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이아침 칼럼] 무엇을 지키고 싶은가?

사진: Joshua Earle on Unsplash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오직 너는 똑똑히 보리니 악인들의 보응을 네가 보리로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 (시편 91:1~16)

크리스천도 살면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두려움이 마음에 자리 잡게 되면 공포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는지 아는 것은 지혜입니다. 그래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도 원인에 따라 빛깔이 다릅니다. 시편 91편을 누가 썼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시편 기자에게 환난이 닥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전쟁보다 더 두려운 상황, 극심한 아픔이 있었습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시편 91:1~3)

시편 기자가 지존자 하나님, 전능자 하나님을 만납니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할 때 피난처와 요새 되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3절에서는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 전염병이라는 단어 때문에 많은 교회가 이 말씀으로 설교합니다. 그러나 이 시편 말씀에서 이야기하는 ‘건지심, 지킴’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잘못 이야기하면 우리 신앙이 오염되고 우리 신앙을 망치게 됩니다. 열심히, 순결하게 무슨 일을 하지만 참 신앙과 반대의 길로 가면서 그 일을 하게 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시편 91:4~7)

원수가 함정을 파놓아서 우리는 수많은 덫에 걸려 넘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상황에서 우리를 건지십니다. 하나님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고,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신다고 합니다. 낮에 쏘는 화살은 원수가 정확하게 우리를 조준해서 쏘는 것이니 더 위협적입니다. 누군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고 빈틈만 보이면 쏜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전염병과 재앙이 와서 왼쪽에서 천 명이, 오른쪽에서 만 명이 쓰러지나 우리는 건지심을 받습니다. 왜 이 재앙이 우리에게는 오지 못한다고 말씀하실까요?

오직 너는 똑똑히 보리니 악인들의 보응을 네가 보리로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시편 91:8~11)

화가 나에게 미치지 못하고, 재앙이 내 장막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산에는 스네이크 라인(snake line)이 있다고 합니다. 뱀은 일정 온도 이상이 되면 살지 못하기 때문에 넘을 수 없는 선이 있다는 것입니다. 원수 사탄도 더이상 침범할 수 없는 구역이 있습니다. 그 구역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것이 구원이요, 건지심입니다. 지존이란 지존자가 거하시는 가장 높은 곳입니다. 전능자의 그늘입니다!

코로나19의 문제가 닥쳤을 때, 재정이나 건강의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면 건짐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지키신다는 말씀을 그렇게 마음대로 오용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키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따로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건지시려는 것과 우리가 건짐받기 원하는 것이 다릅니다. 시편 91편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건짐받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을 건지신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초대 교회 역사에는 많은 분들이 믿음으로 살다 가신 감동적인 이야기가 많습니다. 마음에 예수님이 가득했던 문준경 전도사님도 수많은 곳에 복음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순교했습니까? 죽창으로 찔리고 총 맞고 확인사살까지 당했습니다.

우리 교회 토브원형학교 학생들이 필수적으로 탐방하는 코스 중 하나가 양화진입니다. 양화진에는 외국인 선교사들 묘지가 있습니다. 어떤 젊은 부부는 한국에 오자마자 아내가 죽고, 또 아기도 죽고, 선교의 꽃은 고사하고 선교의 씨앗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세상을 떠납니다. 주님께 순결하게 마음을 다 썼는데,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지켜주셔야 하는 것 아닐까요? 코로나19도 믿지 않는 사람도 걸리지만, 믿는 사람도 걸립니다. 그럼 건져주셔야 하는 것 아닐까요? 반드시 찾아오는 전염병의 문제로부터 건지시리라 하신 것 아니었나요?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은 어떻게 죽었고, 베드로는 어떻게 죽었고, 스데반 집사는 어떻게 죽었습니까? 죽을 상황에서 건지심을 받지 못한 그들은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다고 봐야 할까요? 그래서 건지신다는 뜻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가장 높으신 곳에 하나님께서 거하십니다. 우리도 그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하는데 우리 몸과 우리 발은 땅에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먼저 가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 주님께 쓰는 것입니다. 땅을 향한 우리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고, 함께 일으키심을 받아 하늘보좌로 갑니다(엡 2:6). 그래서 우리에게는 전능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히브리서 11:33)

믿음의 사람이 믿음으로 나라를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 싶습니다. 이란으로! 북한으로! 다윗처럼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한다고 합니다. 전능자 하나님의 힘이 임하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히브리서 11:34)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히브리서 11:36~37)

