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평세 박사(1776연구소 대표)
308호 | 사람풍경
12살의 어린 나이에 ‘어린이 선교사’라는 정체성을 갖고 인도로 떠난 이후 청년 때까지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순종한 조평세 박사. 그는 유학 기간 중 북한 주민들의 처참한 삶의 실상을 깨닫고 북한 선교를 위한 헌신의 시간과 현재 청년 다음세대들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보수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정신을 전하고 있다. 본지는 그 순종의 시간들을, 10.27 한국교회 연합예배가 열리기 직전, 연합예배 청년위원장으로 섬기는 조직위원회 사무실이 있는 서울 극동방송 사옥에서 만나 청취했다.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어린 시절에 선교사로 헌신해 한걸음씩 걷다 보니 오늘 여기에 이르렀네요. 지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고, 그런 보수주의 자료를 보급하는 1776연구소를 설립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최근에는 한국교회가 연합해서 회개하고 건강한 가정들을 회복해 거룩한 나라를 세우자는 10.27 한국교회 연합예배 청년위원장을 맡아,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 청년도 아니고, 어린이 시절에 선교사로 헌신했다니 놀라운 사연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 나이로 12살이었던 1995년 6학년 여름방학 때 인도 캘커타에 가게 됐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선교지에 보내달라고 부모님을 졸랐습니다. 계기는 2학년 때 부모님을 따라 윤석전 목사님의 부흥회에 참석했는데, 그곳에서 성령 충만을 체험하고 선교사로 헌신하게 됐거든요.”
12살에 어린이 선교사로 홀로 인도행
– 부모님도 대단하시네요. 초등학생을 선교지에 보내셨네요.
“선교에 매우 헌신적인 부모님 슬하에서 저는 어릴 때부터 선교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의사로서 병원을 운영하셨던 부모님이 병원 건물 3층에 선교사님들을 위한 숙소를 마련하셨는데, 그때 선교사님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에요. 저는 학교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면 의례껏 선교사님들 방을 하나씩 찾아갔어요. 그리고 선교지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무렵 아프리카, 동남아 선교사님들이 많았어요. 그러다 2학년 때 은혜를 받으니 당연히 선교를 해야 된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주님이 오신다면, 저는 하늘에 쌓은 상급이 너무 적다는 생각에 하루라도 빨리 선교지에 나가고 싶었어요. 부모님은 그런 저를 귀엽게 보셨지만 동시에 그 마음을 귀하게 보시고 계속 키워주셨어요. 그리고 부모님은 저에게 어린이 선교사라는 정체성을 확실하게 심어주셨어요. 그렇게 6학년 초에 파송을 받게 됐어요.”
– 어린이 선교사라는 본인의 의지도 대단하지만, 부모님의 결단도 대단하셨네요.
“드디어 1995년 6월 13일, 인도 캘커타에 도착했어요. 처음에는 인도로 가는 게 마음에 내키지 않았어요. 제가 알고 있던 선교지는 아프리카였거든요. 슈바이처 박사나 데이비드 리빙스톤 전기를 읽으면서 무조건 아프리카, 문명이 없는 오지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를 선교지에 보내기 위해서 부모님이 많이 알아보셨어요. 그런데 아프리카에는 제가 갈만한 곳이 없었어요. 그러다 인도라는 곳을 소개해주셨어요. 하나님께서 저에게 아프리카라고 말씀해주셨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내키지 않았어요. 그러다 부모님이 ‘시티오브조이’라는 영화를 보여주셨어요. 인도 캘커타가 배경이었어요. 영화 속 인도 상황은 정말 열악했어요. 인도 캘커타 정도면 아프리카 오지보다 더 밑바닥의 생활을 경험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어요. 또 다른 확신을 얻은 것은 타임 잡지였어요. 6월 잡지 제목이 ‘세계 최악의 도시 캘커타’였어요. 캘커타로 가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생겼고 그렇게 인도로 가게 됐습니다.”
– 어린이 선교사로 이런 확증의 과정을 겪으셨군요. 인도에서 삶은 어땠나요?
