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김명호 칼럼] 지금 아람어 강좌를 시작하는 이유

ⓒ unsplash

코로나 상황을 돌파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흘러 보내야 겠다는 마음으로 2021년 새해, 봄학기 히브리어로 시편을 읽고 묵상하며 보다 깊게 진리를 캐어 내는 줌(Zoom)으로 진행되는 온라인 강의를 새벽 시간에 열었다.

영혼의 목마름 히브리 시편, 온라인 강의 열리다

단순한 강의라기 보다는 히브리 텍스트를 주로 삼고, 시편 해석학의 획기적인 지평선을 열었던 셈족어 가운데 하나이자 나의 전공인 우가릿어(Ugaritic)와 중국 오경웅(嗚經熊)의 시편, 성서역의(聖詠譯義)의 한시(漢詩)를 비교하며 말씀의 깊은 의미를 찾는 하나님 말씀을 말씀 되게 하는 성경 해석 작업이었다. 참으로 은혜였다. 55명이 등록 신청하여 시편 1편 2절, “나의 원함”(한글 성경은 없음) “주님을 향한 나의 강렬한 원함”(חֶפְצוֹ) 이라는 히브리 단어로 첫 문을 열었다. 한 학기 동안 준비하는 강사나, 함께하는 모든 이에게 감동이었다.

특별히 오경웅의 한시(漢詩)는 한 줄 한 줄을 어떻게 그렇게 아름답고 청아하게 단어를 풀어냈는지 감동의 감동을 주었다. 그의 해석을 보고 마주하면서 어떻게 이 히브리 단어를 해석 했을까? 책을 펼쳐 넘겨 보는 순간 감동이 되어, 마치 반짝이는 숨은 보석을 보듯, 손이 떨리고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뛰었다. 말씀안으로 들어가 깊은 우물에서 말씀의 의미를 퍼서 들어 올릴 때 기쁨과 한없이 주님을 향한 갈망(渴望)이 계속되었다.

현대 히브리어 강좌 열리다

시편 강좌를 마치고 주님은 더욱 갈망(渴望)을 부어 주셨다. 현대 히브리어 강좌가 동일한 시간인 새벽에 설강 되었다. 난 학교에서 주로 고급 히브리어와 히브리 텍스트를 복음으로 풀어내는 수업을 하기에, 오랜 이스라엘 유학 생활을 해오면서 사용했던 현대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보통 2 년에 한 번 씩 이스라엘 성지 연수를 갈 때마다 통역을 하게 되면 해가 갈수록 버벅거리고 이러다 가는 다 잊어버리겠다는 마음(위기 의식?)에, 또 어떻게 하면 현대 히브리어를 통해 성경 히브리어에 쉽게 접근하고, 성경 히브리어와 접목시켜 히브리어로 쓰여진 구약 성경을 이해하는데 보다 높은 교육의 효과를 일으키고 싶은 마음에서 기도가 되었고, 좋아하는 숫자 다섯의 오배수인 25명이 등록을 하고 시작을 하였다.

약속의 말씀 고전 16:22 “마라나타”(מָרָנָאתָא) 주시다

사실은 쉼을 누려야 할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여름 히브리어 울판(Ulphan) 인텐시브 강좌』 수업이 7월 1일부터 시작되었다. 8월 말까지! 지금 진행중이다. 알찬 두 달 동안, 매주 월화목금 새벽 5:35-7:00, 일어나기 힘든 시간에 다른 것이 아닌, 이미 히브리어는 어렵고 필요없다고 하는 악성 바이러스가 한국 신학교와 교회에 퍼진 마당에, 기대 이상으로 많은 영혼들이 목마른 사슴처럼 몰려들었다. 이는 봄학기 토요일 마다 진행된 새벽 히브리 시편 강좌에서 말씀에 대한 사모함과 갈망이 커졌기 때문이다. 주님의 은혜였다.

