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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고 싶은 글] 뭇별 예배.시선 예배를 드리며

Christine Schmidt from Pixabay

본지는 우리 시대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기도에 도움이 되도록, 과거에 발표된 글이나 소셜미디어(SNS)에 공유된 글을 선별, 소개합니다.<편집자>

목사가 목사에게

베이직교회가 10년을 맞으면서 저를 목회의 길로 인도해주신 고 하용조 목사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목사가 목사에게>라는 책에 실린 글입니다.

목사님!

목사님 생전에 말씀하신 것에 순종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두 가지 못 들은 체하며 넘어간 일이 있습니다. 한가지는 간증집을 출간해보자고 하신 것을 흘려 들었습니다. 마음에 걸려서 목사님 소천하신 직후에 간증집 대신 <사람이 선물이다>를 펴냈습니다. 사실 제 인생에는 목사님이 달리 설명할 길 없는 선물이었습니다. 또 한가지는 흰머리 염색하라는 조언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염색 부작용에 대한 염려 때문에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대로 목사님을 뵙게 될 것 같습니다.

목사님 마지막 모습을 뵌 지 11년이 지났습니다. 가장 전하고 싶었던 소식은 제가 베이직교회가 된 것입니다. 과정은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저 감사할 뿐이라는 고백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목사님은 제 등을 떼밀지 않으셨습니다. 신학교 가라고 직접 말씀하신 적도 없고, 목사 안수 받으라고 친히 말씀해주신 적도 없습니다. 다만 신학교 원서를 갖고 나타나자 ‘내가 조 집사 신학을 놓고 5년 기도했는데 때가 된 것 같다’고 짧게 말씀해주셨지요. 미국 신학교로 가는 편이 낫겠다고 하실 때도 학교 이름을 일러주시지 않고 신학교 투어를 해보고 결정하라고 하셨지요.

늘 그러셨습니다. 목사님을 통해 음성을 듣기보다 스스로 음성을 들으라는 뜻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신학교를 마치고 이틀 후에 바로 귀국하라고 하셨을 때 내심 놀랐습니다. 저는 보스턴을 떠나 미국 남부 지역으로 가서 목회할 생각으로 기도할 때였으니까요. 귀국한 다음날 확대당회에서 이제 조전도사와 동역하게 되었다고 소개하시더니 저녁 무렵 다음날 주일예배 설교를 하라고 하셨지요. 당황스러웠지만 순종했습니다. 아마 목사님은 기억하시지 못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결정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는 두고두고 제 기억에 남았습니다.

베이직교회 이야기를 목사님께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12년 연말부터 집에서 아내와 단 둘만의 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듬해 3월에는 목사님과 건축 공사 중간에 가서 기도했던 리앤유빌딩 2층 까페 히스토리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께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새 교회에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사역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모여서 성경 읽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오직 한 가지만을 목사님께 배워서 목회의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당신 자신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가 곁에서 지켜보았던 것은 그 사랑이 흘러 넘쳐서 사역이 되었지만, 후배 목사들은 사랑이 메말라서 사역이 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목사님은 주님을 내 몸보다 사랑하고 주님을 내 교회보다 더 사랑하셨기에 삶 전체가 사역이 되면 되었지 결코 사역이 먼저가 아니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의도치 않으셨을지라도 사역이 너무 많아지면서 많은 성도가 사역중독증을 보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아시다시피 저는 직장에서 25년간 죽도록 일했습니다. 남다른 커리어를 쌓았습니다. 그러나 그걸 위해 희생한 것은 생명이었습니다. 제 목숨만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가정이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고도 일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교회는 그럴 수 없지 않습니까? 교회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전부 아닙니까? 일이 없을 수 없지만 일 때문에 사랑을 버릴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물론 목사님은 사랑이 넘쳐서 사역하셨습니다. 사랑이 많아서 사역을 쉬지 않으셨습니다. 사랑 때문에 내 몸이 닳아서 없어져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무관하게 교회 사역 구조 속에서 몸부림치는 안타까운 교역자들이 많다는 사실도 알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마 그러다가 한계에 부딪쳐 진실로 거듭나기를 바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찌 그 일이 쉽겠습니까?

목사님!

제가 사역이 없고 훈련이 없고 직분이 없다고 하면 더러 이 교회 왔다가도 발길을 돌립니다. 어떤 분은 노골적으로 질문합니다. 당신은 모든 제도가 다 갖춰진 교회에서 훈련 받고 직분 받고 도움 받아 목사가 되었으면서 어떻게 당신 섬기는 교회는 그 모든 것을 갖추지 않고 이토록 불편하고 무성의한 목회를 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별 답변을 하지 않습니다. 다 갖춰진 교회로 가시는 편이 이 교회를 그런 교회로 만드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사실 제 불편이 훨씬 큽니다. 십 년이 지났지만 교회가 시작되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그동안 거의 쉬지 않고 아침 예배와 주일 예배 설교만 해왔습니다. 코로나 이후로는 수요, 금요 예배도 따로 드리지 않습니다. 성경 공부도 없습니다. 각자 성경 읽도록 돕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변화가 일어납니다. 기도가 달라집니다. 가정이 달라집니다. 일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성도들이 살아나는 것을 목격합니다.

저희는 아직 건물이 없습니다. 무상으로 임대해주는 공간에서 매주 의자를 접었다 폈다 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건물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건물 밖의 교회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그동안 꾸준히 뭇별 예배를 드렸습니다. 성도 전체가 모여서 드리는 예배는 한 달에 한번, 나머지는 흩어져서 소그룹으로 또는 공동체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뭇별처럼 흩어지자고 붙인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손을 잡고 밤하늘의 뭇별을 보며 일러주신 말씀을 기억하고 붙인 이름입니다.