“여름방학에 부모님과 함께 인도에 도착했어요. 현지 선교사님께 저를 맡기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셨는데 떠나시는 부모님을 보지 못했어요. 나중에 선교사님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제가 콜레라인지 어떤 수인성 질병에 걸려 거의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고 해요. 식당에서 주는 물을 마시면 안 되고 꼭 잠겨 있는 미네랄 워터를 마셔야 되는데, 제가 ‘그런 게 어디 있냐. 나는 선교사인데 똑같이 먹어야 된다.’고 하면서 식당 물을 몰래 마셨던 것이었어요. 바로 설사와 고열을 앓으며 정신을 잃었던 거죠. 열이 43도까지 올라가서 침대에 누워있었다고 하는데 저는 기억이 안나요. 그때 부모님이 같이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저를 설득하셨다고 해요. 그런데 제가 침대를 붙잡고 ‘나는 남겠다. 부모님은 가시라. 주님이 나를 선교사로 보내주셨으니 나를 잊어버리시라.’고 말했다고 해요. 부모님은 하나님을 믿고 저를 놔두고 떠나셨다고 해요.”
– 도착하자마자 혹독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군요.
“그렇게 5년 간 인도에서 지냈어요. 처음 3년 정도는 선교사님들 집에 머물면서 훈련을 받았어요. 선교사님들이 마을을 찾아다니며 전도할 때 바이올린을 켰어요. 그러다 사람들이 좀 모이면 선교사님이 복음을 전하셨어요. 방학 때는 마더 테레사가 세운 죽음의 집에서 봉사했어요. 그러다 선교사님들이 귀국하시거나 여러 사정이 생기면서 마지막 2년은 현지 학교 선생님 집에서 하숙했어요. 선생님은 아주 독실한 힌두교 신자였는데, 선생님은 칼리 동상을 모시는 방에서 저를 머물게 했어요. 캘커타의 신인 칼리는 파괴의 신이고 남혐을 조장하는 여신이에요. 칼리 손에는 머리가 하나 들려있는데, 자기 남편이라고 해요. 여성에 대한 억압을 못 이겨서 남편을 죽이고 그때부터 신이 되어서 세상 모든 남자들을 죽이는 신이 됐다는 유래를 갖고 있어요. 선생님 가족은 매일 저녁 칼리 동상 앞에서 향을 피워놓고 주문을 외는 의식을 했어요. 그리고 밤이 되면 저는 그곳에서 잠을 자야 했어요.”
청소년기, 인도에서 홀로서다
– 아직 예민한 청소년 시기인데 무서웠을 것 같은데요?
“잠을 자려고 누우면 여전히 향 연기가 뿌옇게 있고, 피로 시뻘건 동상을 보면 너무 무서웠어요. 사춘기였으니까 감수성이 풍부해서 그런지 동상이 살아서 저를 지켜보는 것 같았어요. 그 앞에서 누워서 자면서 매일 밤마다 가위에 눌렸어요. 저에게는 3년 동안 선교사님들에게 받았던 훈련을 실습하는 시간이었어요. 하나님의 임재를 그 방으로 끌어당겨서 밤마다 영적 전쟁을 치렀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소중한 훈련이었다고 생각돼요. 어떤 환경에서도 예배할 수 있는 훈련을 한 거죠.”
– 들을수록 놀라운 이야기네요.
“인도에서 고등학교 1학년 정도의 과정을 마쳤을 때는 선교사가 되기 위해 신학 공부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교사로서의 자질과 기본적 소양을 갖추고 다시 선교지로 돌아올 마음이었지요. 그런데 선교훈련학교들을 찾아보았지만 미성년자인 저를 받아주는 학교는 없었어요. 어쩔 수 없이 인도와 학제가 같은 영국에서 2년 동안 고등학교를 마치고 2003년에 영국에서 대학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때 고등학교 시절의 경험이 제 진로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됐어요. 2001년 9.11테러가 있었어요. 우리나라에서도 큰 뉴스였지만 영미권에서는 정말 큰 문명적 충돌 사건이었어요.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이 이 사건으로 대부분 군대에 입대하거나 외교국방 분야로 진로를 틀었어요. 지금은 서구문명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저도 무슬림의 테러 행위에 대해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신학을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다른 종교, 무슬림과 유대교를 좀 더 알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저도 진로를 바꿔서 종교학을 선택했어요.”
– 내가 원하는 것보다 내게 필요한 공부를 선택한 셈이군요.
