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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남 칼럼] 대체신학 이슈와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 연구 (2)

▲ 오늘날의 다메섹 직가 거리. 출처: 한국신학마당 캡처

– 차례 –

I. 들어가는 말
II. 사울/바울과 예루살렘 교회
III. 사울/바울과 다메섹 교회
   1. 사도행전의 증거
   2. 바울서신의 증거
IV. 사울/바울과 아라비아 교회
V.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과 확장 신학
VI. 나가는 말

III. 바울과 다메섹 교회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하였던 사울/바울은 다메섹 교회도 박해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와 다메섹 교회의 진정한 주인으로서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메섹 도상으로 가고 있던 사울/바울을 친히 찾아오셨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른바 다메섹 체험을 하였다. 이에 대해 사울/바울의 제자인 누가에 의해서 기록된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통하여 각각 살펴보자.

  1. 사도행전의 증거

사울/바울의 다메섹 체험이 사도행전의 세 장(9, 22, 26)에서 각각 언급되고 있다. 9장에서는 그 사건이 제삼자의 관점에서 소개되었다. 22장에서는 훗날 사울/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대인들에 의해 살해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가 급히 출동한 로마 군병들에 의해 체포됨으로 구출을 당하여 군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유대인 무리에게 연설하는 중에 자신의 다메섹 체험을 직접 언급하였다. 26장에서는 그가 체포되어 가이사랴로 이송된 후 2년 동안 구류 생활을 하는 동안에 아그립바 왕에게 증언 중에 자신의 다메섹 체험을 직접 언급하였다. 사도행전에서 세 번에 걸쳐 기술된 사울/바울의 다메섹 체험을 통합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본다.[1]

예수께서는 하늘로부터 다메섹 도상의 사울에게 홀연히 특별한 빛으로 찾아오셨다(행 9:3, 22:6, 26:12~13). 그리고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b, 22:7b)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b)

사울이 땅에 엎드러진 가운데, “주여, 누구시이니까?”(행 9:5, 22:8a, 26:15a)라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5, 22:8b, 26:15)라고 밝히셨다. 그러자 사울은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행 22:10a)라고 물었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가 일단 다메섹으로 들어가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 줄 자가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 9:6)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행 22:10b)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행 26:16a).

사울은 홀연히 그에게 임한 빛의 강렬함으로 인하여 시력을 상실하였다. 그는 동행자들의 부축을 받아 다메섹의 어느 집으로 갔다. 사흘 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답을 해 줄 자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행 9:7~8; 22:11). 이 사흘 동안은 그에게 스데반과 같은 증인들에게 들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를 되새기는 가운데 예수와 그의 교회의 정체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특별히 예수께서 자신을 그가 박해한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 또는 또 박해하려고 하는 다메섹 교회 공동체와 일치시키셨다는 사실을 아주 진지하게 깨닫게 된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사울이 핍박하려던 다메섹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인 아나니아를 환상 가운데 부르셨다. 예수께서 그를 “아나니아야”라고 부르시자, 그가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답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라고 하셨다. 아나니아가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라고 답하였다(행 9:10~14). 그러나 예수께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 9:15~16)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의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행 22:10b~15).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 26:16~18).

아나니아가 주께서 환상 가운데 일러 주신 대로 그 집에 들어갔다. 사울 일행은 그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아나니아가 그에게 안수하고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라고 하였다. 그때 즉시로 사울의 눈으로부터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다시 보게 되었다. 사울이 일어나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음식을 먹고 강건하게 되었다(행 9:17~19a; 22:16a).

사울은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을 보내며 즉시로 각 회당을 방문하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다. 그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다 놀라면서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고 말하였다. 또한 그들은 그가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고 의심하였다.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였다(행 9:19b~22).

그런데, 사울에게 위기가 닥쳤다.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고자 공모를 하였고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졌다.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켰기 때문에 그 위기를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의 제자들이 밤에 그를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렸다(행 9:23~25). 그리하여, 그는 예루살렘으로 무사히 돌아갔다(행 9:26). 사울이 위협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를 광주리에 담아 내려서 예루살렘으로 피신하도록 도왔던 자들이 사울의 제자들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사울이 다메섹 교회 공동체에서 여러 날 아나니아와 더불어 아주 역동적인 사역을 펼친 가운데 그의 여러 제자가 세워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한편, 고린도후서 11장 32~33절에 따르면, 사울/바울을 잡아 죽이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던 자는 다메섹에 있는 아레다 왕의 고관이었다. 또한, 갈라디아서 1장 11~18절에 따르면,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에 다메섹과 아라바이에서 3년을 지냈다. 사도행전에서는 바울이 아라비아와 거기에서 지냈던 기간에 대하여 침묵한다. 이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IV. 바울과 아라비아 교회”에서 자세히 논의하고자 한다.

