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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사도 요한(2) : 타협하지 않는 사랑의 사도

▲ 렘브란트, 사도 바울, 1657년쯤, 워싱턴. 유튜브 Christ' Warriors 캡처

아무도 대면을 좋아하지 않는다. 심지어 대면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그들 자신은 대면 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색하고 불편하며 신경에 거슬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만한 사람은 공격당한다고 느낄 수 있고, 겸손한 사람은 낙심한다. 오로지 자기 혼자 옳다고 여기는 사람만이 대면을 좋게 여긴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의 진리로 죄인들을 대면하는 기독교인들은 어김없이 ‘사랑이 없는 사람’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무엇이든지 좋은 느낌을 갖는 것이 사랑의 개념이라면 대면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너무나 자주 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하자, 사람을 사랑하자.”라는 구호를 외친다. 이러한 외침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에 대해서 기분 나쁘지 않으면서 나름의 방법을 찾게 하려는 것이다.

더욱이 사람들은 신자들의 관심을 피하기 위해 그들이 사랑이 없다고 비난한다. 그러한 비난이 어느 정도 맞을 수도 있다.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는 자주 죄에 대해 진실을 말해 주는 것과 사랑하는 것 사이에서 긴장감을 느낀다. 성경적인 진리는 귀에 거슬리고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때 바른 균형을 이루는 것은 쉽지 않다. 이것을 염두에 둘 때, 사도 요한의 삶은 그러한 균형을 보여주는 뛰어난 예가 된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 순종하는 것으로 증명된다고 말했다(요 14:15~23). 또한 성도를 사랑하는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식이고(요 13:34~25), 그리스도의 자녀 됨과 사탄의 자녀 됨의 경계선이라고 지적했다(요일 3:4~10). 그러나 요한의 사랑에 대한 이론은, 그의 진리를 향한 열정을 전혀 사그라뜨리지 않았다. 사실상 그것은 ‘우레의 아들’의 삶을 균형 잡히게 했다.

요한은 젊은 시절부터 진리에 헌신했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부터 그는 진리를 알고 따르고자 하는 영적인 의식을 가진 젊은이였다. 우리가 요한을 처음 만났을 때(요 1:35~27), 그와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 그러나 안드레와 요한은 자신의 스승인 세례 요한이 예수를 가리켜 진정한 메시아라고 하자 주저 없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다.

진리에 대한 요한의 사랑은 그의 모든 글 가운데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진리’라는 헬라어를 스물다섯 번이나 사용하였고, 그의 서신서에 이십여 회 이상 사용하였다. 그는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 4)라고 말했다. 그는 신자라고 주장하면서도 어둠 가운데서 행하고 있는 사람을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는 강력한 표현을 사용했다(요일 2:4). 주님을 제외하고는, 모든 성경에서 진리의 개념 자체를 찬양하는 말을 요한보다 더 많이 표현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 요한의 진리에 대한 열심에는 사람을 향한 사랑이나 동정심이 모자랐다. 마가복음 9:38의 사건 – 요한이 다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는 것을 금지한 사건 – 은 요한의 이러한 점을 나타내는 좋은 예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극히 드물게 야고보와 베드로를 빼고 요한 혼자 말하는 모습을 본다. 동정심이 없는 요한의 모습은 그의 형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마리아 마을에 불을 내리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에서도 볼 수 있다(눅 9:54). 이 두 사건에서 요한은 신자에게나 불신자에게나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사랑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만이 경험한 그리스도의 변화산 사건은 그들 간의 라이벌 의식을 가지게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사건 역시 요한이 사랑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이 이 일 후에 가버나움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막 9:33)라고 물으셨다. 예수님은 그것을 정말 알고 싶어서 물으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그들이 무엇을 토론했는지 분명히 알고 계셨다. 그저 그들의 고백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그들은 부끄러웠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막 9:34)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러한 일로 쟁론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분명히 그들의 양심이 그들을 자극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소동이 무엇에 대한 것이었는지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기회를 통해서 다시 한번 가르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 9:35) 그것은 사랑에 대한 교훈이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고전 13:4~5). 사랑은 상대방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하고 섬김으로써 나타난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용기와 야망과 추진력과 정열과 담대함과 진리에 대한 열심을 지닌 사람들이 필요하다. 요한은 확실히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잠재력을 다 발휘하기 위해, 그에게는 사랑으로 균형을 잡아주는 일이 필요했다. 나는 이 일화가 결국에는 사랑의 사도가 되게끔 그를 움직이게 만든 중요한 훈계였다고 생각한다.