건짐을 받는다는 것은 힘든 상황들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도, 기독교 역사에서도,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핍박 가운데 죽었습니다. 건지심의 의미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지존자의 그늘 아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시편 91:14~15)

시편 18편 1절과 같은 말씀입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편 18:1) 나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 뜻과 정성을 다해서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은 힘을 쓰시는 분! 그런데 우리의 발은 땅에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해, 힘을 다해, 뜻을 다해,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땅에 있습니다. 삶에서 재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 이런 저런 문제가 일어날 때, 그것에 쓸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힘을 다 써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십니다. 다른 것을 사랑하는 우리를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건져내신 것입니다. 그것이 지존자의 거처에, 전능자의 그늘에 우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가 나를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하는 말씀을 잘못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무시당하면 안 되고, 조롱당하면 안 되고, 돌 맞으면 안 되고, 옥에 갇히면 안 되고, 가난하면 안 되고, 좌절해서 실패하면 안 되고, 머리가 아닌 꼬리가 되면 안 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렸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2:5~7)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건지십니다. 하늘 보좌에 올라가도록 건지십니다. 코로나19로 마음 빼앗기고 염려가 가득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나는 주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이것 때문에 마음이 힘듭니다. 사랑하고 싶은데 안 됩니다! 하나님” 하고 부르짖는 심령이 하늘보좌로 가도록 건지십니다. 마음에 가득한 세상의 것을 떼어내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지존자의 은밀한 곳, 하늘 보좌에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보좌로 우리를 데리고 가시기 위해 우리를 건지십니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편 27:3~4)

한 성도의 장례식장에서 선포한 말씀입니다. 전쟁 같은 상황,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다 아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능치 못할 일도 없으신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우리 마음도 어떤 상태인지 다 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다는 것을 알고 믿는다고 해도, 그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구원의 하나님은 성전에서만 만날 수 있습니다. 성전에 번제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번제단에서 죽어야만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고, 전쟁도 우리를 어떻게 해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번제단에서 자아가 죽지 않고 전쟁 같은 상황 가운데 능력의 하나님을 바로 만나면 그냥 죽습니다.

스데반이라는 이름은 헬라쪽 이름입니다. 그 스데반 집사가 헬라쪽 사람들에 의해 돌 맞아 죽습니다. 세상 관점으로는 돌 맞아 죽는 그 상황에서 건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는 돌 맞아 죽으면서도 웃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돌 맞아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그를 평안으로 건지십니다. 스데반은 악을 품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용서하고 축복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스데반을 어떻게 지킨 것입니까? 스데반 집사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계속 하늘 보좌에 가 있어서 하늘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붙드신 것입니다. 그것이 지존자의 거처 아래, 전능자의 그늘 아래 있는 것입니다.

코로나19에 안 걸리면 믿음의 사람입니까? 아니면, 믿지 않는데도 바이러스에 안 걸리고 사회적으로 승승장구하는 사람들이 건짐 받은 사람들입니까? 건지심은 모든 상황과 상관없이 마음이 지존자의 은밀한 그늘 아래 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 든든함이 생겨나 돌을 맞고 죽어가더라도 하늘을 바라보며 축복할 수 있게 됩니다.

에필로그

부족함이 문제가 아닙니다. 연약함도 문제가 아닙니다. 허물도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건짐 받고자 하는 내용이 문제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기로 작정한 내용과 내가 보호받고 싶은 내용이 같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건지시려는 지점과 우리가 건짐 받고 싶은 지점이 다른 것이 문제입니다. 그 둘이 같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지셔서 하늘 보좌에 있게 하실 것입니다. 코로나19가, 재정이, 건강이, 미래의 불투명함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마음에 깃드는 욕구와 어려움과 부족함!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갈지어다! 나는 부족해도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된 하나님의 사람이고, 부족하고 연약해도 나의 시선은 주님께 가 있다! 그 누구도 손도 대지 못할지어다! 주인 된 자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깨질지어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선진 가운데 당신의 뜻을 드러내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 보고, 그 마음을 하나님께 두는 은혜가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가 있지 못함을 통회하며 아파하며 주님께 온 마음 가 있기를 소원하는 백성들 가운데 건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거룩한 백성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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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저서로 주께서 피워내시는대로(토브원형출판사, 2020), 예, 주님 제가 순종의 전문가입니다(토브원형출판사, 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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