약속의 말씀을 받으면서 말씀이 히브리어 강좌이기에 당연히 구약에서 올 줄 알았다 그런데 말씀은 내가 전혀 생각치 않는 특별한 헬라어 본문에서 왔다.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חֵרֶם ,ㅎ케렘)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여기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한글 번역은, 우리 말로 풀어서 해석을 해 놓았지만, 헬라어 본문은 아람어를 그대로 음역을 해 놓은 말씀이다: “Μαρὰν ἀθά”(maran ata) 이 말은 헬라어가 아니라, 히브리어가 아니라, 아람어(Aramaic)다. 당시 아람어는 국제 공용어(lingua franca)로 예수님 사용하신 말이다.

“Μαρὰνἀθά”라는 말은 헬라어나 히브리어가 주는 말과 다른 뉘앙스와 설레는 감동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독특한 아람어의 의미는 우리의 신앙의 물줄기를 뒤바꾸어 놓는다. 이 귀한 말씀을 약속의 말씀으로 주셨다. 그래서 히브리어 공부를 시작할 때 마다, 마치고 기도할 때 마다, “마라나타” 주 오실 길 사모하는 감동의 찬양을 신실하게 부르고 있다. 7, 8월 두 달 동안 매일 두 번씩, 그 이상으로 부르니 얼마나 은혜인가? 우린 함께 귀한 약속의 말씀을 100번도 넘게 모두가 다 히브리어로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외웠다. מִי שֶׁאֵינֶנּוּ אוֹהֵב אֶת הָאָדוֹן חֵרֶם יִהְיֶה! מָרָנָא תָא

아람어 강좌를 마음으로 받다

이 여름 특별 강의가 없었다면, 또 고전 16:22절이 아닌 다른 약속의 말씀을 주셨더라면 어쩌면 아람어 강의가 시작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Μαρὰνἀθά(마라나타) 라는 아람어의 의미가 이렇게 감동이 클 줄 몰랐다. 이 말씀 앞에 나의 신앙, 그 끝날, 종말관을 주님이 비추어 주셨을 때,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마라나타) 라는 나의 고백은 입술에 붙은 거짓이었음을 보게 되었고, 주 오실 길 예비하는 거룩한 신부 된 우리로서 아람어를 배우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사실은 아람어 강좌는 구약 전공 영역인 석사 과정(TH.M) 그 이상에서 배우는 과목이다. 필자도 깊이 있게는 이스라엘 박사 과정에 가서야 배웠다. 대부분 성경은 히브리어 헬라어로 기록되었고 아람어로 성경이 기록 되었는지는 잘 모를 뿐 만 아니라 어느 책이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는 것 조차도 모른다. 성경이 진짜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라 했을 때, 어찌 이런 태도가 합당할 수 있겠는가? 한 쪽이 뻥 뚫린 느낌이어서, 아람어 강좌를 마음으로 받으면서 동기 부여가 되었다. 여러 생각들과 선한 동기들이 겹쳐져서 아람어 강좌가 개설되었고 첫 강의를 준비하는 내 겐 큰 감동과 설레임이 있다.

아람어 히브리어보다 훨씬 쉬운 언어다

구약 성경이 기록된 히브리어는 22개의 자음을 가진 슈퍼 이지(SUPER-EASY) 언어다. 아람어는 히브리어 보다. 훨씬 더 단순하고 쉬운 언어다. 히브리어를 중심으로 예를 들어 보자. 히브리어는 동사 활용(Conjugation, 히: 비니안님 בנינים)이 7 개다. 그러나 성경 히브리어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아랍어는 자그마치 그 두 배나 된다. 14 개의 동사 활용을 가지고 있다. 그 두 배의 동사 활용을 외워야 하니 얼마나 어렵겠는가?

