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의정부 H교회로부터 헌신예배 설교 요청을 받았습니다. 남선교회 연합 헌신예배였는데 정중하게 부탁하셔서 수락하고 하나님께 어떤 말씀을 설교해야 하는지 여쭤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마른 뼈 같았습니다. “하나님, 감동 주세요” 하고 2주째 기도했는데도 아무 응답이 없으셨습니다. 아내에게 농담으로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혀 말씀하지 않으시네, 그쪽 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나?” 하나님께서 저를 테스트하고 계시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끝내 없으면 강단에 올라가 이렇게 말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많이 했는데,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둘 중에 하나인 것 같습니다. 하나는 저를 향한 마음, 또 하나는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말만 하고 강단에서 내려오려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를 생각하고 하나님께 여쭤보니 출애굽기 말씀을 허락하셨습니다. ‘헌신’이라는 말에 우리는 많은 부담을 느낍니다. 어렵게 생각합니다. 몸을 드린다는 것은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모든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되었든 이해되지 않았든 모든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육체는 헬라어로 사르크스’, 즉 고깃덩어리입니다. 육체는 육체 안에 무엇이 깃들어야만 의미가 있게 됩니다. 출애굽기 말씀을 통해 우리를 가까이 두시려고 ‘헌신’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읽혀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방자한 백성 3천명이 형제와 친구에 의해 죽임을 당하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간 머물렀을 때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이것을 만들고, 저것을 만들고, 무엇을 갖추라고 상세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이 담긴 십계명을 들고 내려오는데 산 아래에서는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보니, 백성이 방자했습니다. 방자함은 여호와의 편에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방자하게 되면 원수의 조롱거리가 되고 원수의 먹잇감이 됩니다. 그때 모세의 처방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편에 서 있는 자는 나오라고 했습니다. 레위 자손이 나왔습니다. 모세는 레위 자손에게 명하여 백성들을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백성 3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때 모세가, 각 사람이 형제와 친구를 쳤으니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금송아지를 만든 백성을 보고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도 깨버립니다. 방자하게 행하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허락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출 32:27)
모세가 레위 자손에게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형제와 친구와 이웃을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모세가 내려오기 전 거리에서는 어떤 축제가 일어난 것 같습니다. 모세는 그 거리에 있는 자들을 죽이라 했고 3천명이 죽은 사건을 보고 ‘헌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지 않아 방자하게 행하는 사탄의 먹잇감이 된 3천명을 죽인 상태가 ‘헌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많이 경험하고 어찌 그렇게 하나님을 몰라볼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바로 왕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어 10가지 재앙을 내리십니다. 10가지 재앙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내십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며 수십만 명이 바다를 건너 탈출합니다. 바로의 전차부대는 홍해 한가운데서 수장당합니다. 반석을 깨니 물이 나오고,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만나를 먹고 메추라기를 먹었습니다. 그럼에도 겨우 수개월 뒤 금송아지를 만드는 일이 일어납니다. 언뜻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금 이해될 것입니다.
“15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16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17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같이 보였고 18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모세가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 (출 24:15-18)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봤습니다. 백성들에게는 산 위의 하나님의 영광이 불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법궤와 떡상과 금촛대와 향불, 제사의 도구와 성막에 대해 자세하게 말씀하시고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번제단에서 우리를 반드시 만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만남’을 이야기 하십니다. 제사장이 지켜야 할 규범을 말씀하십니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 자세하게 말씀하시고 십계명을 주십니다.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 깨달음이 없기 때문
저는 25년 목회하면서 통찰이 생기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를 신뢰하지도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믿음의 태도를 봤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뜨거운 믿음의 고백이 곧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마음이 뜨거워져서 헌신하는 것도 봤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믿음이 자라지 않고, 믿음이 생기지 않는 이유가 기적적인 체험이 적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도 문제는 계속됩니다. 힘든 상황도 똑같이 옵니다. 그래서 저는 열심과 다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것 한 가지만을 봅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디로 엎어지는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하나님 쪽에 서는가? 그것 하나만 봅니다. 믿음의 실재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럴 듯한 말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기적을 많이 경험했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생겼을 때, 또 기쁘고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우리 마음이 어디로 가 있는가? 그것만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의 현재를 알 수 있습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출 32:1)
세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백성들이 볼 때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뎠습니다. 내려옴이 더디게 보이니 불안과 염려가 생깁니다. 둘째, 우상을 만드는 목적은 우리를 위하여집니다. 셋째,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합니다.
