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이아침 칼럼] 예수 생명으로 살기

사진: Sixteen Miles Out on Unsplash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에베소서 2:1-9)

2020년, 하나님께서 ‘사랑의 대상은 결코 바꿀 수 없다’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가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마음에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다면, 사랑의 대상이 바뀐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왜 하나님께 가 있지 못하는지, 어떻게 해야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가 있도록 할 수 있는지 에베소서 말씀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은 죄로부터 건짐을 받은 것입니다. 믿음은 라틴어로 ‘크레도’입니다. 사도신경에 나오는 ‘믿사오니’ 하는 단어가 ‘크레도’입니다. ‘크레도’는 ‘하나님께 심장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곧 ‘하나님께 마음을 드린다’는 말입니다. 우리 심장을 드린 것은 우리 생명을 드린 것입니다. 생명을 드렸다면 실제로 나타나는 증거가 있습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성경은 마음에서 생명의 근원이 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명을 드렸다는 것은 하나님께 마음을 드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확인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을 보면 다른 욕구가 많습니다. 일상적으로 세상에 대한 여러 욕구가 가득합니다. 구원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 구원은 오직 ‘은혜로만’ 받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음이 채워질 때만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육신은 헬라어로 ‘사르크스’라고 합니다. 고깃덩어리입니다. 지금 우리의 육신은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죽었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됐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일상적인 삶에서 하나님과 단절된 것이 어떻게 드러날까요? 하나님과 단절되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이 채워집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죽음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안 계시는 상태가 죽은 것입니다.

헬라어로 허물은 ‘파랍토마’, 죄는 ‘하마르티아’입니다. ‘파랍토마’는 본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떨어져 나간 상태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온갖 것들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죄, ‘하마르티아’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빗나간 상태입니다.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조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말씀은 단순하게 살인, 도둑질, 폭행, 마약, 음란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이 가득 담긴 것이 곧 죽은 상태라는 말씀입니다.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세상 풍조는 그 시대의 사조와 경향입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안정감이 있으려면 세상의 가치를 배우고, 세상의 가치를 우리 삶에 채워야 합니다. 재정적인 성공이나 사회적 출세, 폭넓은 대인 관계가 있다면 안정감을 누립니다. 세상 풍조를 따른다는 말씀을 폭력이나 무력을 행사한다든가 하는 어떤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것이 있어야 안전해! 이것이 있어야 행복해!’ 하면서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세상에서 취하려고 했던 바로 그 가치가 세상 풍조입니다. 세상 풍조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가 세상으로 채워졌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또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고 합니다. 공중 권세를 사탄이 잡았습니다. 그럼 허공에 권세가 있다는 말일까요? 사탄에게 마음이 붙잡힌 사람은 세상 풍조를 따라갑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죽은 상태로, 세상을 취하며 살아갑니다.

그럼 왜 공중이라고 했을까요? 여러분 마음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보통 우리는 마음이 심장에 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공중에 있습니다. 마음은 어디든 가기 때문입니다. 예배당에 앉아 있어도 하는 사업이 어려우면 마음은 온통 사업장에 가 있을 것입니다. 아들이 군대 가 있으면 부모 마음은 군대에 가 있습니다. 단기선교하는 딸이 태국에 있다면 부모 마음은 태국에 가 있을 것입니다. 공중 권세라는 말은 마음을 잡는 권세라는 뜻입니다. 무엇인가에 독하게 마음먹어도 우리는 그것을 합니다. 마음먹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돈 벌겠다고 악심을 먹어도 합니다. 그것으로 마음이 가득해졌기 때문이고, 가득한 그것이 우리를 이끌어가기 때문입니다. 공중 권세를 잡았다는 것은 곧 사탄이 우리 마음을 잡았다는 말입니다. 사탄에게 우리 마음이 잡히면, 우리는 세상 풍조를 따라가게 됩니다.

세상 풍조를 따라가는 사람은 허물과 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사람입니다. 1차적으로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의 힘에 의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 마음 두고 싶은데, 안 돼요, 어쩌면 세상 욕구가 그렇게 생기는지 몰라요. 어쩌면 그렇게 세상에 눈이 가고 마음이 가는지 몰라요.” 좋게 보면 영적 전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사탄에게 마음이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정직하게 봐야 합니다. 영적 전쟁이 심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사탄에게 마음을 강력하게 붙잡힌 것입니다. 이것이 인정된다면, 세상에서 마음을 끊기 어렵다면,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주님에게 올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올인할 수 있게 마음을 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마음을 드리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이고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온전하게 주님이 채워져 있는 상태가 구원입니다. 그 구원은 오직 은혜로 됩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우리는 모두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낸다는 말씀을 피상적으로만 볼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은 욕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또한 몸이 있기에 몸을 통해 접하는 것이 있습니다. 몸을 통해 만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육체를 통해 본 것과 만진 것들이 우리 마음에 차 있습니다. ‘이것이 있어야 좋아!’ 하는 마음이 차오르게 됩니다. 성경은 그것을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따라 산다는 것은,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따라 산다는 말씀입니다.