부끄러운 이야기 이지만, 그래도 공부라면 한 길을 걸어왔기에 좀 일가견을 갖고 있는데,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에서 유일하게 권총(F) 학점을 찼다. 한 학기를 배우고 아랍어 사전을 가지고 시험을 보는데 사전 찾기도 힘들 만큼 정말 어려운 수업이었다. 다음 학기 수업을 들을 수도 없었다. 이런 공부를 한 번 하고 나면 히브리어를 내가 애써 강조를 하지 않아도, 아! 히브리어가 슈퍼이지 언어임을 피부로 절감을 하게 된다. 그래서 아랍어를 공부한 사람에게는 히브리어는 정말 쉬운, 식은 죽 먹기와 같은 쉽고 쉬운 언어다.

가까운 일본어 만해도 그렇다. 일본어 쉽다고 말하지만, 할수록 어려운 언어, 선생이 가르치면서 어렵다고 말한 여러 일본어 선생을 보았다. 자그마치 알파벳만 가타가나 히라가나 거의 100개에 한문을 보면 얼마나 어려운지! 한문은 제쳐놓고 100개의 알파벳만 외우다가도 나자빠지고 말 것이다. 자 그러면 아람어는 어떤가? 히브리어 보다 동사 활용이 적다. 5개 밖에 되지 않는다. 아람어 문자, 알파벳과 자음, 모음은 히브리어와 100% 똑 같아서 히브리어를 아는 사람에게는 히브리어 보다 더 슈퍼 이지 언어다. 그래서 쉽게 배울 수 있다.

아람어 본문 다니엘서를 주님이 주시다

아람어 강좌를 열 때, 본문 말씀을 에스라서 말씀을 주님이 주실 줄 알았다. 우리 성경언어학교, 신학연구소의 약속의 말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말씀이 다 에스라서에 들어있다. 강좌 때 사용할, 구입한 교재도 에스라 말씀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주님은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다니엘서 본문을 주셨다. 다니엘서는 히브리어와 아람어 환상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왜 주님은 교과서도, 학교 약속의 말씀도, 제가 좋아하는 말씀도 에스라서에 들어있는데 주님은 내 생각과 다른, 다니엘서 말씀을 주셨을까? 참, 생각과 기도가 되어졌다.

다니엘서 본문을 읽고 기도하면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처음부터 주님이 이 일을 계획하시고 시작하셨구나! 나도 모르게 환호성이 터졌고 끊임없이 감사의 고백이 나왔다! 신학 영역에 다니엘과 같은 한 사람을 세우실 것을, 내가 먼저 다시 주님 앞에 이 확고한 부르심 앞에 설 것을, 주님이 수 차례 다니엘서 본문을 펼 때 마다 말씀하셨다.

믿음으로 주의 부르심을 받고, 기존 신학교를 박차고 나와서, 복음기도동맹에 들어온지 9년차가 되어가지만 열매는 보이지 않고 갈수록 상황은 희망이 없고, 늘 한계 상황을 절감하고, 과연 나의 부르심은 어디인가? 여기인가? 교회와 신학교인가? 내게 주어진 이 일(소명)을 이루기 위해 얼마 남지 않는 마지막 삶을 드리기 위해 늦었지만 다시 교회와 신학교로 돌아가야 하는가? 한 사람을 길러내고 싶은 열망으로 달려온 나에게 위기의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났고, 아! 이대로 끝나는 건 아닌가! 사실 얼마 전까지 만해도 갈등이 계속 되었다.

이런 위기의 터널을 지나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가야 할 길을 완전하게 보여주시고 확고하게 이제 잘 박힌 못으로 복음의 통로가 될 수 있도록 나를 다시 부르시고 계심을 확인하는 은혜의 음성을 듣게 하셨다. 부족한 나를 다시 은혜로 부르신 자리이구나! 다시 골짜기에 개천을 팔 것을 주님이 말씀하셨다(왕하 3:16) “여호와께 물을 만한 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나올 때 까지!” (왕상 22:7, 왕하 3:11)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니, 다니엘서가 다시 심령안에 들어오고 꿀송이 같이 달고 은혜의 말씀들을 암송하고 싶은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세상에 자기를 더럽히지 않는 לֹא-יִתְגָּאַל
다니엘과 같은 주님을 향한 신실한 충성된 제자를 찾으시다