뭇별 예배와 함께 시선 예배도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시선을 따라가는 예배입니다. 그 시선이 머무르는 곳에서 형제자매들과 예배를 드립니다. 병원에 입원한 친구 병실에서, 시골에 계신 부모님 교회를 찾아가서, 순교지에서 함께 믿음의 선배들 족적을 되새기면서… 그렇게 예배를 드립니다. 목사님께서 칠 년 되면 다 떠나라고 하셨기에 흉내라도 내보자고 시작된 걸음이지만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더러는 이단이 아닌가 해서 떠나기도 했고 더러는 예전 교회로 돌아갔고 더러는 안락하게 드릴 수 있는 예배당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많습니다. 그 얘기들을 여기에 어떻게 다 쏟아놓겠습니까? 그동안 지켜보셨고 이미 알고 계시리라 믿기에 실은 목사님으로부터 이런저런 말씀을 듣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런 여러 가지 결정을 해야 할 때마다 목사님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선포하시던 밝은 얼굴이 떠오릅니다. 아! 저 분은 하나님 뜻 안에 계시구나.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저토록 단순하고 대담하구나.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목사님!

혼자 얘기를 드리는 게 어쩌면 모두 자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한 심경은 목사님 칭찬도 듣고 싶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충성된 종이라는 말씀을 들으면 된다는 것 압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제가 교회 첫 발을 내디딘 때부터 눈길을 떼지 않으시고 기도와 말씀으로 인도해주셨음을 알기에 보고 드리고 싶었고 야단이건 칭찬이건 꼭 몇 마디 듣고 싶었습니다. 이제 십 년이 지나니 목사님 곁으로 갈 시간이 그만큼 가까워진 느낌입니다. 그래서 꿈에라도 나타나셔서 말씀 좀 해달라고 조를 생각도 사라졌습니다.

목사님께 감사해야 할 일 몇 가지가 있어 잊기 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미디어 사역입니다. 신학교 마치고 귀국한 직후 선교방송 CGN을 맡으라고 하셔서 실은 아내와 조금 언쟁을 했습니다. 방송국 일 하려면 MBC는 왜 사임을 했느냐고 따지는 아내에게 궁색한 답변을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란노 사역을 맡기실 때 다소 혼란스러웠습니다. 한쪽은 적지 않은 헌금을 받아서 운영을 해야 하고, 다른 한쪽은 돈을 벌어가면서 일해야 하는 것이어서 목회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지 않을까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이 정말 합력해서 선을 이루었습니다.

코로나 시대가 닥치면서 베이직교회 미디어 사역에 하나같이 큰 보탬이었습니다. 사실 교회 자원은 아무것도 없다시피 했지만 SNS 플래트폼은 돈 안들이고 복음 사역을 확장할 수 있는 비밀 병기와 같았습니다. 목사님께도 한번 도전해보시라고 권했던 트위터는 선교 사역에까지 도움을 주었습니다. 40만 팔로워가 모였고, 그 가운데 몇몇은 자발적으로 십여 개국 언어로 번역을 해서 메시지를 전했고, 페이스북도 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우물가에 모여서 두런두런 거리듯 소통했습니다. 더구나 유투브는 방송국을 선물해준 것과 마찬가집니다. 컨텐츠 비즈니스에서 경험한 것과 교회 미디어 사역을 통해 깨달은 메시지의 중요성이 SNS목회와 전도에 새로운 활력을 선물해주었습니다.

나이 마흔 일곱에 처음으로 교회에 발을 내디딘 탓에 노방 전도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목사가 되었지만 이들 미디어는 새로운 노방 전도의 통로 역할을 단단히 해주고 있습니다. 우연히 발길이 닿은 트위터, 페북, 유투브를 통해 결국 혼자 예수님을 마음속으로 이미 영접하고 교회까지 찾아오는 성도가 계속 눈에 띕니다. 더 놀라운 것은 제 발로 찾아오는 새가족 70%가 2030 젊은이들입니다. 목사님 들으시면 너무 기뻐하실 것 같아 자랑 좀 더하겠습니다.

목사님께서 맡겨주셨던 <열린 예배>를 지난 10년 간 <아름다운 동행 예배>로 계속해왔습니다. 정장을 캐주얼로 갈아입는 품을 들이고, 설교 후에 안신기 목사님과 함께 진행하는 Q & A는 교회 담장을 낮춘 것이 아니라 문턱을 없애버렸습니다. 무슨 질문이건 받습니다. 위험하지요. 그러나 대답 못해도 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즉문즉답을 해오다 그 가운데 80개 문답이 이번에 <답답답, 답답함에 답하다> 책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문서사역을 근간으로 한 미디어 사역을 나름대로 이어받은 열매입니다.

목사님!

편지를 이만 줄이기에 앞서 이 말씀만은 꼭 드리고 싶습니다. 갓 문턱을 넘어온 새신자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해주셨던 내용입니다. “목사님,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요… 교회는 제도가 되기 직전까지입니다.” “그러면 목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목사요… 목사는… 괴물입니다.” 목사님께서 가르쳐주셨으니 결코 두 가지를 잊지 않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걷습니다. “베이직교회는 제도가 되지 않을 겁니다. 제도가 되기 직전에 다 흩어지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괴물이 되지 않겠습니다. 괴물이 될 만하면 주님께서 바로 데려가실 것을 믿습니다.” 목사님께는 감사하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사가 있습니다. 그래도 달리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목사님, 감사합니다. 곧 뵙겠습니다.” [복음기도신문]

조정민 목사 | 베이직교회 담임

이 글은 크리스찬타임스에 처음 기고된 것으로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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