주일예배 때 토브원형학교 학생들이 모두 기타를 치면서 특송했습니다. 토브원형학교에서는 고급 악기 이미지가 있는 바이올린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치’ 때문입니다. 클래식을 고급문화로 여기면 마음은 반드시 그것을 욕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토브원형학교에서는 기타로 찬양합니다. 또 토브 원형학교에서는 교회에서 만든 옷을 교복처럼 입습니다. 유명 브랜드 옷을 입고 다니며 자부심을 느끼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인생의 가치를 높이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교회 옷에는 ‘그리스도만 남을 때까지’ ‘나의 제1현실은 예수 그리스도!’ 이런 문구가 들어갑니다. 학생들은 그 교회 옷을 교복처럼 입고 다닙니다.

그래서 마음이 먼저 구원받아야 합니다. 자녀들이 잘 되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무슨 죄냐고 묻는 분들을 만납니다. 맞습니다.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자녀가 이 땅에서 행복할 것이고, 행복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세상 풍조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무언가 갖추고, 채우면 행복할 것이라 여기는 그 마음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전쟁 중에 하나님께 탄원했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시 13:1) 전쟁 같은 긴박한 상황에서 무엇을 탄원했습니까? 전쟁이 그치고 왕권이 무너지지 않고 이 나라를 지켜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얼굴을 언제까지 숨기실 것인지를 탄원했습니다. 다윗은 전쟁으로 왕권이 무너질까 봐 두려워하 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망의 잠을 잘까’(시 13:3)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5)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4-6)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함께’ 일으키셨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앉히십니다. 모두 ‘함께’입니다. “주님을 마음에 둘 수가 없어요.” 이것은 사탄에게 잡힌 마음입니다. 마음의 구원은 결심으로 안 됩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써야지” 하고 다짐해도 안 됩니다.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아야 합니다. 함께 살리심을 받으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은, 세상을 욕구하는 마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세상 풍조를 따라가는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때만 함께 살리심을 받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은혜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만큼 큰 은혜는 없습니다. 십자가 하면 저는 마음이 뜁니다. 십자가가 살 길이니 그렇습니다. 실제 길이 거기 있으니 그렇습니다. 그곳에 하늘 보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할렐루야 주님! 주님이 나에게 이렇게 은혜를 베푸셨군요! 내 마음이 이제 사탄에게 잡히지 않고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겠군요!” 하게 됩니다.

우리 몸은 땅에 있습니다. 땅에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계신 하늘 보좌로 갑니까? 몸이 아니라 마음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은혜로 됩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가는 것,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마음이 하늘보좌 영광으로 가득한 것입니다. 길은 하나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만!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을 때만! 그래서 백 번이면 백 번, 천 번이면 천 번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그래, 그런 네가 좋다’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만일 한 사람이 세상의 모든 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십자가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은혜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출 33:15 )

가슴 뛰는 모세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약속했으니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줄게, 모든 장애물도 다 치워줄게, 그런데 나는 함께 가지 않겠다!”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 금송아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재정을 줄게, 혜택을 줄게, 요구하는 것 다 들어줄게, 그런데 함께 가지는 않겠다!” 그때 모세가 말합니다. “하나님, 그 가나안 땅이, 나의 출세와 돈과 가정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지 않으면 안 가겠습니다” 하고 말한 것입니다. 모세는 이미 마음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만 진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의 전부, 나의 왕과 오직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에필로그

주님과 교제할 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전부를 주렴!” 그 전부는 바로 마음입니다. “네 마음 전부가 필요하단다!”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크레도!’ 심장을 드리는 것, 생명을 드리는 것,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사탄에게 마음을 붙잡혀서 세상 풍조를 따라갑니다. 그것이 바로 파랍토마(허물)이고, 하마르티아(죄)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주님 앞에 있어야 하는데, 전심을 드려 주님 기뻐하시는 것을 봐야 하는데,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 생명이 있는 십자가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은혜로 됩니다. 그 은혜를 소원해서 주님께 달려가기를 축복합니다.

먼저 마음을 보십시오. 왜 화가 나는지, 왜 그것을 욕구하는지, 왜 그렇게 움츠러들었는지, 왜 우쭐대고 있는지, 마음을 먼저 보십시오. 그런 것이 세상 풍조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죄에 묶이면 어둠의 세력에게 끌려다닙니다. “이제 내 죄는, 내 욕구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누구도 손도 대지 못할지어다! 할렐루야!” 기도하십시오. 마음을 전부 드렸을 때, 우리를 마음에 들어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일깨워져, 넉넉하게 이겨가는 삶이 무엇인지 배워가게 될 것입니다.

나의 전부 나의 왕과 오직 함께 하기를 소원하는 거룩한 백성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복음기도신문]

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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