“대학에 들어가서 또 다른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됐어요.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어느 날 책을 든 모습의 사진이 전 세계에서 화제를 모았는데, 그 책은 탈북민 강철환 씨의 ‘평양의 어항(AQUARIUMS OF PYONGYANG)’이라는 영어로 된 탈북 수기였어요. 친구들은 한국에서 온 저보고 꼭 읽어보라고 추천했어요. 저는 그때 북한의 실상에 대해 처음 접했어요.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제가 어렸을 때는 아프리카가 선교지라고 생각했고, 그 다음에는 인도가 선교지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보다 사실상 더 열악하고 외부와 완전히 차단돼 가장 복음이 필요한 곳이 북한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어요. 게다가 북한은 우리와 같은 말을 쓰고 있으니 한국인이라면 1차적으로는 북한을 선교 대상으로 생각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때 참 놀랍게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어요.”
북한이 가장 열악한 선교지임을 깨달아
– 어떤 기억일까요?
“제가 초등학교 때 부모님께 선교지 보내달라고 조를 때 한 달에 한 번 정도 밤에 저를 데려가서 하셨던 일이 있었어요. 부모님이 어느 선교단체와 연결해 성경말씀이나 사영리 복음 등이 적힌 빨간 풍선을 받아다 북한에 보내곤 하셨어요. 그때 저는 학교에서 오자마자 날씨 안내 전화를 걸어 그날의 날씨를 듣고 ‘남동풍’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부모님에게 ‘오늘 갈 수 있어요.’라고 귀띔을 해드리곤 했어요. 그때는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잘 몰랐어요. 그리고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빨간 풍선과 헬륨가스를 차에다 싣고 기다렸어요. 마지막으로 제가 준비한 것은 바늘이에요. 밤이 되면 아버지는 헬륨가스를 넣고, 어머니는 테이프를 붙이세요. 부풀린 빨간 풍선을 마지막으로 저에게 주시면 저는 바늘로 구멍을 한 번 뚫고 날려 보내죠. 구멍을 안 뚫으면 풍선이 대기권 바깥으로 나가거나 아니면 중국 만주에 가서 떨어져요. 그때 부모님께서는 ‘네가 하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어요. 북한 사람들이 이 풍선을 줍기 전에 가장 마지막으로 풍선을 만진 사람이 저이기 때문에 꼭 기도하면서 날려 보내라고 하셨어요. 이 풍선을 줍는 사람이 반드시 예수님 믿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런데 까마득히 잊었던 이 기억이 강철환 씨 수기를 읽고 생각난 거죠. 내가 했던 일이 북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일이었구나. 나는 선교사를 하겠다고 아프리카를 가겠다, 인도에서 바이올린을 켜면서 겨우겨우 복음을 전했는데 이미 어렸을 때부터 북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였다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그렇다면 사실 나는 어린이 선교사로 헌신하기 전부터 북한 선교사였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상 308호 게재>
– 그렇군요. 놀라운 주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그때 진로를 북한으로 정하고,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북한 사역하는 단체들과 만나서 교제를 하거나 인턴을 하게 됐어요. 그렇게 영국에서 7년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입대를 하고, 강원도 화천에서 군복무를 했는데 너무 추웠어요. 좀 따뜻한 곳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생각에 레바논 파병을 지원했고, 세계정세를 보게되면서 전쟁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대 후 모교인 킹스칼리지에서 돌아가서 전쟁학을 공부했어요. 지금 와서 보면 하나님이 이런 시간들을 통해 저를 준비시켜 주신 것 같아요. 그때는 왜 이런 걸 하는지 몰랐지만 어느 순간 퍼즐이 맞춰지는 거죠. 추워서 동명부대에 지원한 것도 하나님이 세밀하게 인도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생각해보면, 그 당시의 경험은 하나도 빠짐없이 저를 여기까지 오게 한 재료들이었어요. 북한이 열렸을 때, 복음을 들고 들어가겠다고 생각하면서 분쟁 후 지역 재건이라던지 평화구축 등을 막연하게 생각하고 경험들을 쌓은 것이죠. 전쟁학을 공부하고 나서 한국에 들어와 북한 인권이나 북한 지원 사역들을 하려는데 쉽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북한이 실제로 열릴 때까지 해외 분쟁 지역에서 경험을 더 많이 쌓기로 했어요.”
– 과정 과정이 모두 소중한 시간들이네요.