사울은 삼 년 만에 예루살렘에 다시 돌아와서 그곳의 제자들과 사귀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특별히 그는 바나바의 도움으로 사도들을 만나서 자신의 다메섹 체험과 그의 사역을 전하였다. 그리고 그는 헬라파 유대인들을 만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여 그들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예루살렘 교회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가이사랴 항구를 거쳐 그의 고향 길리기아 다소로 피신하였다(행 9:26~30).

  2. 바울 서신의 증거

바울서신에는 그 자신의 다메섹 도상 체험이 사도행전에서처럼 직접적으로 자세히 기술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체험은 여러 곳에서 간접적으로 반영되기도 하고 암시되기도 하였다(고전 9:1; 15:3~11; 고후 4:1~6; 5:16~21; 갈 1:11~12, 15-16; 빌 3:3~14 등).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메섹 도상의 사울/바울에게 빛과 소리로만 나타나셨다. 그런데, 바울 서신에서는 그 빛이 “하나님의 형상”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으로 소개된다.[2]

    1) 하나님의 형상

먼저, 다음과 같이 소개되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논의하여 보자.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골 1:15)

창세기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말씀하셨다(창 1:26).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구절은 창세기 5:1과 9:6에 반복되어 나타난다(비교, 약 3:9).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의 담지자(擔持者, image-bearer)로 창조되었다.[3]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이후로,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던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소개하였다(고후 4:4; 골 1:15; 참조, 빌 2:6). 다시 말해서,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는 독특한 그리스도관, 즉 형상-기독론을 갖게 되었다. 또한, 바울의 형상-기독론은 그의 아담-기독론의 근원이 되었다. 바울의 형상-기독론이 그의 아담-기독론의 근원이라는 김세윤(Seyoon Kim)의 설명을 들어보자.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는 통찰을 가지고 바울은 또한 그리스도를 아담이라는 견지에서 생각하게 되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나와 있기 때문이다(창 1:25~26). 하나님에 의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메섹 도상에서 그에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부활은 종말이 시작되었음을 알렸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를 종말의 아담, 곧 마지막 아담(고전 15:45)으로 인식하고, 그의 독특한 (첫) 아담-마지막 아담 예표론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롬 5:12~21; 고전 15:21~22, 42, 49; 아마도 또한 빌 2:6~11)…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첫 아담이 그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거의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을 회복시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아담-기독론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기본적으로 완벽한 인간으로 단언하며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의 인성을 확인하는 것이다.[4]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예수를 절대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상대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구별하며, 예수는 신적 방식으로 하나님의 형상인 반면, 인간은 피조물적 방식으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설명한다.[5]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첫 아담과의 결속에서 벗어나 마지막 아담과 결속함으로써, 우리가 마지막 아담 곧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그 점에 대하여 김세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며, 또한 첫 아담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을 회복한 마지막 아담이라는 개념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바울로 하여금 구원을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다” 혹은 그 형상과 “같은 형상으로 화한다”라는 견지에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롬 8:29; 고전 15:49; 고후 3:18).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서”와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는 말로 그의 독특한 “변화”-구원론을 표현할 때(빌 3:20~21),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로부터 나타나시고 높임 받으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을

눈에 그리고 있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준다. 그는 고전 15:42~54에서도 똑같이 그렇게 하는데, 거기에서는 그는 이 “영광의 몸”을 “신령한 몸”으로, 그리고 “낮은 몸”을 “육의 몸”이라고 부르며, 종말론적 구원을 우리가 첫 아담 곧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과 “육의 몸”을 떠나, 마지막 아담 곧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과 “신령한 몸”을 획득하는(“지니는” 혹은 “입는”) 것이라는 각도에서 설명한다. 이로부터 어떻게 아담- 구원론 혹은 변화-구원론이 “옛사람을 벗고…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골 3:9~10; 참고, 엡 4:22~24) 것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하는지를 보기란 어렵지 않다.[6]