요한은 항상 진리에 헌신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진리를 향한 열심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품위가 없다. 그것은 잔인할 뿐이다. 반대로, 진리가 없는 사랑은 특징이 없다. 그것은 단지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균형을 잡지 못하고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그들은 사랑을 너무 많이 강조하여 사랑에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다. 사람들은 무지하거나 속고 있거나, 아니면 아예 진리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이러한 각각의 사람들에게 진리는 없고, 겉으로만 관용을 베푸는 것처럼 보이는 오류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에 대한 빈약한 대용품이다. 사람들은 사랑과 관용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만, 진리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무리 “사랑”을 말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부패한 사랑이다. 참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전 13:6).

반면에 자신만의 신학이론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나름의 교리를 가지고, 사랑 없이 자기 자신을 높인다. 그들은 진리를 차갑고 답답하며 매력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사랑 없는 이들은 진리를 존경한다고는 하나 진리의 능력을 불구자로 만드는 것이다.

참으로 경건한 사람은 두 가지 덕목을 똑같이 길러야만 한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성화를 위해 무언가를 원한다면 그것을 소망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신령한 무언가를 추구한다면, 진리와 사랑 사이의 완벽한 균형을 추구해야 한다.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사랑으로 받들어야 한다.

에베소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은 진리와 사랑의 조화를 영적인 정점으로 묘사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라고 말했다. 그는 완전한 성숙과 완벽하게 그리스도를 닮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애쓰면서 추구해야 할 목표를 이렇게 요약해서 말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진리의 완벽한 표현이자, 동시에 사랑의 완벽한 표현이다. 그는 우리의 모델이다.

성숙한 사도로서 요한은 그 교훈을 잘 배웠다. 그의 간략한 두 번째 서신은 그가 얼마나 진리와 사랑을 잘 조화시키고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 편지 내내, 요한은 거듭해서 사랑과 진리 개념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그는 “장로인 나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요이 1)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요이 4)라고 했다. 그런 후에 편지의 처음 절반을, 이러한 사랑 가운데 행하라는 촉구의 말로 채우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새 계명을 상기시키고 있다. 물론 그 계명은 진짜로 새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처음부터 들은 계명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요이 5).

그러나 요한은 편지의 후반부에서 진리를 해치고 있는 거짓교사를 받아들이거나 타협하지 말라고 촉구하면서, 사랑과 진리의 균형을 가르치고 있다. 진정한 사랑은 진리를 무시하고 모든 것에 관용하는 어떤 사카린과 같은 감상이 아닌 것이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요이 7~11).

요한은 비록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하늘로부터 불을 요청하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지만, 이 서신서의 수신자인 여인에게 다른 극단에 빠지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 있다. 그녀는 진리를 왜곡하거나 대적하는 사람들에게 집을 개방하거나 축복해서는 안 되었다.

사랑과 진리는 완전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사랑의 이름으로 결단코 진리가 내던져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진리의 이름으로 사랑이 폐기되어서도 안 된다. 바로 그것을 요한이 그리스도에게서 배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배움은 요한에게 절실했던 균형을 이루게 해주었다. [복음기도신문]

이 글은 Adapted from Twelve Ordinary Men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며,  “예수가 선택한 보통 사람들”(씨뿌리는 사람)으로 번안되어 시판 중입니다.

원문: https://www.gty.org/library/blog/B150630/john-the-apostle-of-uncompromised-love

존 맥아더(John MacArthur)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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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
[GTK 칼럼] 사도 요한(1) : 분파적인 사랑의 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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