“국제 구호단체 소속으로 아프리카에 파견되어 생활했어요. 통일의 때를 기다리면서 콩고와 케냐 등에서 3년을 보냈습니다. 그즈음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통일은 대박’이라는 발언 이후, 청와대 직속의 통일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어요.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에는 정부 차원에서 통일을 위한 실질적인 움직임이 있었죠. 또 2016년 국군의날 기념사를 통해 박 대통령이 북한의 군인과 주민이 처한 참혹한 인권 실상을 잘 알고 있다면서 언제든 남한으로 건너오라고 말했어요. 이것 때문에 북한에서 난리가 났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통일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상황에서 북한 선교를 위해 공부가 필요했어요. 그렇게 고려대 북한학 박사과정에 들어갔습니다. 북한의 붕괴를 대비하고 북한 동포를 다시 살리는 방안 등을 공부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북한학 연구를 시작한 건데, 막상 들어가 보니 북한 동포들보다는 북한 정권과의 대화와 화해를 구상하는 연구가 더 많았어요. 게다가 고려대학교는 특히 주사파 운동권의 영향력이 큰 캠퍼스였어요. 대학생들은 신입생 때부터 자연스럽게 운동권에 선동당하고 반정부, 반미 의식을 갖게 되면서 우리 민족끼리를 주장하는 북한의 주체사상을 동경하게 되는 거예요. 동시에 북한이 저렇게 핵을 개발하고 전 세계에서 고립되는 이유는 미군 때문이라고 말하자면 세뇌가 이뤄지는거죠. 이런 상황을 보고 기독교인으로서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가졌던 차원에서도 충격을 받았어요. 대한민국이 통일이 안 되는 이유를 알았어요. 지금 섣불리 통일했다가는 적화통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통일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 대학의 의식화 과정에 충격
– 외부에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현실이군요.
“이런 상황을 정면 돌파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용기를 내서 대자보를 붙이기 시작했어요. 첫 번째 대자보 제목은 ‘촛불 정권 1년, 많이 나아지셨습니까?’였어요. 촛불시위하면서 민주화에 참여한다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속았다는 내용이었어요. 서울대에서 시작된 트루스포럼이라는 보수주의 청년 단체 이름으로 대자보를 걸었는데, 약 300백 통의 메일을 받았어요. 250개 정도는 고려대학교 선배님들이 응원한다는 내용이었어요. 30개 정도는 고대 재학생들이 조롱하거나 협박하는 메일이었고, 나머지 10개 정도는 학부생들의 응원의 메시지였어요. 그렇게 의견을 같이하는 학부생 10여명을 모아서 서울대 트루스포럼과 모임을 갖기도 하고, 보수주의를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사실 보수주의라는 가치관은 기독교인들에게 접근성이 높았기 때문에 결국 기독모임으로 발전하게 됐습니다. 서울대학교의 김은구 대표가 처음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면서 만든 트루스포럼에 저도 고려대학교 트루스포럼으로 동참하게 됐고,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학생보수주의운동인 것 같습니다.”
– 그렇게 보수주의 운동이 구체화된 것이군요.
“졸업 논문은 북한 핵을 주제로 썼습니다. ‘북한의 핵은 북한의 체제와 수령, 즉 그 정권과 깊이 결속되어 있기 때문에 북한 정권이 무너지지 않는 한 절대 북한이 핵을 포기할 리 없다. 포기한다는 모든 말은 속임수’라는 내용이었어요. 당시 남북정상회담은 물론 미북정상회담도 수차례 열렸기 때문에 주변에서는 논문 주제를 바꾸라는 조언도 많았지만, 그래도 그 관점을 포기할 수는 없겠더군요.”
– 그렇군요. 진리를 가진 사람은 주님이 이끄시는 길을 따라가는군요.
“제가 보수주의 운동을 하다보니까 한가지 깨달은 것은 보수주의와 관련된 자료가 너무 없다는 것이었어요. 한국어로 그런 자료들을 번역도 하고 집필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수주의 문건을 찾아야 했는데 마침 아내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면서 이 작업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습니다. 하나님이 절묘하게 때를 잘 맞춰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박사과정을 마칠 때, 아내에게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주시고, 미국 대학 박사과정에 합격해 공부할 기회가 열렸습니다. 저도 트루스포럼 연구위원이라는 이름으로 문건을 찾고 번역하는 시간을 보냈어요. 또 한국의 보수주의 언론 매체인 미래한국이나 월드뷰에 기고도 했습니다.”
– 꿈을 품고, 그 꿈을 실현하는 과정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인도하신 것 같네요.
