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는 아주 흔히 다음 두 가지 일을 저지른다. 자신의 악한 생각을 드러내고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다. 한 예로, 불신자이거나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남편이 그의 기독교인인 아내의 삶을 비참하게 하는 경우에 세상은 그 아내들에게 “당신은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어! 그런 건달을 떠나! 하나님은 당신이 그에게 순종하기를 바라지 않으셔! 애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라고 충고한다. 당신은 이런 권고가 죄를 지으라고 유혹하는 것임을 알고 있는가?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라. 자신을 용서하라.
세상은 이런 어려움에 부닥친 기독교인들에게 충고하기를 좋아한다. 세상은 기독교인들의 귀에 대고 “이런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가, 피해버려.”라고 속삭인다. 또는 “공격해, 너의 권리를 위해 싸워”라고 더 악하게 유혹한다. 슬프게도 많은 기독교인 아내들이 절망에 빠져서, 성경 말씀의 따른 상담을 거부하거나 무시하고, 세상의 충고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불순종하거나 불신자인 남편과 사는 아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권고하고 있을까? 성경이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까? 그렇다,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 존 맥아더 목사가 경건한 순종이 힘든 결혼생활 속에서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설명하는 것을 들어보자.
에베소서 5장의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생각해 봅시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이 구절을 뒷받침하는 여러 구절들이 있는데 잠시 그 구절들은 찾아 보겠습니다. “아내들아 이와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라는 베드로전서 3장 1절의 말씀은 에베소서와 똑같은 말씀입니다.
여기 “이와같이”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3장의 말씀을 보기 전에 베드로전서 2장 13-14절을 보겠습니다. 이 구절은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우리 모두는 정부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18절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정부에게, 왕에게, 권세에게 또 총독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15절의 말씀과 같이 “이것이 하나님의 뜻” 이기 때문입니다. (역자 주:한글 번역 성경에는 없음)
이어서 17절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정부의 형태, 정부의 종류와 그 정부의 도덕적 기준에 상관없이 정부에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18절에 주인에게도 이와 같이 순종하라고 합니다. 주인이 선하거나, 관용하거나, 혹은 아주 까다로울지라도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이어 19절은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내가 파업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고용주가 힘들게 하더라도 참고 견디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 때에 참으면 당신은 하나님께 받을 영원한 상급을 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가장 훌륭한 예,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놀라운 설명이 이어집니다. 21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부당한 것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를 보여 주시고, 공정하지 못한 지도자가 지우는 멍에를 어떻게 참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22-24절에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받지 않아야 할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이것을 보복하지 않으시고 맞대어 욕하지 않으시고 견디셨습니다. 위협하는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고난을 감당하시면서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심으로써 아주 의미심장한 결과를 가져오셨습니다. 인류의 영혼을 구원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성경 원본은 장으로 나누어져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계속해서 3장을 보겠습니다. 1절은 말씀합니다. “아내들아 이와같이…” 여기서 “이와같이”가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정부가 좋든 나쁘든 무관심하든 또는 주인이 선하든 관용하든 까다롭든지 간에, 정부의 권세 아래에 있는 사람들과 주인의 다스림을 받는 사환이 순종해야 하는 것같이, 아내들은 자신의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부당한 고난으로부터 영광스런 결과를 이루어내실 하나님께 자신을 부탁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부당한 것을 감당하신 것 같이, 아내들도 자신의 남편들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은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에 상관없이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어쩌면, 당신은 “그런데 우리 남편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요, 예수그리스도께 관심이 없어요. 포악하고, 친절하지도 않고, 사랑도 없고, 착하지도 않고 점잖치도 않아요.”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어떤 말로 변명한다 하더라도, 베드로는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남편들이 구원받지 못했더라도 또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더라도, 어떤 경우에라도, 남편 아래에 서라. “도를 순종치 않는자”는 구원받지 못한 것을 암시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믿음이 있다고 고백하였지만, 말씀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이유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골로새서 3:18은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하였는데 이 말씀에서 “마땅”한 것이라는 말의 의미는 어떤 제한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남편이 당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것을 하라고 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할 때에는 남편에게 순종하면 안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명령 아래에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런 일들을 제외하고는, 자기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후포타소( hupotaso)의 의미와 같이 남편 아래에 서야 합니다.