아담의 후손들은 그들의 조상 첫 사람 아담에 속한 자가 되어 아담의 원래의 모습인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고, 그를 곧 둘째/마지막/새로운 아담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를 믿어 얻게 되는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변화되어, 즉, 첫째 아담적 인간에서 둘째(마지막) 아담적 인간이 되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왕좌를 회복할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여기서 ‘둘째’ 또는 ‘마지막’은 요한계시록 21장에서처럼 ‘새로운’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7] 바울의 형상-기독론이 그의 아담- 기독론의 근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변화-구원론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는 존재와 기능의 관점에서 볼 때 창세기 1:26에 나오는 인간의 완전한 전형이라는 뜻이기도 하다.[8]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첫 아담과의 결속에서 벗어나 마지막 아담과 결속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 회복의 주인공은 이스라엘의 혈통적 후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받은 교회 공동체이다.[9]

    2)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이제 사울/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빛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으로 소개되는 구절(고후 4:6)에 대해 논의하여 보자.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바울이 이 말씀을 기록할 때 염두에 두고 있었던 말씀은 창세기 1:3(“빛이 있으라”)이라는 것이 통설이다.[10] 창조의 빛이 구원의 빛으로 일치가 된 셈이다. 천지 창조 때 빛을 탄생시킨 하나님께서 새 창조 속에서 그의 빛이 “우리의 마음에 비추”어지도록 하셨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신의 다메섹 체험을 “나의 마음에 비추셨느니라”라고 하지 않고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라고 일반화시켰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누구인가? 이 질문을 염두에 두고 다음 구절에 주목하여 보자.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후 1:1~2)

“우리”(고후 4:6)는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의 혈통적 후손들로 구성된 유대인 공동체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갈 3:16)의 보혈로 구속받은 교회 공동체이다. 본 고의 관심은 사울/바울이 회복된 이스라엘이요 참 이스라엘로서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은 유대교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라는 사실을 최초로 깨닫게 된 시점이 언제인가를 추정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IV. 바울과 아라비아 교회”에서 진지하게 고찰하고자 한다. <계속> [복음기도신문]


[1] Daniel Jong-Sang Cae(최종상), 『사도행전과 역사적 바울 연구』, 이용중 역, (서울: 새물결플러스, 2020) “지난 세기에 대다수의 신약 학자들 사이에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 바울에 대한 기록이 비역사적이고 따라서 믿을 만하지 않다는 데에 의견 일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사도행전에서 제시된 바울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자료는 바울 연구에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일치된 학술적 의견이 충분하고 객관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확립되었는지에 관한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 본서는 이 주제에 대한 연구로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에 대한 기록이 통상 받아들여지는 것보다 훨씬 더 믿을 만하다고 주장할 것이다.”(영문판 서문, 23).

“본 연구는 사도행전에서 누가가 바울을 묘사하는 내용 속에서 서신서의 바울과 놀랍도록 조화될 수 있는 유사점과 상응 관계가 많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그 상응성은 단지 지리적이고 역사적인 내용, 어휘의 선택, 사건의 순서에만 관련되는 게 아니라, 바울의 성품과 그가 씨름했던 신학적 문제와 교회 문제와도 관련된다… 회의적인 비평학자라면 누가가 바울 서신의 내용을 빌려오면서도 자기 나름의 신학을 서술하려고 의도적으로 바울 문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척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아니다.”(결론, 281-282)

[2] 이 부분은 필자의 글 “아담에 대한 성경과 코란의 비교 연구” 『ACTS 중동연구』 제3권 2019, 189-192에서 발표된 것으로 여기에서 약간 수정되고 보완되었다.

[3] John H. Stek, 『구약신학』, 류호준 편역 (서울: 솔로몬, 2000), 124.

[4] Seyoon Kim, 『바울신학과 새 관점』, 정옥배 역 (서울: 두란노, 2002). 280.

[5] Herman Bavinck, 『개혁교의학 2권』, 박태현 역,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1), 665.

[6] Seyoon Kim, 『바울신학과 새 관점』, 280-281.

[7] Gregory K. Beale, 『요한계시록 주석』,김귀탁 역, (서울: 복 있는 사람), 693.

[8] William J. Dumbrell, 『새 언약과 새 창조』, 장세훈 역 (서울:CLC, 2003). 220.

[9] 정형남, 『이슬람과 메시아 왕국 이슈』 (서울: CLC, 2009) 225-209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10] Ralph P. Martin, 『WBC 성경주석 고린도후서』, 김철 역, (서울: 솔로몬, 2007).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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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남 | 아신대학교(ACTS) 선교대학원 교수 및 GMS 아랍권 선교사(천안장로교회 파송. since 1989). 그의 책으로 『이슬람과 메시아 왕국』CLC, 2009)과 아랍권 및 이슬람권 선교와 관련된 여러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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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
[정형남 칼럼] 대체신학 이슈와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 연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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