사용되면서 영상매체 시간과 끼리끼리 우정은 더욱 증가되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아름답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우리의 친구관계, 즉 신자 들 간에 그리고 교회 밖의 사람들과의 관계 같은 중간고리 관계는 우리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사회적 선을 위한 강력한 힘이다. 

교회 친구관계의 사회적 힘 

2012년, ‘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과 ‘아메리칸 그레이스’(American Grace)의 저자이며 하버드 대학교 연구원인 로버트 퍼트넘(Robert Putnam)은 중요한 발견을 했다. 그는 먼저 종교단체 소속 여부와 이타적 행동(자선단체 기부, 자원 봉사, 자신이 속한 종교단체 외부의 사람들을 위한 봉사, 심지어 상점에서 잘못 받아온 거스름돈 반환 같은) 사이의 상관관계를 연구했고, 이어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왜 종교인들은 그들의 지역사회에 더 친절하고 사심 없는 이웃이 되는가? 

그는 사람들이 더 많은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교단의 전통, 신념의 강도 등의 요인들도 연구했다. 알고 보니 사실 좋은 이웃이 되게 하는 데 지속적으로 관련이 있는 오직 한 가지 요인은 친구관계와 교회 내에서 가지는 개인적 관계들이었다. 다시 말해, 신앙 공동체에서 가장 강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신앙 공동체 밖에서도 가장 친절하고 이타적인 사람들이다. 

퍼트넘은 이렇게 요약한다. 

더 많은 친구를 갖는 것은 이타주의와 관련이 있지만 “교회 친구”는 그 사실을 뛰어넘어 더욱 중요하다. 교회친구는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데이터에 따르면 교회 친구의 역할은 종교적으로 된다는 의미와 친구를 가진다는 의미 이상의 힘이 있다. 

가만 보면 우리와 세상에게 위험한 유형의 소속감이 있다. 그것은 우리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정치적으로 연계된 끼리끼리 관계이다. 그들은 “우리 편이 아니면 우리 적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사회 집단은 종종 그들이 반대하는 것으로 정체성을 가지며 그들의 관계의 열매는 종종 갈등, 분열, 외부인에 대한 무자비한 견해가 포함된다. 반면에 건강한 기독교 공동체는 친절과 온유, 선함, 자제력이 증폭되어 있다. 그래서 외부인에 대해서도 두려움이나 의심, 배제가 아니라 사랑과 존엄성, 환대로 대우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신자들과 교회들과 사역들은 외로움의 전염병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우리는 어떻게 우정을 다시 세우고 교제를 회복하며 이런 문화적인 요인이 지배하는 도시에 나아갈 수 있을까? 

우리의 삶(사랑)을 재정렬하기 

지난 2년간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고 소비했던 것으로부터 배웠던 습관을 제자도 패턴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넓은 의미에서 제자도라는 것은 항상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사로잡히는 대로 되어간다. 우리의 깊은 감정들, 생각들, 동기들은 지시하고 인도해 가는 패턴대로 되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의 마음과 성격, 생활 방식이나 이념에 순응해 가게 되는 것이다.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는 ‘영성훈련’(The Spirit of the Discipline)에서 우리가 예수를 따르는 길은 (우리가 그와 연합하고 거듭한 후에) 예수님의 지상 생활의 전반적인 패턴을 따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그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며, 그의 삶의 방식을 실천함으로써 그와 같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그가 아버지 하나님과 죄가 없으신 신인(God-man)의 완전한 나타나심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또한 그분이 이 깨어지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처럼 되는 길이 그의 삶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가 지상 생활에서 행하셨던 친구관계가 우리 인간관계를 풍성하게 하는 이상적인 패턴을 제시해 주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서 어떤 유형의 관계를 볼 수 있는가? 

• 절친한 친구에 대한 절대적 헌신(열두 제자)

• 미움 받는 공동체 구성원에 의도적인 친분 맺기(삭개오)

• 다른 문화권 사람과의 대화(사마리아 여인)

• 친구, 가족 구성원, 외부인과 함께 식사하기

• 결혼식, 장례식 및 문화 행사에 참석하기

•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과 관계 맺기(“죄인들”과 함께 식사)

아우구스티누스가 오래 전에 썼듯이 우리의 모든 문제가 무질서한 사랑의 결과라면, 우리의 삶을 재정렬하는 것과 우리의 사랑을 재정렬하는 것은 함께 가야 할 일이다. 