아람어 강좌는 이렇게 잉태되었다. 신학영역에 다음 세대를 길러내는 다니엘서 성경 아람어 텍스트 강좌로! 아람어 문법과 신택스(Syntax: 문장의 어순)를 배워 아람어로 기록된 다니엘서 본문을 정확히 이해하고 알아가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이 복된 강좌를 열도록 하신 하나님의 마음 붙잡고 가고 싶다. 그 본심은 설명한대로 그렇다.

주님은 학사 에스라를 먼저 찾은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자기를 더럽히지 않는 다니엘과 같은 주님을 향한 신실한 충성된 제자를 먼저 찾으시고 말씀과 기도가 결론 되게 하신 후에 에스라와 같은 학자, “סֹפֵר מָהִיר”(쏘페르 마히르, 스 7:6)를 주님 자신의 열심으로 보잘것 없고 무능한 아무것도 아닌 우리들을 통로로 세워 양육하실 것이다.

다니엘서 말씀 앞에, 나 한 사람을 신학 영역에 세상에 물들지 않는 복음의 통로로 굳게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 강좌를 준비하고 기도하면서 제자는 학교라는 울타리를 세워서 대량 생산 판박이로 찍어내는 교육이라는 제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도제(徒弟) 교육, 장인(匠人) 교육을 통해서 만이 길러지는 것임을 되새겨 본다. 예술가는 다 그렇게 길러졌고 지금도 그렇게 길러진다. 세상의 현대 예술가도 단지 기술(skill)이라는 교육을 통해 길러진 사람 아마(probably) 없을 것이다.

성경 해석가는 탁월한 언어의 직공(織工)인 언어의 예술가이다. 영(靈)에 예수의 생명을 불어넣는 최고의 예술가다. 히브리 성경이 말하는 “쏘페르 마히르”(סֹפֵר מָהִיר, Scribe Expert) 사람의 말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영으로 다루는 말씀의 전문가! 더욱 고집스럽게 그렇게 길러져야 한다. 나는 앞으로 이 일에 더욱 쓰임을 받고 싶다. 다니엘과 같이 자기를 더럽히지 않고, 주를 사모하는 열정(enthusiasm)에 불이 붙은 자! 에스라와 같은 “쏘페르 마히르”(Scribe Expert) 말씀의 전문가, 진리에 골통이 된 자, 진리에 타협하지 않는 자, 복음과 기도가 결론이 되어 주 오실 길, 그 날을 사모하며 달려가는 신학 영역에 한 사람을 키우고 싶은 마음을 특별히 이번 가을 학기 아람어 강좌를 통해 주셨다. 구약 텍스트 다니엘서를 아람어로 읽어내는 이 번 강의는 이 일을 기도로 하고 싶다. 이 일을 마음으로 품고 꿈꾸고 달려갈 동역자 될 사람들을 복된 강좌에 초대하고 싶다.

우리에게는 그 어떤 법 보다 순종해야 할 최(最) 상위의 법, 토라! 하나님의 법이 있다. 이 법을 “야다”(ידע) 하여 생명으로 아는 거룩하고 신실한, 말씀의 사람들(men of words)이 온 세상을 뒤덮고 힘을 쓰지 못하게 하는 코로나 상황을 믿음으로 돌파하여 살아 계신 영감된 하나님 말씀만이 이 악한 세대를 이기는 힘이요 복음의 능력임을 함께 일깨워 외치고 싶다!

사랑하는 우리 주님만을 기대한다!
마라나타 (Μαρὰνἀθά) [복음기도신문]

kim mh

김명호 | 헤브론선교대학교 성경언어대학 교수. 복음과 기도의 기초 위에 성경의 원어 연구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부흥과 선교완성을 위한 다음세대를 세우는 사역으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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