2절은 계속합니다.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당신은 남편들은 당신의 이런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남편은 당신의 덕스러움과 정결함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3-4절은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이처럼 2-4절은 굉장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당신의 남편이 구원을 받지 못했거나 불순종하는 믿는 자이거나 간에, 그가 남편으로서 당신이 바라고 기대하는 것을 모두 이루어 주지 못하기 때문에, 남편이 당신에게 시련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아마도 당신이 그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거나 당신이 바라던 것에 미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무척 실망하고 있고, 그의 권위주의에 화가 나 있습니다. 그는 당신이 어떻게 느끼는지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순종해야 합니다. 어떤 핑계가 있더라도 그에게 온유함, 정결함, 존경하는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외모를 치장할 뿐 아니라, 예쁜 드레스를 입고, 보석으로 치장하고, 머리를 예쁘게 꾸미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값진 것으로 치장해야 합니다. 즉 마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않을 것으로 가꾸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는 이런 아내를 갖는 것이 모든 남자의 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당신의 인격을 말살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당신이 로봇이 되라고 권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당신이 따분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당신의 의견을 말하면 절대로 안 되는 것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 마음 깊은 곳이 온유하고 평온하여 보이지 않는 속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값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여성을 좋아하십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 순종 (SUBMISSIVENESS)함으로 조용히 배우는 것이 값진 것이라고 말한 것 같이 벧전 3:5에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submissive)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항상 기준이었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바울과 베드로의 편견도 아니고 맹목적인 극단주의도 아닙니다. 요즘에 갑자기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항상 이런 식으로 되어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여성들이 온유하고 안정된 심령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여성들이 마음에 숨은 사람을 썩지 아니할 것으로 치장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아내들이 자기 남편들에게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주의해야 할 점은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지 모든 남자에게 순종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성들을 하나로 묶어서 모든 남자의 지배 아래에 두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는 자기 남편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6절에 실례가 있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이 구절에서 순종의 개념이 결국은 복종하는 것까지 포함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라고 칭했다.” 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현대적 사고방식이 아닌 것 같이 보입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이 구절을 읽을 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당신이 상담해 줄 때, 남편의 리더쉽이 어떻든지 간에, 남편의 리더쉽에 어떻게 반응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그녀에게 말할 때에, 그녀는 “글쎄요, 당신은 이해 못해요. 때때로 나는 남편이 나를 어디로 이끌어가는지 두렵고, 또 나를 어디로 인도하여 갈지 두렵습니다. 아주 힘들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런 경우에도 이 구절에서 단지 복종해라, 남편을 주라고 불러라, 선한 일을 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을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보호 아래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성실한 사람들의 아버지인 것 같이 사라는 순종하는 사람들의 어머니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본이며, 사라는 순종의 본입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6절 끝에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나오지만, 그녀는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고 하나님 안에서 큰 평화와 굉장한 안전함을 누렸습니다.
이 구절은 굉장합니다. 굉장한 구절입니다. 아주 확실하고 직설적이어서 논쟁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말씀을 다 받아들인 여성 중 몇 사람이 “그런데 동등하다고 하신 것은 어떻게 되나요?”라고 궁금해할 것인데, 곧 공부할 것입니다. 남자들에 대해서 할 때까지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읽을 때에 주의할 점은 아내와 자녀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하는 극심한 폭력이 있을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경우에는 즉 폭력적인 남편이 흥분되고 학대하면, 그 아내는 자녀들을 데리고 위험한 상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집을 떠나거나 안전한 장소로 피해야 합니다. [복음기도신문]
[관련자료]
* The Fulfilled Family (sermon-series)
http://www.gty.org/Blog/B100830에서 원문을 볼 수 있습니다.
존 맥아더 (John MacArthurn)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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