우정의 회복과 공동체 재건 

우정을 다시 세우고 공동체를 회복하는 일은 복잡한 일은 아니지만 어려운 일이다. 수단과 목적이 같기 때문에 복잡하지는 않다. 우정을 다시 세우는 길에서 우정을 다시 세우게 된다. 

그러나 이 일도 우선순위와 생활패턴의 재정렬이 필요하기 때문에 어렵기는 하다. 우리의 생활 시스템은 우리가 얻어낼 결과를 위해 완벽하게 설계되었으므로 결과물을 바꾸기 위해서는 입력물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우리 삶을 재조정해야 한다. 

우리가 관계 구축을 위한 오랜 순종을 우선시하지 않는다면 교회라고 불리는 이 공동체에서 관계적 하나님을 계속 설교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가 교회 전반에 걸쳐 알고 있듯이(알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움) 관계를 세워 나간다는 것은 모임마다 모습을 보이고, 먼저 다가가고, 우리와 선천적인 관계가 아닌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가고, 서로가 인내하는 모습이어야 하는 것이다.  

1. 얼굴을 보이고 관계를 계속 유지하라

우정과 공동체에는 지름길은 없다. 그러나 다시 말해서, 가치 있는 일은 지향성과 인내가 없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공동체를 위해 창조되었으며 서로가 필요하며, 모든 종류의 친구관계가 없다면 개인적으로 고통을 겪을 것이고 우리의 교회들도 어려움을 겪을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반문화적인 규칙적 일정을 가지고 나타나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2020년에 300시간의 우정과 교제를 잃었다면, 2021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올해 이미 잃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수백 시간을 회복할 수 있을까? 

우정과 중간고리 관계들은 시간이 걸린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롬 12:10)해야 한다. 시간과 사랑과 존경을 들인다면 우리의 관계는 깊어질 것이다.  

2. 먼저 다가가고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환대는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기독교의 독특한 행동이다. 그것은 우리의 현재 친구이든 곧 친구가 될 사람이건, 사람들에게 우리의 집과 삶을 활짝 열어 주는 그리스도와 같은 삶의 방식인 것이다. 

나는 15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소통이 안 된다고 하거나 사람들이 자기에게 연락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손 대접하는 것을 힘쓰며”(롬 12:13) 먼저 다가가는 사람들이다. 먼저 다가가고 공간을 내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관계의 서클들이 넘쳐나게 될 것이다.

3. 당신의 그룹 밖에 있는 사람들과 우정을 키워라 

앞에서 보았듯이, 어두운 유형의 소속감이 있다. 우리가 우리의 고집스러운 신념의 체계만 공유하고 우리 서클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소그룹 친구모임을 발전시켜 나간다면 그러하다. 이러한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의 본래 그룹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의 우정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  

나의 친구들이 다 나와 비슷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비슷하거나, 학력 배경이 나와 같다면 나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모범을 따라가는데 그다지 큰 진전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처럼 된다는 것의 의미는 우리와 거의 닮은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고 그들의 유익을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4. 인내를 가져라 

학대받거나 배제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우리는 모두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정직히 말해서, 우리도 바로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이다. 

아마도 교회나 소그룹, 친목모임에서 사람들을 참아주는 것이 유난히 어려울 수도 있다. 아마도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이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신약성경은 명백히 우리에게 “인내를 가지라”고 말했다 믿는다. 바울이 거기에 대해 가장 잘 말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2-14)

팬데믹은 우리 모두에게 불평등하고 다른 방식으로 힘들게 하였고 또 여전히 어려움은 가시지 않았다. 우리의 문화는 우리 모두를 해로운 방식으로 형성해 왔으며, 우리는 서로에게 그리고 심지어 우리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우리는 지난 2년간 영원히 사라진 몇 가지를 포함하여 많은 것을 잃었다. 그러므로 덜 소외된 교회와 번영하는 우정을 가진 공동체로 가는 길은 이러하다. 신자와 비신자 모두에게 시간과 에너지를 쏟으며 얼굴과 얼굴을 대하며 서로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길이다. 우리의 삶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디자인이다. 이것이 바로 우정과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돌아가야 하는 길인 것이다. [복음기도신문]

 그리스도처럼 된다는 것의 의미는 우리와 거의 닮은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고 그들의 유익을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제레미 린맨(Jeremy Linneman) | 미저리주 콜롬비아에 위치한 Trinity Community Church의 선임목사, 대표 저서는 “Life-Giving Groups: “How-To” Grow Healthy, Multiplying Community Groups”가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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