“북한에 대한 마음을 처음 품었을 때부터 순간순간 열리는 길로 주님이 길을 열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저를 끝까지 책임지시고, 어떤 것을 선택하든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라고 생각해봤어요. 초등학교 때의 헌신을 예쁘게 보신 것 같다고 생각해요. 어린이 선교사라고, 물론 아무것도 모른 채 선교사가 되겠다고 했던 것이지만, 순수한 그 마음을 귀하게 보신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순수했던 동기, 처음 그 사랑을 계속 유지하는 게 저의 가장 큰 과제입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무모한 결정이었고 또 한편으론 부모님에게 큰 불효잖아요. 할머니 얘기를 들어보면 어머니는 저를 보내고 하루도 빠짐없이 우셨다고 해요. 요즘 같으면 스마트폰이나 카톡으로 연락할텐데, 당시 제가 살았던 선교사님이나 선생님 집에는 전화기도 없었기 때문에 제가 부모님께 연락하지 않으면 부모님은 제 소식을 알 수도 없었어요. 부모님이 마음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그러나 이런 과정을 거쳐 제가 인도로 간 다음, 7년 뒤에 부모님도 병원을 그만두시고 일본으로 선교를 가셨어요. 부모님은 원래부터 일본선교에 관심을 갖고 계셨는데, 저를 선교지로 보내시고 그 선교의 비전이 더욱 강해지시면서 아예 선교지로 나가신 것이죠. 이런 퍼즐들을 맞춰보면 하나님이 이렇게 저희 가족을 인도하신 것 같아요.”
기독교 가치관에서 시작된 보수주의 정신을 일깨우다
– 1776연구소는 어떤 의미이며, 또 현재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소개부탁드립니다.
“보수주의 정치 철학을 공부하다보니 보수주의란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종주국인 미국의 독립정신과 건국정신을 보수하는 것이더라고요. 하나님을 정치에서 완전히 배제하려고 했던 1789년의 프랑스혁명을 반대하는 것이 미국의 독립혁명이에요. 우리나라의 정치 철학 교과서에는 프랑스혁명과 미국혁명을 구분하지 않아요. 그래서 보수주의 정치 철학을 제대로 알려면 미국의 독립혁명 정신을 우리나라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미국의 독립정신은 결국 기독교 가치관에 뿌리내린 정치입니다. 그것을 현대에서 보수주의라고 하는 것이고요. 그 첫 번째 원칙이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거예요. 보수주의 철학은 사실 칼빈주의와 크게 다를 바 없죠. 그렇다고 칼빈주의 연구소라고 할 수 없으니, 미국의 독립 연도를 따서 1776연구소라고 하게 됐어요. 견미단은 미국의 독립 유적을 탐방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발자취를 탐방해요. 하와이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독립운동했던 장소를 비롯해 7개 도시를 순방하는 프로그램을 매년 계획하고 있어요.”
– 앞으로의 계획과 기도제목을 말씀해주세요.
“1776연구소에서 하는 세 가지 사역을 계속해서 이어나가야죠. 무엇보다도 트루스포럼을 비롯해서 자유시민교육, 바른청년연합, 전국청년연합 등 청년들을 키우는 단체들에 이런 리소스들을 제공하고 싶어요. 물론 제가 직접 강의도 하겠지만 그것보다는 영어 문서를 볼 수 있다는 장점을 살려서 좋은 문건들을 한국어로 재생산하는데 기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1776연구소가 잘 운영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이곳에서 함께 일할 수 있는 인력이 필요하고, 연구소를 섬길 수 있는 체력도 필요합니다. 지금 많은 청년단체들이 자비량으로 단체들을 운영해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청년단체들이 기독교 보수적 가치를 위해 여러 필요들이 채워지고, 활발히 활동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또 개인적으로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제가 받았던 신앙의 유산, 선교사로서의 정체성과 훈련 등을 물려주고 싶어요. 최근 서울 교육감으로 또 진보성향의 인물이 당선이 돼서 학부모로 걱정이 되는데, 아이들이 진리 안에서 견고하게 서서 충돌이 와도 굳건하게 믿음으로 서 있을 수 있고, 학교에서 전도도 하고 영향을 끼치는 아이들로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복음기도신문]
C.K.
<저작권자 ⓒ 내 손안의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복음기도신문. 출처를 기재하고 사용하세요.> 제보 및 문의:
[관련기사]
“마약 중독 치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밖에 없어요” – 최경희 센터장
“혈기 많던 내가 이제 십자가 능력으로 살아요” – 신병철·김명자 교육선교사
20대 후반 7년 차 선교사의 고백, “선교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리” – 백승주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