“왜 나는 믿음이 안 생기는 줄 모르겠어” 이런 말 들으십니까? 불안하고 염려가 될 때 우리는 우리를 위해 우상을 만듭니다. 우상의 대표적 특징은 ‘나를 위한 것’입니다. 우상을 세우는 까닭은 그 염려를 해소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기쁨을 위해 ‘이것이 있으면 좋겠다’며 우리 필요를 채우려 하는 마음이 우상입니다.
자녀의 대학 입학. 취업, 돈 문제는 우리 마음에 그냥 쑥 들어옵니다. 판단도 쉽게 됩니다. 믿음은 기적을 경험했느냐 안 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스스로 해결하려는 자아가 우상의 요소입니다.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는 자아 때문에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 6:8)
우리는 하나님과 떨어져 있기에 스스로 해보려고 하는 욕구가 강합니다. 스스로 변호하고 스스로 살아보려고 합니다. 뒤에서 자꾸 조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 하려는 경향부터 주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헌신을 원어로 보면 ‘마레’입니다. 가득히 채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헌신입니다. 무엇을 열심히 하는 봉사가 아닙니다. 하나님 편에 있지 않은 것을 쳐낼 때 하나님이 채워집니다. 방자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단어는 ‘파라’인데 떨어져나간다는 뜻입니다. 방자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스스로 주인 되고자 하는 자아가 죽었을 때 심령에 하나님이 채워집니다. 그것이 헌신입니다. 헌신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듣습니다. 하나님께 혼날까 봐, 심판받을까봐 더러운 것을 치우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기반이 흔들리고 건강이 무너지고 자녀가 잘못될까봐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을 채우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우리 죄성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가는 마음을 제거하는 것이 ‘헌신’입니다. 그때 주님의 뜻이 깃듭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움직입니다. 헌신이 들어오면 납득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기 때문에 따라가게 됩니다. 우리 가정, 우리의 무엇이 잘못될까봐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아 돌이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레’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분히 채워진 ‘헌신’입니다!
살면서 어떤 생각이나 감정은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마음에 쑥 들어옵니다. 그때가 기회입니다. 돌이켜 헌신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분이 오셔서 그분의 뜻대로 움직이는 헌신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우리 속을 뒤집어 놓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가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는 지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한 것들을 제거하고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영광스러운 때 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헌신은 문제에 쏟은 마음을 처리하는 것
주변에서 보면 ‘지쳤다, 무기력하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왜 그럴까요? 어떤 일에 마음을 써서 지친 것입니다. 마음을 써서 무기력해진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편에 서서 마음을 쓴 것입니까, 아니면 문제에 마음을 쓴 것입니까? 문제에 쓴 마음을 처리하는 것이 헌신입니다. 무기력하고 지쳤을 때 막연하게 위로 받으면 큰일 납니다. 새 힘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른 곳에 썼다는 것을 인정하고 주님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지쳐서 무기력해지면 주님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기도도 안 됩니다. 찬송도 은혜가 안 됩니다.
“나 지쳤어,위로받아야 돼”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다른 곳에 썼던 우리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 먼저입니다.
우리는 너무 기쁘고 행복해도 주님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 행복을 끊임없이 추구합니다. 새벽예배 나오다 기도응답 받으면 곧바로 예배 나오지 않습니다. 20년 넘게 봤습니다. 기분이 아주 좋아도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중간하게 힘들 때 주님이 생각납니다. 어중간하게 급할 때 주님이 생각납니다. 그렇지만 목적은 항상 주님이 아니라 ‘행복’입니다.
기쁨이 우상인 시대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이 아니라 세상을 통한 기쁨입니다. 육체를 통해 심는 자는 썩어질 것을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기쁘고 즐거워도 주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쳐내는 것이 헌신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뜻이 여러분을 이끌고 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이것 했으면 좋겠다. 오늘 말씀이 이것이었잖아.” 하실 것입니다. 그때 새 힘을 받습니다. 주님께 마음을 드리면 우리 마음을 감동시키시는 주님의 손길이 날마다 새롭습니다.
그때 말하게 됩니다. “주님이 하셨습니다!”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 헌신입니다. [복음기도신문]
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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